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제3의 공간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
삶은 제3의 공간으로 열려야 한다
집을 제1의 공간이라 하고 직장을 제2의 공간이라고 하면 집과 직장과 상관없이 스스로 가고 싶고 정서적으로 끌어당기는 제3의 공간이 있는 게 좋다. 제3의 공간이 여러 곳이든 한곳이든 상관없다. 오로지 제1의 공간과 제2의 공간만 왕래하는 삶이라면 그 삶은 쉬이 피로하고 그 쌓인 피로를 해소하지 못한 채 척박하고 무미건조해지기 쉽지 않을까.
생계를 위해서든 자기실현을 위해서든 돈을 벌기 위한 공간과 잠을 자고 쉬기 위한 공간인 집만 왔다 갔다 하는 단선單線적인 인생살이라면 자칫 너무 단조롭고 탄력을 잃기 쉽다. 그리고 항상 쫓기듯 살게 되거나 밀려 살게 된다. 일에 치여 산다는 느낌으로 살게 된다. 생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압박을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할 위험성이 크다.
그 삶에 여유와 탄력이 생기려면 단지 제1, 2의 공간에서만 머물지 말고 제3의 공간으로 열려야 한다. 제1, 제2, 제3의 공간이란 단어와 개념은 미국의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가 1989년 그의 책 『The Great Good Place』에서 사용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자신만의 공간.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홀로 지내며 즐기는 공간이란 뜻은 아니다.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일 수도 있겠지만 제1, 제2의 공간에서 함께하는 사람들과는 유리된, 다른 부류의 사람을 만나는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제3의 공간에는 혼자인가 또는 누군가와 함께인가에 따라 두 부류의 공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혼자서 즐기는 고독의 공간이다.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공간이 도서관이나 산책길 같은 곳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에는 대부분 집 근처 작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거의 하루종일 머무는 때도 많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거나 쓰다 보면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다. 그 말은 도서관에서의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이고 은퇴 이후에 주저 없이 자신을 즐겁게 맡길 수 있는 공간이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것이다.
내가 은퇴 전 현업에 있을 때는 딱히 정해놓은 도서관은 없었지만 이동하면서 틈틈이, 고객 방문을 가서는 고객을 기다리는 동안, 주말에 사무실에 출근할 때는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책을 읽곤 했다. 책을 읽다가 가슴을 파고드는 문장이나 글귀를 만나게 되면 한동안 그 페이지에 머물면서 그 의미를 곱씹기도 하고 가슴 데이는 표현들과 문장들을 따로 메모를 해놓곤 했었다. 당시에는 고정된 제3의 공간이 아니라 이동하면서 틈새의 시간을 따라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는 장소가 나 홀로 즐기는 제3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메모를 해놓은 분량이 퇴직을 할 당시에는 제법 축적이 되어 책을 써도 되겠다는 동기를 지피는 불씨가 되었다.
어느 일요일인 봄날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경인 아라뱃길 트래킹을 하고 있었는데 길가에 텐트를 치고 그 옆에 편안한 간이의자에 몸을 푹 파묻힌 채 멍 때리고 있는 분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특이해서 텐트 안도 들여다보니 텐트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자세로 경치를 바라보면서 편안하게 계속 앉아 있었다. 왜 그럴까.
때로는 사람들은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지난 한 주 내내 직장생활에서는 스트레스와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그걸 몸과 마음에서 털어내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특히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오는 힘겨움이었다면 나 홀로 자신을 추스르고 회복하는 시간이 절실하다. 그분이 힘을 빼고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는 그곳이 바로 퀘렌시아Querencia가 아닌가 싶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퀘렌시아라고 부른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투우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평화와 회복의 장소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부류의 제3의 공간으로는 친구 또는 아는 지인들과 함께 정기적이든 비정기적이든 모이는 공간일 텐데 내게는 한동안 주말이면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끼리 모이는 당구장이 있었다. 매 주말마다 친구들끼리 모여 저녁내기 당구도 치고 저녁때 소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자리였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격식과 팽팽한 긴장 속의 인간관계에 둘러싸여 있다가 주말에는 제3의 공간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뭉쳐 있던 마음의 근육을 푸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 월요일을 여전히 뭉쳐 있는 마음의 뻐근함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가볍고 산뜻하게 맞이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제3의 공간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혼자 또는 친구와 낚시를 떠날 수도 있고 스포츠 동호회처럼 정해진 운동장이나 코트에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사람도 있다.
