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감각론의 역사적 전개
철학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은 감각론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감각지각과 이성적 사유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냥 보아서 지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참”이었다하이데거. 이렇게 ‘보는 것이 곧 참’으로 여겨지는 곳에서는 감각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가 없다. 감각의 철학적 ‘주제화’는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순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각론의 효시는 파르메니데스로 볼 수 있다. 이 엘레아의 학자야말로 처음으로 감각세계의 실재성을 의심한 철학자, 즉 최초의 형이상학자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감각론
감각지각과 이성적 사유를 구별한 것은 파르메니데스지만, 철학사에서 ‘감각론’이라 불릴 만한 이론을 처음 제시한 이는 엠페도클레스였다. 그는 감각일반의 이론 및 개별 감각들의 이론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후에 등장할 다른 모든 이론의 한 준거가 된다.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이 세계는 물·불·공기·흙의 4원소로 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대상은 자기 바깥으로 네 원소의 미세한 입자를 발산하는바, 감각은 이 미세한 유출물aporroai이 오감의 미세한 통로poroi 속으로 들어오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 일반론에 이어 그는 개별 감각에 대한 설명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에 활동한 학자들의 저서는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감각론에 관하여 우리는 거의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의 보고에 의존한다. 테오프라스토스는 『감각론』De Sensibus에서 기존의 감각론을 ‘유사가 유사를 지각’한다는 이론유사설과 ‘반대가 반대를 지각’한다는 이론대조설의 두 유형으로 분류한다. 위에서 언급한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는 감각이 감관과 대상 사이의 유성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반면 뒤이어 등장한 헤라클레이토스나 아낙사고라스는 감각이 감관과 대상 사이의 대조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감각론』에서 테오프라스토스의 비판은 주로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에 집중된다. 그 둘을 스승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긴 모양이다. 그는 플라톤의 이론을 유사설로 분류했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은 제3의 부류로 간주했다. 한편 테오프라스토스와 그의 스승은 이 문제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감관과 대상은 감각이전에는 서로 반대되는 성질을 띠나, 감각의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나 감각이후에는 둘이 같은 성질을 띤다는 것이다. 앞의 두 학설을 종합한 셈이다. ‘동조설’이라 부를 수 있을 이 제3의 이론과 더불어 고대 감각론의 첫째 분류가 완성된다.
감각론의 대이론들
소크라테스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시작되는 아테네 철학의 전성기는 동시에 감각론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 시기에 데모크리토스의 발산설effluence theory, 플라톤의 방사설emission theory, 아리스토텔레스의 매체설medium theory이 등 고대 감각론의 대大이론들이 모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완성된 발산설·방사설·매체설의 트라이어드는 커다란 변화없이 헬레니즘 말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가장 오래된 이론은 역시 발산설이다. 데모크리토스에게 감각이란 대상에서 발산된 원자들이 감관으로 들어오는 현상이다. 대상의 표면에서는 필름처럼 얇은 원자막이 끝없이 발산된다. 이 막은 마치 밀랍에 봉인을 찍듯이 주위의 공기에 자기 모습을 각인한다. 이 공기인상을 에이돌라eidôla라고 부르는데, 시각이란 이 에이돌라가 동공 안으로 들어와 안방수眼房水에 반영되는 현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수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이때 눈은 능동적 작용을 통해 대상만큼 커다란 에이돌라를 동공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로 축소한다.
데모크리토스가 시각을 에이돌라가 눈으로 들어오는 현상으로 본다면, 플라톤은 시각을 눈에서 광선이 뻗어나가는 능동적 과정으로 설명한다. 시각이 이루어지려면 세종류의 빛이 있어야 한다. 눈이 방사하는 빛, 대상이 발산하는 빛, 공간에 산포된 빛이 그것이다. 시각은 눈에서 대상을 향해 빛이 조사助射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눈에서 나온 시각광선은 공간을 채운 바깥의 빛들과 결합한 후 대상이 발산하는 빛과 맞부딪힌다. 이렇게 눈에서 나간 빛이 대상이 발산한 빛과 접촉하여 알아낸 정보를 눈으로 되가져와 영혼에 전달하는 현상이 바로 시각이라는 것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의 발산설과 플라톤의 방사설을 모두 기각한다. 그는 감각이 대상과 감관 사이의 매체metaxy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감각이란 대상이 매체를 변화시키면 그 매체가 다시 감관을 변화시키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플라톤과는 달리 그는 감각을 감관이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수용적 과정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것을 데모크리토스처럼 질료원자를 수용하는 과정으로 보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매체를 통해 감관에 전달되는 것은 대상의 질료hyle가 아니라 그것의 형상eidos이다. 감관은 “대상을 질료 없이” 받아들인다고 한다.
우리 눈에는 다소 황당해 보이더라도 고대인들이 이런 학설을 세운 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가 있었으리라. 예를 들어 데모크리토스는 맑은 날에 신기루 현상을 보며 사물이 주위의 공기에 제 영상을 새긴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것이다. 또 플라톤의 눈에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동물의 안광眼光이 눈에서 시각광선이 뻗어나간다는 사실의 확실한 증거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석양이 해가 주위를 화려한 노을로 물들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레 시각대상이 주위의 투명한 매체의 색채를 변화시킨다는 발상을 하게 됐을 것이다.
한편 감각이 일어날 때 무언가가 밖으로 나가느냐 혹은 안으로 들어오느냐를 기준으로 이 고대의 이론들을 다시 유출설extramission theory과 유입설intromission theory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시각광선의 방사설은 유출설, 에이돌라의 발산설은 유입설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 구분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발산설에서도 에이돌라를 축소하는 눈의 능동적 작용을 강조하고, 방사설 역시 대상이 발산하는 빛의 역할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강조점만 다를 뿐 실은 두 이론 모두 감각을 감관과 대상의 협력synaugie으로 설명한다. 세 이론 중 순수 유입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매체설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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