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지구의 이번 생은 망한 걸까.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이토록 깨끗하고 멋지고 당연하게 여겨지다니, 이 막돼먹은 편리함에 답이 없어 보인다. 지금 시대는 작심하고서 물건을 버리도록 고안된 세상 같다.
처음 일회용 종이컵이 나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차마 컵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사용했다. 칠칠치 못하게 길바닥에서 음료를 마시고는 멀쩡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다니, 지금은 상상이 안 가지만 당시 시민들은 쉽게 버리는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난감해진 제조업체는 ‘제발 한 번 쓰고 좀 버리세요’라는 일회용 개념을 우리 머리에 장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90년대 말 한 해외 커피 브랜드가 국내에 처음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업은 ‘시크한 젊은 여성’ 이미지를 슬쩍 이용하기로 했다. 어느 여대 앞에 1호점을 열어 도시 여자의 세련된 테이크아웃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일회용 컵은 공항 패션이나 연예인 파파라치 사진에 담긴 필수품으로 등극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초여름 어느 날, 나는 70여 명의 ‘쓰레기 덕후’들과 거리에서 휘핑크림에 얼룩지고 레몬 조각이 동동 떠있는 일회용 컵을 줍고 있었다. 누군가는 5초 만에 컵을 버렸고 우리는 5초마다 컵을 주웠다. 이렇게 모인 컵들은 어디로 갈까? 이 컵들은 짧게는 30년, 길게는 300년 동안 건재하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대부분 재활용도 되지 않는다. 잘게 쪼개져 미세플라스틱이 될 뿐이다.
플라스틱 판타스틱의 비극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실존주의가 멋져 보여서 겉멋에 읽었던 카프카의 소설 한 구절을 기억한다. 나는 ‘대문자’ 운동 체질이 아니다. 국가나 희생 같은 거창한 담론보다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소문자’의 삶을 사랑한다. 일상에 솟아난 작은 마음들을 끼적이는 순간을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소싯적 꿈은 대문자 삶을 다루는 신문기자가 아니라 핫해 보이는 패션 잡지 에디터였다. 그들은 골덴을 ‘코듀로이’로, 야구 점퍼는 ‘바시티 재킷’이라는 폼 나는 용어를 썼더랬다. 잠바때기의 일상마저 세련되게 만드는 작업이 좋아 보이던 어느 날, 화장실에 떨어져 있던 페미니즘 교지를 주워 읽고는 편집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배웠다. 이후 소문자는 대문자의 삶으로 나아갔다.
먹고 입는 일상을 다르게 살기 위해 환경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로 여성 건강에 초점을 맞춰 생활용품 속 유해물질과 슬로 라이프를 다뤘다. 건강을 해치는 야간 노동을 줄이기 위해 24시간 여는 대형마트에 파자마와 수면 안대 차림으로 쳐들어가 드러눕는 플래시 몹도 진행했다. 그 결과 대형마트는 밤에 문을 닫고 격주에 한 번씩 쉰다. 영수증 속 비스페놀A, 일회용 컵 코팅의 과불화화합물, 립스틱에 든 중금속, 방향제 속 프탈레이트에 반대하는 캠페인도 진행했다. 내가 사는 일상을, 그리고 지구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화장품 속 미세플라스틱에 대한 관심으로 자원활동가를 모아 9,000여 개의 성분을 일일이 확인해 서명운동을 펼친 적도 있다. 덕분에 국내 최초로 세정용 제품 속 미세플라스틱 사용금지라는 화장품법 개정을 일궜다. 이제 한국은 화장품에 미세플라스틱을 금지한 전 세계 15개국 중 한다.
그다음 활동은 일회용 생리대의 유해물질을 알리고 건강한 생리대를 요구하는 캠페인이었다. 마침 건강 문제를 겪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논쟁에 불이 붙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시달려서인지 단체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이 버겁게 느껴졌다. (아직도 내가 일했던 단체는 ‘생리대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일상이, 관계가 덜그럭거렸다.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할머니 활동가로 늙고 싶었는데 덜컥 꿈을 접었다.
일을 그만두자 일상과 더 가까워졌다. 집 근처 시장과 생협에서 먹거리를 구하며 동네를 산책하거나, 빨래하고 청소하고 뒹구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살림에 더 가까워졌다. 특히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사물 중 플라스틱이 눈에 밟혔다. 거북이에게 고통을 주고 흙과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인간이 남긴 찌꺼기에 대해서.
우리의 일상은 플라스틱으로 그득그득 차 있다. 중독 수준이다. 일단 플라스틱이 천연 소재를 대체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플라스틱은 어마어마하게 ‘판타스틱’해서 천하무적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이 납시면 금속이나 목재, 면화 등 천연 소재는 뒷방으로 물러나기 십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케냐의 비닐봉지 금지법(사용시 벌금 4천만 원)을 이끌어낸 활동가 제임스는 말했다.
“정말이지 플라스틱처럼 판타스틱한 재료가 어디 있어요. 다만 모든 곳에 존재하니 문제죠.”
