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생명윤리법이 제정된 1994년 직전에,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려는 목적으로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산업화와 생명공학의 폭발적 발전, 공공 보건 개념과 사회보장 제도의 도입, 몸을 대상화하는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의 강력한 작동하에 몸과 관련된 쟁점들이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는 현대의 지형을 촘촘히 그려나가며 결국 생명의 현현顯現이자 주체인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고 해석하는 이 ‘사회’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책 소개)
1장
잘린 손을 둘러싼 공상 – 재판
잘린 손이라니,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
우리의 안락한 가정생활 속에는 절단되고 불타고 중독되고 마비되고 감전될 일들이 꾸준히 늘어난다. 정원 가꾸기와 목공은 산업재해를 부르주아화했다. 그 바람에 손의 절단은 집 안에서의 사고 통계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그런데 잘린 손은 굉장한 혼란의 씨앗이다. 이 불길한 물건의 존재를 인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잘린 손은 대체 무엇인가? 끔찍한 작은 시체? 아니면 아직 살아있는 어떤 것? 이 생뚱맞고 구역질나는 존재를 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게다가 이 잘린 손을 누가 훔쳐간다고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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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일을 하다가 사고가 나는 장면을 그려보자. 회전톱이 돌아가는데 실수로 톱날에 손이 끼어 피가 철철 흐르는….
기절했다가 깨어난 남자는 사고를 당했을 뿐이지 아직 장애인이 된 것이 아니다. 흔히 그러하듯 장애라는 단어를 ‘결정적인 상태’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몸에서 떨어져 나왔을지언정 그의 손은 아직 살아있다. 그는 과학과 외과술의 도움으로 손을 다시 제자리에 붙이는 것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런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장애인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상상 속의 남자는 실제로 장애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가 기절한 틈을 타, 복수의 기회를 엿보던 그의 원수가 피 흐르는 잘린 손을 아파트 지하실의 보일러 안에 던진다고 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은 이처럼 도둑질, 즉 형법상 “소유권에 대한 가벼운 죄”라고 부르는 행위와 유사하지만, 그 결과는 ‘사람에 대한 무거운 죄’의 하나인 중상해죄에 해당하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이 중죄를 이제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다.
첫 번째 해결책: 중상해로 판결
이것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이다. 피해자가 보기에 핵심은 원수의 손을 불구로 만들려 했던 범인의 의도다. 아직 몸에 붙어 있는 손을 망가뜨리든, 사고로 잘린 손을 소각로에 던지든, 그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 피해자는 이것이 프랑스 형법 309조에 의거하여 5년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는 “신체 훼손을 초래하는 폭력”이라고 믿는다.
형법 309조는 “인격에 대한 경범죄와 중범죄”를 다루는 10장에 있다. 살인을 처벌하는 것처럼 폭행 및 상해를 처벌하는 것 역시, 비록 법은 이 범죄를 신체가 아닌 인격에 대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상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인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로마법으로부터 법의 세계를 인격과 물건으로 나누는 전통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로마의 법률가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이 이분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일단 인격은 법적 무대에서 개인 ― 신체와 영혼 ― 을 식별하기 위한 이론적 가공물로서 나타났다고 말해두자. 하나의 사법체계 안에서 인격은, ‘권리주체’권리들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법인, 즉 개인들의 집합을 대표하는 권리주체회사, 조합나 재산을 대표하는 권리주체재단의 모습을 띨 수 있는 비물질적인 실재이다. 법적 무대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자연인은 법인과 똑같이 비물질적이다. 자연인은 신체와 동일시되는 인간을 대신하여 존재하기에, 신체의 검열을 가져온다.[인격이 신체를 대신하기 때문에 신체는 인격 뒤로 사라진다는 의미] 살인, 폭행, 상해의 억제는 인격에 제공되는 보호의 파급 효과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신체를 보호한다. 도둑맞은 손에 대한 가정은 특히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의 경우 손이 없어진 사람이 자신의 상태에 대한 책임을 서툰 일솜씨가 아니라 원수의 잔인함에 돌리는 것은 이해해줄 법하다. 하지만 잘린 손을 훔치는 것이 손을 자르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신체가 그 통합성 속에서, 또는 각각의 구성 요소의 수준에서 인격과 다른 방식으로 고려되는 이상, 우리는 신체를 물건으로 지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로마법에서 나온 법체계안에서는 인격이라는 범주와 물건이라는 범주 사이에 아무런 매개 범주가 없기 때문이다. 잘린 손은 명백하게 물건이다. 곧 썩기 시작하여 공해公害가 될 물건인 것이다. 이 물건은 소유권의 영역에 속한다. 이 권리의 보유자는 그것을 포기하거나예컨대 땅에 묻음으로써, 양도하거나예컨대 의료 기관에 기증함으로써, 아니면 다시 접합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접합이 불가능함이 드러났을 때에도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는 그것 대신 다른 물건을, 자신에게 생경한 물건을 취득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이 물건은 의수지만, 언젠가는 한때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던 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잘린 손을 훔치는 것이 손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려면, 손이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순간 손의 법적 지위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손이 잘렸든 몸에 붙어 있든, 인간은 자기 손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잘린 손의 정도는 절단과 같다. 이렇듯 우리가 인격 또는 권리주체라고 부르는 추상적 관념은 자기 몸의 소유자일 것이다. 몸은 ‘신체적’이라는 형용사가 온전히 적용되는 유일한 물건이다. 또한 너무나 귀중한 나머지 그것의 사용과 처분, 그리고 그것을 향한 공격으로부터의 보호가 엄격하게 정의되는 물건이다.
