사람은 만물의 노예라도 좋다
다나카 쇼조는 1907년 12월 5일 ‘산천의 수명 인류의 수명’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이나 강의 수명은 만억 년에 이른다. 30년이나 50년 전은 산과 강의 한순간이다. 사람의 짧은 수명이나 모자란 지식으로 생각하니 30년이나 50년을 옛날처럼 느끼는 것이다. 산은 천지와 함께 나이를 먹어 왔다. 또한 귀중한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의 간섭 따위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산천의 수명’ 곧 ‘자연의 생명’은 영원하다. ‘인류의 수명’ 곧 ‘인간의 생명’은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쇼조는 한순간의 목숨붙이에 불과한 인간이 자연에 ‘간섭’하고, 자연을 해치는 것을 ‘문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의 수명을 자연의 수명과 마주 놓고 견주는 발상이, 만년이 되면 꽤 강하게 보인다. 때로는 인간의 수명은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한다. “천지는 길되, 생명은 짧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지와 한몸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쇼조는 이러한 자세로 이윽고 근대 문명의 바닥에 깔린 인간중심주의도 마주 놓고 보기에 이른다. 그것이 잘 드러난 문장을 옮겨 보자.
사람은 만사의 우두머리가 아니어도 괜찮다. 만물의 노예라도 좋다. 만물의 고용인이라도 상관없고, 심부름꾼이어도 된다. 인간은 그저 만사 만물 가운데 있는 존재로, 사람의 고귀함은 만사 만물을 거슬러 해치지 않고, 타고난 기운을元氣 바로잡아 고립되지 않는 데에 있다. ……
사람은 반드시 만물의 우두머리가 아니어도 된다. 만물의 노예라도 좋다. 고용인이라도 좋고, 우두머리의 심부름꾼이어도 괜찮다. 솔직히 말하면 말이나 사슴이어도 상관없다. 사람은 만물 가운데 섞여 살며 통찰력이 뛰어나 만사를 잘 비추고, 화합하여 모든 일을 거스르지 않고, 자기 잘못을 고치고, 남이 만사에 지은 죄를 씻으며, 그 몸이 본디 타고난 기운을 밝혀 일하게 하고, 진실을 헤아려 고립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우두머리에 가깝다.
― 1912년 5월 14일
우리가 거의 누구나 배워 온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자연이나 다른 생물들보다 우리 인간이 우월하다는 근거로 여겨져 왔다. 인간 중심적인 발상이 몹시 짙다. 그런데 쇼조는 먼저 이런 인간의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인간은 ‘만물의 노예라도 좋다. 만물의 고용인이라도 상관없고, 사환이어도 된다’. 다만 인간은 ‘만사 만물 가운데 있’는 것, 곧, 자연 속에서 다양한 것들의 혜택을 입으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므로, ‘만사 만물을 거슬러 해치지 않고, 타고난 기운을 바로잡아 고립되지 않는’ 것, 즉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기 잘못을 고치고, 남이 만사에 지은 죄를 씻’고자 힘쓰면서, 비로소 사람은 ‘우두머리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만물의 우두머리’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교만한 생각이나 태도를 버리고 만사 만물에 깃든 영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이들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고자 애쓸 때 비로소 영적 존재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젠가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other, 1875~1965의 전기를 읽다가 이런 대목을 만났다.
“따라서 윤리란 모든 사람이 살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것이다. 동시에, 살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다른 모든 생명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근본원리란 생명을 지키고 이를 북돋우는 것이 선이며, 생명을 꺾고 이를 해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고뇌하는 다른 생명을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편,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할 때, 진정으로 윤리적이다. 그때 인간은 그 생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라고는 묻지 않는다. 그에게는 생명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나뭇잎 하나도 따지 않는다. 한 송이 꽃도 꺾지 않는다. 벌레 한 마리도 밟아 죽이지 않는다.”(《슈바이처》 고마키 오사무·이즈미야 슈사부로, 시미즈 쇼인)
슈바이처 사상의 바탕에 ‘생명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짚은 것이다. 이 인용의 마지막과 아래 쇼조의 글을 견주어 보기 바란다.
쇼조에게 이 삼사십 년은 한 꿈과 같다. 자식과 아내, 형제, 친구는 물론, 친한 사이이건 아니건, 멀리 살건 가까이 살건 가리지 않고 훨훨 찾아다녔다. 바람처럼 비처럼, 또 새처럼 짐승처럼 머물 곳조차 정하지 않았다. 새나 짐승보다도 못한 생활을 해 온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사회에도 보탬이 안 되고, 자식과 아내에게도 보탬이 안 되고, 나아가 친지와 벗에게도 보탬이 안 되면서, 쇼조는 올해 예순일곱이 될 때까지 무엇을 했는가. 그저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남의 집에 불을 지르지 않고, 감히 사람을 죽이지 않고, 새를 죽이지 않고, 벌레를 죽이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있을 뿐. 이루지 못할지언정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됨됨이가 있을 뿐입니다.
― 1907년 7월 24일
다나카 쇼조가 야나카 마을 어느 집에 묵다가 한밤중에 마당으로 나와 오줌을 누는데, 물새가 너무 놀라서 눈이 보이지 않을 텐데 다치지는 않았을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깊이 뉘우쳤다. 그렇게 쇼조는 새의 형편도 내 일처럼 걱정했다. 새도 벌레도 죽이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고 말하듯, 생명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분명하게 품고 있었다.
생명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보듯, 쇼조는 자연계의 모든 존재에 깃든 영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신앙의 원점이라고도 할 만한 영성과 신비로움 앞에서 겸손해야겠다고 마음에 새겼다. ‘사람의 삶은 신비를 연구하는 것이 평생의 일이고, 또 신비를 아는 것은 사람의 천직이다. 하늘이 명령한 공무이며, 사람은 신비를 살펴 연구하고 감탄하기 위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대 문명에 흠뻑 빠져 생활하는 동안, 어느덧 이런 겸허함을 잃어버린 것 같다. 쇼조가 말하는 ‘진정한 문명’이란 자연과 인간이 관계맺어 온 근본 방향 자체를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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