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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취적인 여성들의 삶을 보고 배우다
누구에게나 일생 동안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있다. 기억 속에는 사람들, 사건, 풍경, 냄새 등이 함께 자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기억이 냄새라고 한다. 이이효재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 냄새의 기억은 특이하게도 캠퍼 오일의 향이다. 캠퍼 오일은 효재 자매들이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할 때마다 어머니가 목과 가슴에 발라주던 일종의 약이었다. 호주 선교사들로부터 배워 익힌 새로운 생활 방식이었다. 그 독특한 향은 그를 매혹시켰던 몇 가지 사건과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효재의 기억 속 장면들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여섯 살 무렵에 처음 보았던 비행기이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효재와 언니에게 당신이 손수 만드신 양복을 입혔다. 아주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은 자매들이 향한 곳은 진주 남강의 모래사장이었다. 까마득히 드넓은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날은 진주에 비행기라는 물체가 처음 등장한 날이었다.
1920년대 말에 유치원이라니. 1970년대까지도 대다수의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유치원 구경을 못해 보았다. 그만큼 그는 동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이 꿈도 꾸지 못할 만큼 특별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렇게 자라난 사람들은 대부분 가진 이들, 누리는 이들 편으로 갔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자리는 평생 사회적으로 억눌린 여성들 곁 낮은 자리였다.
이이효재의 아버지 이약신은 1929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진주 옥봉교회에서 목사로 일했다. 1924년생인 이이효재가 여섯 살 무렵 진주에 처음 등장한 작은 경비행기는 오늘날의 비행기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날 몰려든 군중들은 대부분하늘을 나는 기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연히 어린 효재에게도 비행기는 처음 듣는 낯선 말이었다. 굉음과 함께 날아와 모래사장에 내려앉던 이 서양 물건은 소녀에게 두려움이자 새로움이고 놀라움이었으며 감탄이었다.
이이효재의 어머니 이옥경은 일곱 남매의 맏이였다.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결혼 뒤에도 서울에서 공부하는 친정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주 서울을 왕래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어머니는 양재 기술을 배워 딸들에게 입힐 서양식 의복을 손수 만들어주곤 했다. 어머니 자신은 평생 서양 의복을 전혀 입지 않았지만, 딸들에게는 특별한 날에 꼭 서양식 옷을 입혔다.
또 하나, 어머니가 서울에서 배워와 자녀 교육으로 실천한 것이 표준어 사용이었다. 표준어를 익히고 스스로 사용하면서 어린 효재 자매에게 경상도 사투리와 욕을 쓰지 못하게 했다. 언젠가 딸들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때 표준어를 쓰는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산 이이효재의 어투에 경상도 억양이 강하게 남지 않은 이유다.
1899년생 이이효재의 어머니 이옥경은 일찍 개화하여 사업에 성공한 아버지 덕분에 서양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때마침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의신여학교 중등과에 입학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이효재의 외할아버지는 딸 둘을 이 학교에 보내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런 가족의 파격적인 전통은 이이효재에게도 이어져 그가 새로운 사고방식을 수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도록 했다.
1917년, 열여덟의 이옥경은 평안도 출신답게 키가 훤칠하게 크고 기골이 장대한 열아홉의 총각 교사 이약신과 결혼식을 올렸다. 마산 지역의 첫 교회였던 문창교회에서 호주 선교사의 오르간 연주에 맞춰 진행된 마산의 첫 서양식 결혼 예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인 한석진이 이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다.
이약신은 친구 따라 강남 온 경위로 마산에서 살게 되었다. 평북 정주의 고향 마을에 있던 오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약신은 진해 근처 웅천에서 오산학교에 유학 온 주기철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이약신은 졸업 후 주기철이 귀향하는 길에 동행하여 웅천에서 교사로 취직했다.
이이효재의 외할아버지 이상소는 상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답게 사람에게도 투자할 줄 알았다. 인물 됨됨이와 가능성만을 보고 고아인 이약신을 첫 사위로 선택한 다음, 그를 사업가로 키우려 일본에 유학을 보냈다. 둘째 사위는 가난한 빈농 가정 출신의 기독교인 청년을 선택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진학시켰다.
