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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40년 전 우리는 여자대학 신입생 때 기숙사에서 처음 만났다. 그런대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나 내가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온 이후 서로 연락할 일이 없어졌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졸업식 날 강당 앞에서 마주쳐 함께 사진을 찍은 걸로 그녀와의 인연은 끝나는가 싶었다.
대학원에 진학했던 나는 석사과정을 끝으로 공부를 포기했다. 그런 다음 어렵게 취직한 곳이 광고 회사 출판부였다. 그곳에서 다시 그녀와 마주쳤다. 졸업하자마자 입사했던 그녀는 직장 상급자로서 나를 맞이했다.
내 결혼식에도 참석했었다. 회사의 관례에 따라 여성 기혼자에게 주어지는 계약직 전환 서류를 내 책상 위에 갖다 놓은 것도 그녀였다. 회사 안에서 나에게 꽤 깐깐했지만 이따금은 퇴근 후에 생맥주를 사 주며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경력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사무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묻곤 했다.
나는 그녀가 대학생 때 알던 것 이상으로 자기 욕망에 적극적이고 사회생활에도 수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마 30년 전쯤일 것이다.
정작 회사를 먼저 그만둔 것은 그녀였다. 갑자기 사표를 쓰고 사라졌을 때 그녀와 회사 간부를 둘러싸고 몇 가지 소문이 돌았다.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소문의 진위에 관계없이 그녀의 사생활에 연루되는 기분이라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몇 년 뒤에 나 역시 직장을 옮겼고 그렇게 서로 연락할 길이 끊어졌다. 그러는 동안 다시 10년이 흘러 있었다.
그녀가 뒤늦게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방송을 듣고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인터뷰하는 작가의 목소리와 말투가 어딘지 귀에 익어서 주의 깊게 들었더니 이내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독과 가난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받은 모욕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주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냐는 진행자의 질문에는, 소설이란 자기 인생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벽돌로 다른 새로운 집을 짓는 일이라는 외국 작가의 말을 인용한 뒤 그러나 옛 친구들이 자기 소설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고 농담했다.
일부러 연락을 해볼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느 카페의 개업식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우리 둘 다 카페 주인과 아는 사이였다. 나는 일 때문에 알게 되었고 그녀는 문화센터를 같이 다녔다고 했다.
카페 주인의 친화력과 장사 수완 덕분에 우리는 한동안 그 카페 단골들과 그룹을 지어 함께 어울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또 분주한 시기였는데도 웬일인지 나는 시시한 연애담을 공유하고 극장이나 술집을 순례하는 그 그룹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것이 우리의 또 다른 10년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세월이 빨리 흘렀다. 주인의 야심 찬 귀농으로 단골 카페가 문을 닫고 모임이 시들해진 뒤까지도 그녀와는 계절에 한 번 정도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1년 반이 넘도록 전화 한 통 없이 무심히 지낸 적이 있는가 하면 오타루나 바간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낮부터 맥주잔을 비우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여덟 권의 책을 냈고 그다지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사보에 글을 싣거나 지역 도서관 강연과 생활 수필 심사에 얼굴을 비치는 중견작가가 되었다. 동시에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끊어진 건 아니지만 밀착될 일도 없는, 간격이 불규칙한 점선 같은 관계였다.
그녀를 절친하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래 알아왔던 만큼 서로의 세목에 익숙해서 초보적인 오해 같은 게 없었고, 긴 세월 지켜본 바에 따라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너그럽긴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사람을 대할 때 미묘한 권력관계를 만드는 습성이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의 자장磁場을 만들어내고 우월감과 피해 의식을 번갈아 써가며 그것을 정당화했다. 거기에는 증인이 필요했다. 결국 나로 하여금 위성처럼 그녀의 궤도를 따라 돌며 그녀라는 일방적이고 변덕스러운 광원을 반사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소심함과 자기 합리화의 조합인 어정쩡한 온건함 뒤에 숨어 그녀의 그런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곤 했다. 열정은 단호한 구석이 있어서 금세 꺾이지만 친근함은 어느 정도 안이한 감정이라서 사소한 기억의 공유만으로도 쉽게 환기되었다. 그리고 내가 동의하지 않는 채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유연함에 대한 자기만족이 어느 정도 그것을 도왔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속도를 떨어뜨릴 때의 반동으로 나는 흔들렸으며 그때마다 내가 회피해왔던 것들이 그녀에게로 가서 어떤 파국을 맞이하는지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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