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대별 통일 이야기
1
예나 플뤼겔 가족과 베어톨트 씨 이야기
동독은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예나Jena는 신연방주옛 동독. 재통일 시 독일연방공화국에 새로 가입한 5개주의 하나인 튀링엔Thüringen 주의 인구 11만 명 규모 중소도시다. 세계적 광학 기업인 칼 자이스Carl Zeiss의 의료장비사업부와 천문장비사업부가 이 도시에 있다. 칼 자이스의 기업 철학을 다진 경영인이자 과학자인 에른스트 아베가 교수로 머물렀고, 카를 마르크스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곳인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도 유명하다. 신연방주 대부분이 침체의 늪에서 지금도 헤매지만, 예나의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오랫동안 이어진 산학 협동 체제가 안착한 덕분이다. 이 때문에 주거비용이 계속해서 오르는, 신연방주에서는 찾기 힘든 모습의 도시다. 다른 신연방주 도시는? 대체로 예나와 반대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줄어드는 인구, 고령화, 저소득, 실업이 키워드다.
크리스티안 플뤼겔-카린 플뤼겔 부부와 이바 마리아 베어톨트 씨를 만났다. 이들은 아동기에 동독 체제의 전성기를 통과했고, 청년기에 동독 체제에 적응했으며, 중년이 되어서는 동독 민주화 운동과 독일 재통일을 경험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새로운 사회에 안착했다. 플뤼겔 부부는 평생을 지낸 자택에 거주하는 자녀 부부와 교류하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베어톨트 씨도 안정된 직업을 가진 자녀 부부를 가끔 만나며 큰 문제없는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옛 시절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유가 중요했다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서 만난 플뤼겔 부부는 1971년에 결혼했다. 그리고 첫아이를 바로 얻었다. 크리스티안 씨는 측량기 설계사로, 기계 설계사로 직업을 바꿔 가며 일할 때였다. 동독인은 부분적으로 일자리 선택에서 자유를 누렸다. 일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퇴사 후 곧 국가였던 집권당인 동독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에 다른 일자리를 알선해 줄 것을 요청할 권리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북한 사람에 비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린 셈이다. 하지만 대학 진학과 같은 진로 선택 과정에는 당의 입김이 반영됐고, 부모의 출신 성분 역시 일자리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일당 독재 체제였던 동독의 인민이 가진 일자리 선택권이 민주주의 국가 인민의 그것만큼 컸다고 말하기는 무리다.
카린 씨는 육아를 위해 잠시 일을 쉬었다. 쉬다 보니 시간이 흘렀다. 카린 씨가 다시 회계업무자로서 노동 현장에 나간 건 결혼 14년째였다. 지속적인 인구 유출로 인해 여성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동독 사회에서 여성이 이처럼 오래 집에 머무른 건 흔치 않은 사례다. 이들 부부의 사고방식이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들은 동독 정부에 아이를 맡기길 원하지 않았다.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는 근본 문화이자 삶의 방식이다. 제아무리 당이라도, 유물론 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이를 단숨에 탄압할 수는 없었다. 유일한 스탈린식 영도 체제만을 원한 당에 교회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SED는 교회를 꾸준히 감시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동독이 무너질 때까지 동독 내 저항 세력의 기반이 되었다. 동독과 북한의 다른 점이 이 대목에서 발견된다. 북한에는 독재 체제에 저항할 구심점이 없다.
플뤼겔 부부의 자녀는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시험를 보지 못했다. 부부가 기독교 신자였고, 당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부의 큰아들은 반에서 1등을 도맡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독의 교육 체제에 관한 더 자세한 증언은 플뤼겔 부부의 자녀 세대 이야기에서 다룰 예정이다.
