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랑
― 어둠을 위하여
빨래터에서도 씻기지 않은
고씨 족보의 어둠을 펴놓고
그 위에 내 긴 어둠도 쓰러뜨려
네 가슴의 죄 부추긴 다음에야
우리는 따스히 손을 잡는다
검은 너와 검은 내가 손잡은 다음에야
우리가 결속된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쓰러지는 법을 배우며
흰 것을 흰 채로 버려두고 싶구나
너와 나 검은 대로 언덕에 서니
멀리서 빛나는 등불이 보이고
멀리서 잠든 마을들 아름다워라
우리 때 묻은 마음 나란히 포개니
머나먼 등불 어둠 주위로
내 오랜 갈망 나비 되어 날아가누나
네 슬픈 자유 불새 되어 날아가누나
오 친구여
오랫동안 어둠으로 무거운 친구여
내가 오늘 내 어둠 속으로
순순히 돌아와 보니
우리들 어둠은 사랑이 되는구나
우리들 어둠은 구원이 되는구나
공평하여라 어둠의 진리
이 어둠 속에서는
흰 것도 검은 것도 없어라
덕망이나 위선이나 증오는 더욱 없어라
이발을 깨끗이 할 필요도 없어라
연미복과 파티도 필요 없어라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손을 맞잡는 일
손을 맞잡고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안는 일
부둥켜안고 체온을 느끼는 일
체온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일이거니
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별이여
내 여윈 팔등에 내려앉는 빛이여
너로구나 모른 체할 수 없는
아버지 눈물 같은 너로구나
아버지 핏줄 같은 돈으로
도시에서 대학을 나오고
삼십 평생 시(時) 줄이나 끄적이다가
대도시의 강물에 몸 담그는 밤에야
조용히 조용히 내려앉는 빛이여
정작은 막강한 실패의 두 손으로
한 웅큼의 먹물에 닫쳐든 흐―이―망
여전히 죽지 않는 너로구나
이제야 알겠네
먹물일수록 찬란한 빛의 임재, 그러니
빛이 된 사람들아
그대가 빛으로 남는 길은
그대보다 큰 어둠의 땅으로
내려오고 내려오고 내려오는 일
어둠의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서울 사랑
― 절망에 대하여
황혼 무렵이었지
네 외로움만큼이나 흰
망초꽃 한 아름을 꺾어 들고 와
하느님을 가진 내 희망이
이물질처럼 징그럽다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쓸쓸히 쓸쓸히 웃었지
조용한 밤이면
물먹은 솜으로 나를 적시는
내 오장육부 속의 어둠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라서
한기 드는 사람처럼 나는 웃었지
영등포나 서대문이나 전라도
컴컴한 한반도 구석진 창틀마다
축축하게 젖어 펄럭이는 내
하느님의 눈물과 탄식을
세 치 혀로 그려낼 수는 없는 것이라서
그냥 담담하게 전등을 켰지
전등불 아래 마주 선 너와 나
삼십대의 불안과 외로움 너머로
유산 없는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
그러나 친구여, 나는 오늘 밤
오만한 절망으로 똘똘 뭉쳐진
한 사내의 술잔 앞에서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를
다시 쓸쓸하게 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 음미하면서, 오직
내 희망의 여린 부분과
네 절망의 질긴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닿기를 바랐다
아프리카나 베이루트나 방글라데시
우울한 이 세계 후미진 나라마다
풍족한 고통으로 덮이시는 내
하느님의 언약과 부르심을
우리들 한평생으로 잴 수는 없는 것이라서, 다만
이 나라의 어둡고 서러운 뿌리와
저 나라의 깊고 광활한 소망이
한 몸의 혈관으로 통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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