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왜 문장인가?
애니 딜러드가 『작가살이』1989라는 저서에서 전하는 이야기 한 토막. 딜러드의 동료 작가가 학생의 질문을 받는다.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작가는 반문한다. “글쎄요, 문장을 좋아하나요?” 학생은 이러한 반문에 놀란다. 그러나 딜러드는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안다. 동료 작가가 학생에게 던진 질문은 “문장을 좋아하는 일이야말로 작가 생활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였다. 딜러드는 화가 친구와 비슷한 대화를 나눈 기억을 떠올린다. 친구에게 어쩌다 화가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물감 냄새가 참 좋아.” 딜러드가 전하는 사연에 숨어 있는 핵심 ― 딜러드의 말은 장황한 법이 없다 ― 은 위대한 소설 혹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릴 걸작을 거창하게 구상하는 것만이 작가나 화가로의 출발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림이나 글의 도구에 대한 느낌이 그 시작이 된다. 그림의 도구는 물감, 글의 도구는 문장이다.
하지만 물감에 필적하는 글의 도구는 문장보다는 단어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 그림을 그릴 때는 붓질을 하거나 물감만 캔버스에 떨어뜨려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지만, 단어를 쌓아놓는 것만으로는 별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글이 되려면 뭔가 추가해야만 한다. 앤서니 버지스는 『엔더비의 바깥』Enderby Outside, 1968이라는 소설에 추가해야 할 그 무엇을 정확히 풀어놓았다.
단어들은 문법의 안수를 받아
정해진 자리로 스르륵 들어가,
대기의 먼지로 반짝이는 별처럼
의미라 불리는 불순물과 함께 반짝인다.
정해진 자리로 들어가기 이전의 단어들이란 그저 따로 떨어져 있는 물품과 같아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정해진’ 장소에 안착하면 단어들은 관계라는 줄에 묶여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안수를 받는다ordained’는 표현은 그야말로 적확하다. 문법 구조의 냉혹한 논리를 성스러운 운명에 비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제 문장으로 묶인 단어들은 주체, 대상, 행위, 묘사, 혹은 방식의 표현이 되어 세계에 대한 한 가지 진술로 결합된다. 그러면 우리는 독자로서 그 진술의 의미를 되새기거나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거부하거나 더욱 다듬는다. 버지니아 터프트Virginia Tufte는 『문장 기교』Artful Sentences, 2006라는 저서에서 버지스의 문장을 첫머리에 인용한 다음 논평을 덧붙인다. “단어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문법이다. 단어는 문법을 통해 제자리에서 따로 빛날 뿐 아니라, 질서 체제 내에서 연계를 맺음으로써 특정한 의미를 전달한다.” 19세기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딱 맞는 단어mot juste’를 모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찾는 것은 홀로 빛나는 단어가 아니다. 정확하게 자리를 잡아 다른 단어들 ― 역시 제자리를 잡은 다른 단어들 ― 과 결합하여, 잘 깎은 다이아몬드처럼 시공간 속에서 빛나는 단어야말로 플로베르가 모색한 ‘딱 맞는 단어’다. 딜러드로 돌아가보자. “글 쓰는 이들은 단어들을 일렬로 배치한다. 한 줄로 늘어선 단어들은 광부의 곡괭이, 목판 화가의 끌, 외과의의 탐침과 같다. 작가는 단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가야 할 길을 판다.” 길 끝에 다다르면 문장이 나타난다. 플로베르는 어느 편지에서 자신을 반 병자에 비유했다. “문장들로 온몸이 근질거린다.” 그는 문장을 내뱉어야만 했고, 자기 문장을 행인들에게 토해내곤 했다.
나도 이런 작가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는 조류를, 또 누군가는 유명인들을 관찰한다. 식물이나 동물을 관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문장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순수 미술이나 좋은 포도주를 음미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좋은 문장을 음미한다. “우와, 참 대단하지 않아?”, “저 문장 좀 보라고!”라는 감탄을 이끌어내는 문장을 찾아 헤매는 일이 내 업이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 문장 감식가들 중에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이들도 있다. ‘최고의 문장Best Sentences Ever’, ‘우리가 사랑하는 문장Sentences We Love’, ‘최고의 첫 문장Best First Sentences’, ‘최고의 마지막 문장Best Last Sentences’ 등의 사이트다. 이곳에 등장하는 문장들은 이들이 표현하는 현실 정치나 사회적인 주장, 혹은 철학적인 내용의 가치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다. 이 문장들은 문장의 기교를 최고 수준으로 성취해냈다는 이유로 선발되었다. 가장 근접한 비유로는 스포츠 현장에서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명장면을 들 수 있다. 세계 5대 덩크슛, 10대 캐치볼, 혹은 15대 터치다운 등의 업적 같은 것 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성취를 보고 “대단하지 않아?”, “믿을 수 있겠어?”, “저게 어떻게 가능한지 평생 봐도 모를 거야”, “와! 눈으로 보는데도 믿을 수가 없군!”, “저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냐!”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경탄은 늘 우울한 현실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우리 같은 평범한 무리는 저들과 똑같은 손과 발을 갖고도 저런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깨달음. 뛰어난 문장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가 해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일을 그런 문장은 척척 해낸다. 우리는 이러한 문장을 보며 감탄을 내뱉는다. 아내나 남편, 친구들, 심지어 때로는 행인들에게도 문장을 읽어주며 공감을 구한다. 이 탁월한 문장을 분석하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애석해한다.