이약신은 일본 유학 2년 만에 장인 이상소가 마산 지역 3.1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는 바람에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전공인상과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 판단하고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국 그는 친구 주기철처럼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효재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1931년, 효재가 선교사들이 세운 배돈 유치원을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는 진주를 떠나 부산의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효재는 호주 선교사들이 설립한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진주에서의 철없이 행복했던 유아 시절에서 벗어나 서서히 식민지의 딸이라는 우울한 정체성을 획득해나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나님, 죄 많은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루 속히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 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받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를 원하나이다.”
매일 새벽 가족 예배에서 듣는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였다.
이 무렵 어린 효재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가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인 고모 이애시였다. 이약신의 부모는 조상들의 제사를 아무리 열심히 지내도 앞서 태어난 아들 셋이 일찍 죽는 것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했다. 개종 후 딸에게는 ‘사랑하며 베풀라’는 뜻의 애시愛施, 아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다’는 뜻의 약신約信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녀들의 이름에 그들은 굳건한 신앙심을 담았다.
다행히 부모의 간절한 바람대로 병약했던 삼대독자 이약신은 건강하게 자라났다.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인 그들은 딸 이애시가 열세 살이 되자 당나귀에 태워 평양의 정의여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서울의 이화학당처럼 미국 북감리교 여성 선교사들이 세운 정의여학교에서 이애시는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매티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1956 등 미국에서 온 여성 선교사들의 삶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찾아왔던 여성 선교사들은 19세기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던 여성 참정권 운동과 금주를 주장하는 절제 운동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관심이 높았던 그들은 남성과 똑같이 여성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하면서 남녀 차별적 관습인 축첩, 조혼, 강제적인 이혼이나 학대 등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통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되고 교육과 지식에서 소외되며 억압 속에서 노예적 삶을 살아온 한국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학교를 세워 여성들에게 근대적 교육 혜택을 받게 하였으며, 직업 교육을 시켜 여성들도 주체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길을 열었다. 함께 일하는 선교사 부부의 삶의 모습은 일부일처제 가정의 모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독신 여성 선교사들은 의사, 간호사, 교사 등 전문직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미국에서는 대학 교육을 받은 뒤 전문직에 종사하며, 많은 경우 결혼을 거부한 여성들을 신여성New Woman이라 불렀다. 신여성 선교사들로부터 학교 교육을 받은 우리나라 1세대 근대 여성들 중에서도 그들처럼 혼인을 하지 않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애시도 그들 중 하나였다.
평양 정의여학교에 입학하고 2년 뒤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이애시는 고향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오산학교에서 소학小學 과정의 소녀들을 가르쳤다. 4년 뒤, 이애시가 열아홉 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들이 살던 집성촌의 어른들은 이애시에게 혼인을 강력하게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권유를 과감하게 뿌리치고 중대 결정을 내렸다. 가산을 정리한 뒤, 열두 살의 동생 약신을 당시 집안의 어른이었던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이 운영하던 오산학교에 맡긴 뒤 자신은 서울의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어린 시절 효재는 고모의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자랑스러움을 느끼곤 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공주 영아원에서 일하던 고모가 서양인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사진 속의 고모는 서양 선교사들에 견주어 뒤지지 않을 만큼 키가 크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효재가 일신여학교에 다닐 무렵, 고모는 학교 옆 부산진의 호주 선교 본부에서 육아, 생활 개선 운동 등의 보건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효재는 가끔씩 학교를 마치고 난 뒤, 고모를 찾아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고모는 계란, 우유 등으로 신비하게 느껴질 만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어느 날, 효재는 고모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날은 언덕 위에 있던 집의 창문이 날아가고 집안으로 비가 들이칠 만큼 거센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고모는 공포에 떠는 어린 효재를 꼭 안더니 바람소리 빗소리를 잠재우겠다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가 되시니 내 환란에서 이기니……”
고모의 품 안에서 효재는 서서히 두려움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날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고모는 효재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의 표상으로 각인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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