신체상의 공격에 대한 형법의 보호를 소유물의 일반적 보호체계 안에 끼워 넣는 이 이론은 형법의 편찬자들에게 분명히 생소한 것이었다. 생소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렇다고 그들이 이 이론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격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신체적 현실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들은 몸을 보지 않고도 몸을 보호하였다. 1810년, 그들은 몸과 인격을 구분해야 할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하였다.[1810년에 나폴레옹의 명으로, 1795년에 시행된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을 대신하는 형법이 제정되어 1994년까지 유지된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은 그게 무엇이든 묘지와 공해를 다루는 법적 체계에 복속된다고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식을 위한 인체의 요소들을 몸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이식용 손의 절취 사건이 공상과학이 아니라 공상-재판에 속하게 되면서, 비로소 개인에게 그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것이 신체적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이 분명해진다.
두 번째 해결책: 절도로 판결
몸과 분리된 손은, 이번에는 이론의 여지없이, 물건의 범주에 등록된다. 괴사와 부패는 곧 그것을 파묻거나 태워서 제거해야 할 유해물질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러다가 뼈만 남는 날이 오고, 그러면 손은 법의학 박물관의 진열장이나 해부학 강의실에 전시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상품으로 간주될 정도로 명백하게 물건인 이 물건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손은 몸에서 분리된 이래 어떤 지위 변동도 겪지 않았다. 즉 손이 잘리기 전에 이미 물건이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잘린 뒤에는 물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생리학적으로 말해서, 잘린 손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단계를 겪는다. 살아있는 상태에 있다가, 죽은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몸에서 분리된 손은 재접합이 불가능해지는 순간 죽는다. 그런데 이 생리학적인 변화로 인해 손의 법적 지위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다만 손이 몸에서 잘리는 순간, 즉 손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법적 지위의 변경이 일어나느냐이다. 그러므로 절단을 손이 물건임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순간으로 간주하자.
떨어져 나온 손발이라는 실체는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판례적 추인의 대상이었다. 1985년 6월 27일, 아비뇽의 구치소에 수감된 자넬 다우드Janel Daud는 새끼손가락 위쪽 마디를 스스로 절단했다. 그 손가락을 법무장관에서 우편으로 보내 자신의 처지에 관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다. 아비뇽 병원은 그를 치료한 후, 보존액을 채운 유리병에 손가락을 담아 돌려주었다. 교정당국이 유리병과 내용물을 그에게서 압수하자 다우드는 아비뇽 지방법원 가처분 전담판사에게 손가락의 반환을 요구했다.
다우드의 변호사는 수감자에게서 압수했다가 출소할 때 되돌려주는 물건들에 손가락을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권 외에도 사생활 보호법에 호소하였다. 요컨대 그는 잘린 손가락 속에 의뢰인의 인격이 온전하게 깃들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급속 심리 판사는 잘린 손가락이 병이나 보존액과 마찬가지로 물건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압수가능물품과 관련된 규칙들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절단된 손가락과 잘린 손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압수의 대상이며 또한 프랑스 형법 379조 절도죄를 구성하는 ‘부정한 절취’의 대상이다.
그러면 우리의 공상-재판에서는 누가 잘린 손의 소유자인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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