질투할 수밖에 없는 좋은 문장의 장점은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하루는 차를 몰아 퇴근하는 길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진행자는 전설의 여배우 조안 크로포드193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하던 여배우이자 댄서 ― 옮긴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크로포드는 집을 나설 때마다 시사회장에 참석하거나 사디스 같은 고급 식당에 가는 사람처럼 옷을 차려입는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하던 기자가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꾸한다. “옆집 여자가 보고 싶으면 옆집으로 가세요.” 조안 크로포드의 생각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자신 같은 스타가 스타 행색으로 다니는 것이 팬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로 다가간다는 통찰은 일견 당연하니까. 정작 놀라운 점은 크로포드가 그러한 통찰을 맛깔난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옆집으로 가세요’라는 짤막한 문장의 간결한 속도감은 ‘옆집 여자’라는 진부한 단어를 끌어다, ‘옆집’은 매력적인 여자를 찾아서는 안 되는 흔해빠진 현실 공간이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일깨워준다.
좋은 문장은 영화 장면 한가운데에 나타나 잠깐 반짝하고는 플롯이 진행되면서 뒤로 물러난다. 영화 〈황야의 7인〉1960ㅗㅗ. 속 한 장면, 엘리 웰라치가 역할을 맡은 도적떼 두목은 식량과 물자를 자기 일당에게 빼앗기는 농민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그 이유를 한마디 냉소로 표현한다. “양은 원래 털이나 깎일 팔자거든.”
찰싹! 채찍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두목이 내뱉은 문장은 지혜를 담은 격언 형식이다. 이 문장이 지향하는 단호한 확신의 느낌은 모음과 자음의 리듬감, 다시 말해 ‘양’과 ‘원래’, ‘털’과 ‘깎일’과 ‘팔자’라는 단어가 주는 간결함에서 비롯된다. 양이 ‘털이나 깎인’다는 말은 가진 것을 빼앗기는 농민의 운명이 양처럼 불가피하다는 함의를 잘 드러낸다. 최소한 특정 관점에서는 적확한 표현이다. 도적치고는 나쁘지 않은 말이다.
좋은 문장은 어른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 배우자의 어머니 루실 라일리 패리 여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셨다.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학교로 큰 상자가 배달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거기 뭐가 들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당신이 가르치던 4학년 학생들에게 그 상자를 주제로 작문 과제를 내셨다. 한 학생은 이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다. “상자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미 2층에 있었다.”
이 문장이 놀라운 이유는 독자의 관심을 빨아들여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흡입력은 독자가 가진 정보와 가지지 못한 정보의 문제다. 독자는 이 문장을 읽고 글쓴이가 무언가 하던 중인 것을 알게 되지만‘나는 이미……’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글쓴이가 상자 이야기를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 그 사실이 그가 하던 일에 (혹시 영향을 끼쳤다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수 없다. 결국 독자는 정보를 알고 싶어서 글을 계속 읽을 수밖에 없다. 숙련된 작가들은 흔히 탁월한 첫 문장만으로 애초에 끝장을 본다.
(중략)
이러한 호들갑이 점잔 빼는 가식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건 아니다. 지금 나는 문장이 무슨 ‘단 하나밖에 없는 명품’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다. 문장이, 월터 페이퍼영국의 평론가 ― 옮긴이가 언급한 “예술에서 추구하는 찬란하고 강렬한 경험, 오직 그 경험이라는 목적만을 위해 스치듯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최상의 것만” 보장해주는, 최고의 경험을 보여주는 별개의 사례라도 되는 듯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 문장은 그 이상의 것, 즉 세계를 조직하기 위한 가르침과 실천을 보장한다. 문장의 기능이란 원래 그렇다.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단위, 어떤 의미에서는 인위적인 단위로 세계를 조직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세상을 단위로 조직한 다음, 그 안에 살면서 그들을 다시 조종해나간다. 행위자와 행위와 대상이 시간과 공간, 기분, 욕망, 공포, 원인과 결과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문장을 쓸 수 있다면, 그 관계를 구체화하여 정확히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의도한 대로 전달할 수만 있다면, 추정과 확장을 통해 어떤 것이든 쓸 수 있다. 한 단락이건, 주장이건, 수필이나 소론, 논문, 소설이건 종류는 상관없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말했다. “어떤 담론이건 담론이 표현하는 것은 전부 한 문장 안에 담겨 있다.”『이미지 음악 텍스트』, Image music Text, 1977 그는 또 덧붙였다. “규모와 무관하게 모든 담론은 하나의 긴 문장이다…… 마찬가지로 한 문장은 그 자체로 짧은 담론이다.” 몇 년 전 이 책을 계획하고 있을 때, 내가 일하던 대학의 학과장 휴 케너Hugh Kenner 선생은 내게 “일단 첫 문장을 제대로 쓰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요지의 조언을 해주었다. 뜻인즉슨, 내가 쓴 첫 문장이 그것에서 시작된 여정의 우여곡절을 온전히 이해한 결과물이라면그 경우 첫 문장은 곧 마지막 문장이 된다 그 문장만 따라가도 내 주장과 사례들의 질서가 제대로 잡힌다는 것이다. 그 충고는 옳았다.
영국 시인 존 던의 말대로 한 문장은 “교묘히 창조된 작은 세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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