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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 문학과 정치, 메타픽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무거움과 가벼움의 변증법, 긍정과 초월의 철학
1984년, 밀란 쿤데라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체코 침공을 배경으로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 등 네 지식인의 사랑과 삶을 그린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에 관한 말로 시작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인데 그로 인해 많은 철학자들이 곤경에 빠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겪은 일이 그대로 반복되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면, 정녕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작가의 해석인즉, 인생이란 단 한 번뿐, 그래서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삶에는 아무런 무게도, 의미도 없다. 어느 독일 속담대로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einmal ist keinmal.” 언제 읽어도 아리송한 이 도입부에서 분명한 것은 영원성반복/회귀과 일회성의 모순이다.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그렇다고 이 대립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가치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한다!Es muss sein!”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사건은 단 한 번뿐인 까닭이다. 한 개인의 삶과 한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프라하의 유능한 외과 의사 토마시는 여성에게서 낭만적인 이상향을 추구하는 ‘서정적 바람둥이’가 아니라 여성의 다양성에 천착하는 ‘서사적 바람둥이’의 전형이다. 그는 이혼과 함께 아들시몽까지 자신의 삶에서 가뿐히 지워 낸 다음 ‘관능의 욕망’이 아니라 ‘정복의 욕망’ 혹은 견본 수집의 욕망에 따라 꾸준히 여자 사냥에 몰입한다. 이런 식으로 가벼움을 지향하는 토마시 앞에 한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테레자가 사는 도시에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병원의 과장이 좌골 신경통을 앓는 바람에 토마시가 대신 왕진을 갔다가, 돌아오는 열차 시각이 애매해 들렀던 술집에서 테레자를 만났고, 얼마 뒤 그녀가 사실상 무작정 프라하에 왔고, 그날 그와 동침을 하고 감기에 걸려 그의 침대를 차지했다. 방수포에 싸인 채 (어린 오이디푸스처럼!) 강을 떠내려온 아이. 테레자를 거두는 순간, 분석적이고 강건한 서사성이 감정적이고 섬약한 서정성에 자리를 내주고, 섹스는 하되 동침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이 와해된다. 깃털처럼 가볍던 돈 후안이 연민으로 고통받는 트리스탄으로, 가벼움이 무거운 굴레로 바뀌는 순간이다.
토마시의 삶개인사은 그의 조국의 삶역사과 평행선을 이룬다. 체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통감하고,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왕처럼 제 눈을 찌를 것을 촉구한 기사가 직접적인 문제가 된다. 공범자들의 은근한 조롱이 담긴 웃음에 철퇴를 날리듯, 그는 외과 과장으로 승진할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전락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자 반대파하필이면 그의 아들이다. 쪽에서 그의 선택을 옹호, 또 다른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만이 중요했다. 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 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es muss 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 굳이 사랑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한번 시작된 추락은 도시 외곽 병원의 허름한 의사로,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로, 급기야 시골의 트럭 운전수로 가속도의 법칙을 따른다. 한데 문제의 기사의 화두를 제공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테레자가 환기시킨 버려진 아기의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 역시 한때 버려진 아기였으니 말이다. 여기서 역사는 다시 개인사로 회귀한다. 쿤데라가 선보인 독특한 시간 사용법과 시점을 빌려 테레자의 경우를 보자.
테레자는 유년 시절부터 각종 이분법, 특히 ‘영혼과 육체’의 모순에 사로잡혀 있다. 어머니는 너의 몸뚱어리도 남들과 전혀 다를 바 없고, 때문에 벗은 몸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는 자기만의 고유성을 지키고자 하고, 영혼을 조롱하는 육체생리혈이나 배 속의 꾸르륵 소리에 대한 혐오감, 적어도 거부감을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가벼움 대신 무거움을 지향하는 그녀에게는 토마시 역시 우연이 아닌 필연의 존재이다. 즉, 다름 아닌 그가 내가 일하는 곳에 왔고 다름 아닌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았고 다른 것도 아닌 책을 갖고 있었고상승 욕구를 가진 그녀는 책을 숭배한다.……. 따라서 그녀는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에 나타난 그녀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사실도 (이 소설이 소련-러시아와 체코의 역사적 질곡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의미심장하다. 소설 속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모스크바의 기차역에서 처음 만난 날 한 남자가 기차에 치여 죽는다. 그리고 기나긴 시간이 흐른 다음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아귀가 너무 잘 맞는 이 ‘소설적인’ 구성이 테레자는 삶의 실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육체섹스와 영혼사랑을 별개로 여기며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다양한 정부를 두는, 심지어 다른 여자의 성기 냄새를 머리카락에 묻히고 오는 토마시를 참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토마시 아닌 다른 남자기술자와의 정사도 당연히 참을 수 없다. 사랑도, 삶도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것은 이런 차이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토마시와 테레자가 15년여의 세월을 함께한다는 점이다. 보헤미아의 한적한 시골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함께 프라하의 봄을 맞았으며 소련의 체코 침공 때 함께 스위스로 떠났다. 다시 체코로 돌아온 뒤에는 함께 ‘매장의 시기’를 보냈으며 단 한 번뿐인 삶이 종결되는 순간도 공유한다. 그 직전, 그들의 사랑과 삶은 무거움을 한아름 껴안은 가벼움에 다다른다.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해 미리 알고 난 다음3부 그들의 ‘슬픈 행복’을 읽는 기분이 묘하다. 연인 같은 부부가 농부들의 파티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그 정점이다.
작가는 테레자의 ‘이상한’ 행복과 슬픔에 대해 얘기한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은 ‘카레닌의 미소’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의 정조 자체가 그러하다. 카레닌은 토마시가 테레자와 결혼한 다음 친구의 집에서 데려온 잡종 개로, 얼굴이 못생겼다고 해서 암컷임에도 여자 이름카레니나 대신 남자 이름카레닌이 붙여진다. 이 서글픈 전원시의 마지막, 작가의 시선은 암 수술 이후에 안락사를 목전에 둔 늙은 개에게 멎어 있다. 그는 나무둥치에 앉아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류의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테레자를 떠올린다. 또한 토리노의 한 호텔 앞, 명징한 정신을 잃기 직전의 니체를 생각한다.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에서 출발한 소설은 이렇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껴안고 우는 니체를 애도하며 끝난다. 단 하나뿐인 삶, 단 하나뿐인 나, 단 하나뿐인 너, 단 하나뿐인 카레닌……. 어찌해도 이것은 가벼움이 아니라 무거움이다. 이 비극과 마주한 우리에겐 유아적인 자기 연민을 넘어선 뭔가가 필요하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긍정과 초월의 철학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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