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바람직한 한일 관계는 가능한가?
〈한일 관계사〉 요약으로 보기
한일 관계는 고대로부터 활발했다.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4세기쯤부터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대량으로 유입했다. 7세기에 한반도 3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망해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까지, 100만 명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원전 4세기에 일본 선주민先住民의 인구가 약 7만 명으로 추정되므로 고대 일본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들보다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 DNA는 가깝다고 한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수용해 발전해 갔다. 그런데 일본과 한반도, 중국 대륙과의 관계가 920년경부터 1400년대 초까지 단절되었다. 그 사이에 일본은 무사 사회가 되었고, 한반도에는 문인을 중심으로 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러다가 1404년조선 태종 4년, 약 500년 만에 수교조선과 일본 무로막치 막부 사이에 국교 성립, 양국 선린외교 시작를 했다. 이후 조일朝日 관계는 양호했으나, 일본은 국내에서 군웅할거群雄割據 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다음의 공격 목표를 조선으로 삼아 20만 이상의 대군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것이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략으로, 끔찍한 침략이 7년간 이어졌다. 이 사건이야말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악화시킨 큰 요인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인의 반일反日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약탈당한 조선의 문물이 일본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그 후의 약 270년간의, 일본에 조선의 국교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정권이 들어서서 조일 관계가 회복되었다. 약 270년간 조일 관계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평화적이었고 양국은 우호적인 선린善隣 관계를 구축했다.
그런데 서양 세력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에 조일 관계가 격변했다. 1868년 도쿠가와 정권을 타도하고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明治 정권은 한반도 침략을 국책國責으로 삼았다. 그들은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 하에 두는 것으로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고 한반도를 일본의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가 남하南下하여 한반도와 일본을 장악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 결과 1910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했다.
이후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청산되지 않은 그 기간의 문제로 인해 한일 관계는 우호와 대립을 되풀이해 왔다.
1965년 한일 협정과 국교 정상화
1965년 한국과 일본은 일제강점기를 청산하여 한일 간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한일기본조약과 4가지 한일 협정을 체결했다. 현재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이들 중한일 청구권 협정이다.
이 협정으로 최종적으로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경제 협력 명목으로 지급하면서, 이것으로 양국의 국가와 국민의 청구권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내에서도 국민의 청구권이 해결되었다는 뜻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91년부터 일본 국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소멸된 것은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는 외교 보호권’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배상 문제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런 일본 정부의 입장 표명으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65년 시점에서는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강제동원의 기록 등 자료가 부족했으나, 국교 정상화 이후 많은 자료가 일본에서 발견되면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소송하는 데 힘을 보태주었다. 그들 중 한국인 피해자들 일부가 전범 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재판을 제기하여 대법원에서 판결 없이 화해가 이루어졌다. 일본 대법원이 화해라는 방법으로 한국인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것이다. 관부官府 재판이라 불린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재판도 1심에서는 피해자가 승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법원은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으나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이 있으므로 피해자들은 구제받을 수 없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00년대 들어서 일본에서는 한국인 피해자들의 패소가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 일조한 것이 일본의 국내법 제114호이다. 이 법은 일본의 국내에서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킨 법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지 못하자, 일본이 국내법을 만들어 소멸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인 피해자들은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고,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에서 한국인 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하기에 이르렀다. 판결은 ‘일제강점기는 불법이므로 이로 인한 배상으로 해당 기업은 위자료를 피해자들에 지급해라’라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에 일본 기업 측이 불복했지만, 2018년 10월 확정 판결로 일본 기업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원인
이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국이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을 어겨, 국제법 위반 상태가 되었다.’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8년 11월,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의 질의응답 중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상과 일본 정부 측 위원들은 야당의 예리한 질문 공세에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배상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후 말을 바꿔 ‘한국은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을 어겼다.’고 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라고 줄곧 한국 측에 요구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현재 소멸되었다고 스스로 말한 국가의 ‘외교 보호권’을 부당하게 발동하는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고, 그에 비해 한국 정부는 ‘이번 판결은 개인이 개인기업에 소송을 제기한 민사 사건이므로 국가는 재판 결과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며 3권 분립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외교 보호권을 부당하게 계속 발동하자, 2019년 6월 한국 정부는 일본 측에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기금을 조성하여 한국인 피해자들을 구제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한국을 무시하는 정책으로 돌입했다. 지난 6월말에 개최된 G20 정상회담 때도 한국 측은 한일 정상회담을 요청했으나 일본측은 다시 거부했다. 이후 일본 측은 외교적 해법을 계속 거부하면서 ‘한국이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는 갑자기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 3품목에 대해 한국에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하더니 7월 4일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수출 규제의 이유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강제징용자 판결 문제 등으로 한국과의 신뢰 관계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라면서 수출 규제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임을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고,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도 보복 조치라고 자신의 트위터에 남겼다. 일본이 강제징용자 판결 문제를 풀기 위해 한국에 경제적 보복을 가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내외의 여론이 악화되자 아베 정권은 말 바꾸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의 수출 관리에 문제가 있고, 일부 품목이 북한으로 유출된 가능성이 있어서 수출 규제로 들어갔다는 가짜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일본의 일부 소재가 한국을 거쳐 북한으로 유입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한국 측은 오히려 일본에서 북한으로 밀수출된 품목을 다수 폭로해 일본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후 일본 측은 다시 말을 바꾸고 한국의 수출 관리 시스템이 미흡하여 관리되지 않는 많은 품목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하면서 8월 2일 실행에 옮겼다.
이제 일본의 약 1,200 품목이 한국으로 수출될 때 심사가 강화된다. 이처럼 일본은 한국에 대해 부당한 이유를 들어 경제 전쟁을 감행했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는 가능한가?
현재의 한일 관계는 경제적 보복으로 시작된 부당한 수출 규제를 일본 측이 풀어줘야 다시 정상궤도에 올라갈 수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반발한 한국 국민들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전개에 그 규모가 연일 확대되어 가고 있다. 8월 10일 현재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겠다는 한국인은 80%를 넘었으며,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국내 여행으로 바꾼 사례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지자체들은 국내 여행에서의 혜택을 늘리고 있어 일본 여행 대신 한국 국내 여행을 즐기는 가족들이 급증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인들이 많이 찾았던 일본의 도시들은 일본 정부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현재 실질적인 경제적 피해도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 일본 측에서 표면화되고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일본에서 수입해 온 주요 소재들의 국산화를 추진 중이고 몇 달 안에 일부 품목의 실용화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은 무모한 경제 보복으로 자국의 산업에 상처를 입힐 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는 일본이 독일처럼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해야만 비로소 성립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 많은 문제들이 수면 위에 떠올랐는데, 앞으로는 한일 관계의 문제들을 피해자의 인권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이 점이 한일 관계 개선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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