어쩌다 쓰레기덕질
플라스틱 자체가 아니라 이 판타스틱한 소재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는 사회에 분노한다. 주변에서 어쩌다 플라스틱 반대 활동가가 되었냐고 묻는데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마구 쓰고 마구 버리는 행동에 단전으로부터 올라오는 깊은 빡침을 느꼈을 뿐.
플라스틱을 한 번 쓰고 버리기엔 대가가 너무 크다. 그러니 일회용 플라스틱 따위는 줄이고 줄여 사라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결심으로 동네 망원시장에서 비닐봉지 없이 알맹이만 사는 ‘껍데기는 가라, 알맹@망원시장’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우리는 안 쓰는 장바구니와 종이 쇼핑백을 모아 비닐봉지 대신 대여한다. 가끔 시장 한복판에 채소와 과일 등 알맹이만 모아 놓고 장바구니 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캠페인도 연다. 가방 속에 검정 비닐이 있는지 공항 검색대 직원만큼이나 꼼꼼하고 엄하게 따진다.
그러다 보니 자기 동네 전통시장도 바꿔보고 싶은 사람들일 모여든다. 서울 효창동 전통시장 상인회에서, 인천 신포시장 근처 가톨릭 교구에서, 포항 쓰레기 없는 마을을 꿈꾸는 엄마들 모임에서… 전국 곳곳에서 알맹이만 사고파는 활동을 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할 말은 많은지라 부르면 냉큼 가서 다다다 노하우를 공유하며 같이 한숨 쉬다, 이 많은 사람들이 깨알같이 애쓰고 있구나 싶어 힘을 받는다.
알맹 활동이 동네에 뿌리를 뒀다면 ‘쓰레기덕질’은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개인들의 온라인커뮤니티다. 누구나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동참하려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렇게 셋 이상 모이면 바로 활동이 시작된다. 비용이 없으면 자기 돈으로 진행하고 전 과정을 게시판에 공개한다.
일회용 컵을 주는 카페를 모니터링해서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을 잡고, 그 여파를 몰아 ‘플라스틱 컵 어택’을 벌여 테이크아웃 컵도 줄여보자고 나선다. 까다롭게 왜 저래, 비위생적이야,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과거로 돌아가자는 거냐, 지 혼자만 그런들 뭔 소용이야, 결국 기술이 해결할 거야, 지지리 궁상, 얼마나 아낀다고… 뒤에서 쑥덕이는 말을 들으면 삼겹살 회식에 참석해야만 하는 말단 채식주의자 사원 같은 느낌이 든다.
내 돈 내고 장 보고 포장재 비용도 아껴주는데 “저기…제 반찬통을 가져왔는데요” 하며 슬그머니 눈치를 본다. 때로는 가방에서 장바구니를 꺼내는 사이 이미 비닐봉지에 담긴 물건이 내게 온다. 상인들 손이 얼마나 빠른지, 원 참. 다시 내 장바구니에 옮겨 담고 비닐봉지를 돌려 드리는 진상이 된다. 텀블러로 주문한 음료에 일회용 빨대가 꽂혀 나오고, 뭔가를 흘리면 주변에서 친절하게 물티슈를 내미는데 이를 어찌 거절하나 싶다.
이 세상의 ‘기본값’은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으로 세팅되어 있다. 이를 거스르는 사람들은 일회용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진다. 솔직히 새벽마다 텀블러에 정화수를 떠놓고 쓰레기 대란이 다시 일어나길 간절히 빌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한없이 작아진 존재들과 함께 뭉치면서 내 일상은 일회용 플라스틱 없어도, 안간힘을 쓰지 않고도 별일 없이 굴러가게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며 손잡아준 존재들이 겹겹이 쌓여 소문자의 삶이 두터워진다.
쓰레기 덕후 소셜 클럽
이 책은 일회용 플라스틱에 ‘열폭’하다가 쓰레기 덕후로 거듭난 사람들과 그들이 모여서 사부작사부작 시작한 ‘쓰레기 덕후 소셜 클럽’의 이야기를 담았다. 클럽은 그때그때 함께하는 게릴라들로 구성된다. 화장품 미세플라스틱 반대 운동,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 모니터링, 플라스틱 어택, 알맹@망원시장, 일회용 컵보증금제 등 관심사에 따라 매번 다른 사람들이 만나 자유롭게 활동한다. 생판 남이 함께하다 보면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되고 유동적인 조직이 된다.
내가 만난 가장 일 잘하면서도 여유 있는 워커홀릭들이 바로 이 덕후들이다. 심지어 서로 배려하기 바쁘다. 이들은 생계가 따로 있어 한낮의 캠페인에는 반차를 쓰고, 늦은 밤 화상채팅으로 회의하고, 서로 빈 곳을 채워주며 열정적으로 일한다. 가끔 취재 나온 기자가 단체명을 묻는다. 우리는 “단체 아니고요, 그냥 덕후예요 덕후”라고 말해보지만 어김없이 기사에는 환경단체나 환경 네트워크 같은 이름이 실린다. 사무실도 없고 후원도 없고 단체도 아닌데 어디서 어떻게 일하느냔 질문도 받는다. 그러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저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할 수 있는 만큼, 쉬엄쉬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달까. 이렇게 좋은 걸 왜 다른 이들은 안 하는지 다단계 판매처럼 권하는 것이 덕질의 미덕인가 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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