부부는 자녀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되기를 원했다. 1987년, 부부는 당시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국가평의회 서기장에게 탄원서를 써 자녀의 아비투어 응시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평범한 인민이 독재 국가 원수에게 탄원서를 쓴다니! 조금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엄밀히 말해 이들이 쓴 편지는 ‘에리히 호네커로 상징되는 당국 담당자 앞으로 쓴 편지’다. 형식적으로 동독은 민주주의 국가였다. 온 인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따라서 인민은 누구나 원하는 바를 당에 요청할 수 있다고 선전됐다. 물론 부부의 편지는 이 ‘형식’이 존재함을 입증하는 증거였을 뿐이다. 일은 뜻한 대로 풀리지 않았다. 자녀는 자신들처럼 노동자의 삶에 만족해야만 했다. 선택의 자유란 없었다. 그간 큰 불만 없이 살던 부부는 자녀의 진학 문제를 경험하며 닫힌 체제의 문제점을 절감했다.
베어톨트 씨도 체계화된 억압에 신음했다. 베어톨트 씨는 동독 유일의 공보험 회사에서 일했다. 요즘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잘나가는 공기업 직원이었다. SED 당원 가입 압력이 회사에서 내려왔다. 회사 내에는 당연히 슈타지STASI, 동독 국가보안부. 동독의 방첩기관이지만, 소련의 KGB처럼 사실상 시민 감시 역할을 담당했다와 연결된 인사가 있었다. 당시 동독의 중요 기관에는 어김없이 슈타지가 위장 근무했거나, 슈타지의 첩보원이 상존했다. 베어톨트 씨는 체제에 조용히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당원 가입을 거부해서 여러 차례 추궁을 당했다.
그사이 아이는 둘로 늘어났다. 회사를 옮겨야 했다. 보험사는 하루 8시간 근무를 요구했다. 젊은 나이였지만 자녀와 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던 베어톨트 씨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루 6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려니 이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청 공공 교통관리부로 이직해 대중교통 계획을 짜는 업무를 했다. 당시 일자리는 찾기 쉬웠다. 사람이 모자라기도 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노동은 노동자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점이 더 중요했던 당은 없는 일자리라도 만들어야 했다.
이 두 가족에서 공통점이 하나 발견된다. 결혼을 일찍 했고, 아이를 일찍 낳았다는 점이다. 플뤼겔 부부는 각각 스물세 살, 스물한 살에 결혼해 바로 아이를 가졌다. 베어톨트 씨는 스무 살인 1973년에 결혼했다. 옛 시절의 관습이었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겠으나, 동독 체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다 결혼을 일찍 했어요. 나이 스물에 아이를 가진 사람이 흔했지요. 동독에서 집은 당국이 모든 인민에게 지급하는 의무의 대상이었고, 사적 거래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당이 무조건 집을 준 건 아니에요. 결혼을 해야 집을 주고, 아이가 많아야 더 큰 집을 줬죠. 그러니 젊은 사람은 집을 얻기 위해 결혼을 일찍 할 수밖에 없었어요. 여자는 출산 몇 주가 지나면 바로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다시 일터로 나갔어요.”(베어톨트)
아이가 늘어나자 베어톨트 씨는 문제에 부딪혔다. 예나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칼 자이스 (당시) 본사가 위치했다. 동독 전역에서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10만여 명 규모의 이 도시가 동독 말기에는 6만여 명의 칼 자이스 노동자를 품었다.이들 중 약 5만여 명이 재통일 직후 일자리를 잃었다 체제가 한계에 다다르자 집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가 많아도 방 2개짜리 집을 얻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동독 젊은이가 일찍 결혼한 이유, 일찍 아이를 낳은 이유가 집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당은 기본적 의무마저 이행하지 못했다.