공간 자체로만 생각해본다면 카페 같은 공간이 가장 제3의 공간에 어울리는 공간일 것 같다. 카페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를 모두 겸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곳에서 친구 또는 지인을 만나거나 아니면 혼자서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도 있다.
언젠가 직장을 다니면서도 책을 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어느 분의 북 콘서트에 갔었다. 그분은 주중에는 직장 다니느라 책을 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고 주말이면 집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정리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카페에서 글을 써야 잘 써진다고 했다. 그분에게는 카페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대화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생산적인 공간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제3의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영유아기나 어린 시기에는 불가피하게 부모님의 보호를 받아야 하니 제1의 공간인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고 공간적으로 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성장하면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그 밖에 외부의 활동이 많아지면서 집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작아진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서 자신의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자아실현을 위해 취업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 무대가 제2의 공간인 직장이나 일터로 옮기게 된다.
거의 시간의 대부분을 제1의 공간과 제2의 공간을 왕복하면서 보내게 된다. 벽시계의 시계추가 단순히 좌우로 왔다 갔다 진자 운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자칫 사는 게 기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순해진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피로감이 올라갈 수밖에 없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를 이겨낼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 장소와 공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내가 주로 머무는 공간의 단선화된 궤적에서 오는 무력감과 답답함을 또 다른 공간을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 공간은 공간으로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
즉 제3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추스르고 자기를 회복시켜주는 공간, 자신을 저 먼 우주공간에서 바라보듯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공간, 힘과 기운을 받는 공간, 즐겁고 행복해지는 공간 같은 곳 말이다. 자신이 쓰는 시간의 한 모퉁이에서 제3의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고 이용하는 사람은 제1, 제2의 공간의 시간에도 긍정적인 순환의 피드백을 돌려줄 가능성이 높다. 마치 물속의 잠수부가 산소통의 산소가 거의 바닥났을 때 물 밖으로 나와 다시 산소를 공급받아야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제1, 제2의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자칫 흔들렸던 중심을 가눌 수 있도록 잡아준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때가 되면 제2의 공간에서 물러나야 하는데 평상시 제3의 공간을 여하히 갖고 있었는가와 그곳에서의 활성화 여부는 은퇴 이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활동이나 하고 싶어했던 일들을 제2의 공간에서의 일과 병행하면서 꾸준히 즐기면서 연마하고 축적해온 사람들은 은퇴 이후에도 삶의 탄력이 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더 들어도 그것들이 토대가 되고 지속이 되어 자신만의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하게 되고 제3의 공간에서의 활동이 더욱 확대되고 활성화된다.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한 어느 지인은 평소에 오페라와 클래식을 좋아해 꾸준히 공연도 즐겨 보고 그에 대한 공부와 취미 수준의 활동을 해왔는데 지금은 시니어들을 상대로 ‘쉬운 오페라 산책’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진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은퇴 이후에 ‘뒷방 노인네’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는 분야에서 과거의 억지스러웠던 분주함이 아니라 생기生氣를 동반하는 자신만의 박자대로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은퇴 시에 제3의 공간이 준비가 잘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반대로 제3의 공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다른 선택지 없이 오로지 제1의 공간인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머물게 된다면 노후의 삶은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간들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정말 ‘뒷방 노인네’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
제3의 공간의 요건
책 『프레임』의 저자인 최인철 교수의 동영상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최 교수도 강의 중간에 ‘제3의 공간을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얘기한다. 집과 회사를 제외한 마치 자신의 아지트 같은 장소를 말하는데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격식, 서열 없는 곳
2. 소박한 곳
3. 수다
4. 출입의 자유
5. 음식
조건들을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통의 흥미나 관심사로 모이고 대화하는 곳, 그리고 먹는 즐거움이 더해지면 금상첨화인 곳이다. 언뜻 카페 같은 곳이 떠오르기도 하고 친구들이 자주 모이는 단골 식당이 연상되기도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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