시민 혁명
베어톨트 씨는 체제가 무너지리라 예감하기 시작했다. 실은 둘째를 얻기 전, 1981년에 한 아이를 더 얻었다. 하지만 출산 닷새 만에 아이가 사망했다. 아이의 기형이 원인이었다. 영양 결핍 문제도 있지 않았나 싶었다. 빵이나 버터를 얻기도 점차 힘들어졌다. 집 문제가 생기고 배가 고파지니 참았던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체제가 한계에 달했으니 사람을 계속 억누를 수는 없잖아요. 옛날에는 서독으로 이주를 요구하는 이들 중 정년퇴직한 노인만 이주를 허락했어요. 그런데 서서히 나이 제한이 풀리더라고요. 서독을 오가는 기준도 조금씩 완화됐고요. 서독에 가서 잘사는 친척을 만나 선물이라도 얻어 오면 사람들 기분이 풀리지 않겠느냐고 당국이 생각한 것 같아요. 물론 오산이죠.”(베어톨트)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민은 완전한 자유를 원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시민 저항은 1989년 9월 25일, 마침내 라이프치히Leipzig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역사적 민주화 운동 ‘월요 시위’로 폭발했다. 한 달 후 시위 인원은 7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실질적인 독일 재통일의 시작이었다. 반체제 집회가 동독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예나에서도 성 미카엘 교회Stadtkirche Sankt Michael 앞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팔을 교차해 원을 빙 둘러선 채 조용히 침묵하는 시위였다. 플뤼겔 부부도 시위에 참석했다.
흔히 한국에서는 동서독 통일을 ‘독일 통일’로 표기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잘못됐다. 독일에서 동서독 통일은 ‘재통일Wiedervereinigung’로 표기한다.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 제국에 의한 1871년의 독일 제국제2제국 성립을 뜻한다. 독일 재통일을 시간순으로 정리할 때, 서독의 동방 정책만큼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사건이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이다. 동방 정책이 행정부 차원에서 주도한 움직임이며, 이념 대결의 승리자였던 서독이 주도한 정책인 데 반해 동독 민주화 운동은 인민 스스로 민주주의와 자유 여행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한국이 반독재 투쟁으로 민주 정권을 쟁취하던 때에 동독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동독 인민이 시위에서 주로 쓴 구호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말이다. 비록 이 구호가 최근 독일 극우의 인종차별 집회에 다시 쓰여 그 의미가 퇴색한 감은 있지만, 동독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민주화 운동은 실제 결실도 낳았다. SED는 독재를 포기하고 자유선거를 받아들이는 한편, 민주화 운동 대표자들과 함께 새 동독 헌법 개정 논의를 위한 시민회의기구 창설안도 받아들였다. 시민의 힘으로 새로운 민주 국가 동독이 만들어질 역사적 순간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1990년 5월 18일 동서 마르크화 통합이 이뤄짐에 따라 사실상 동서독은 하나가 되고, ‘민주 동독’을 꿈꾸던 이들은 도둑처럼 찾아온 통일 독일에 적응해야만 했다. 플뤼겔 부부는 예나 민주화 운동 당시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예나에도 슈타지 근무처가 있었어요.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도 슈타지의 비밀정보원이 참석한다는 걸 모두가 알았지요. 그들은 다 녹음기를 들고 다녔어요. 항상 당국이 감시하니까, 솔직히 말해 전 시위에 나갈 때 조금 무서웠어요.”(크리스티안)
“이 사람은 무서웠다는데, 전 안 무서웠어요.웃음 성 미카엘 교회 앞에 조그마한 광장이 있는데, 거기가 시 중심가입니다. 사람들이 거기 둘러서서 손잡고 원을 만든 게 다예요. 플래카드 같은 걸 들고 있지도 않았어요. 주로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나눴지요.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죠. 한번은 당시 국영기업화한 칼 자이스의 당국이 임명한 사장이 집회에 나와서 동독 정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어요.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했던 게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인상 깊은 장면이지요.”(카린)
서쪽에서는 샴푸 향기가 났다
분단 시절 동서 독일은 남북한과 달리 꾸준히 교류를 이어 갔다. 극동의 냉전 대리 지역이었던 한반도와 유럽의 냉전 전선 첨단이었던 독일 사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물론 분단 초기에는 동서독도 냉전의 최전선 국가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1960년대 말까지 서독은 동독 수교국과는 국교를 단절한다는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을 이행했다.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신 동방 정책Neue Ostpolitik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해빙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부 차원의 이야기다.
민간 교류는 분단 초기부터 매우 활발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독 한가운데에 있던 베를린에서 동서 사람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대 영역을 오갈 수 있었다.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상대 체제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이라면 당국의 허가 아래 왕래가 가능했다. 동독 체제가 점차 흔들리며 정부의 복지 부담이 커지자 정년퇴직자, 연금생활자는 자유롭게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정치범이나 체제 부적응자 등의 경우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일정액의 배상금을 내고 서쪽으로 데려오는 식의 이전도 있었다.
이산가족의 일회성 상봉조차 힘겨운 남북의 분단 상황과 사정이 많이 달랐다. 강릉원주대학교 이동기 교수는 “1963년부터 한 해에 가장 적게는 7,000여 명, 가장 많게는 3만5,000여 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합법 이주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독을 이탈한 난민의 수는 매년 3,000명에서 6,000명이었지만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합법 이주민 수는 그것의 2배에서 5배나 많았다”고 한다. 하나재단에 따르면 2018년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북한 이탈 주민 수는 3만2,476명이다. 분단 70년간 북에서 남으로 이주한 이들의 총수가 동서독의 한 해 합법 이주자보다 적다.
다만 동독의 군인, 경찰, 교사 등 당국이 중요하게 생각한 노동자는 서독 방문이 어려웠다. 분단에도 불구하고 민간 교류가 지속됐다는 점은 분명 남북의 분단 상황과 비교될 만한 지점이다. 동서독 사람들이 인접 국가인 체코에서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훗날 동독 체제가 흔들리고 인근 국가에 자유화 바람이 불자, 체코와 헝가리 등 인접 국가는 동독인의 서독 탈출 경로가 됐다.
베어톨트 씨도 분단 시절 서쪽 사람들과 교류했다. 친척이 바이에른 주에 거주했다. 베어톨트 씨는 가족 기념일에 서쪽을 방문했고, 친척들도 자주 동쪽으로 찾아왔다.
“서독에 있는 친척 한 분이 페인트업자였어요. 예나에 오실 때 꼭 하는 말씀이 ‘왜 건물이 다 회색이냐’는 거였어요. 그게 이상하다는 걸 당시는 몰랐죠. 재통일 후 예나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게 건물 벽 색깔과 지붕 색깔이에요. 지붕색이 붉어지고 노란 벽, 파란 벽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저도 서쪽에 다녀와 봤죠. 1986년 즈음이에요. 보통 동독 사람이 가난하니 서독을 방문하면 친척들이 주머니에 돈을 마구 넣어 줘요. 하지만 그걸 받을 순 없죠. 서독에서 들어오는 기차는 도중에 경찰이 한 번 세워서 승객 신분증 검사도 하고, 짐도 다 뒤졌거든요. 서독 돈을 갖고 들어오다 걸리면 큰일 나지요. 그러니 일정액 이하 물건만 받았지, 돈은 안 받았어요.
서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요? 슈퍼마켓에 요거트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가장 안 잊혀요. 웃음 집 샤워실에 수압,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걸 사용할 줄 몰라서 다섯 살 먹은 조카에게 물어본 기억도 나요. 그때가 1987년이네요.
당시 동독에는 샤워 시설이나 욕조가 없는 집이 많았어요. 우리는 시부모님 댁 지하실에 수도를 연결해서 욕조에 물을 받아 샤워했는데, 그나마 사정이 괜찮았지요. 샤워실이 없는 집은 예나 시내의 수영장 샤워실을 이용했으니까요.”(베어톨트)
“20, 30, 40, 50세 등 뒷자리가 ‘0’으로 끝나는 생일을 크게 기념하는 게 독일의 문화예요. 서독에 사는 친척 중 이 나이대 생일을 맞은 이가 있으면 동독에서도 비교적 쉽게 서쪽으로 갈 수 있었어요.
크리스티안이 1985년에 서독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인근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어요. 몸에서 샴푸 냄새가 나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전 그때 울었지 뭐예요.웃음” (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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