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기계번역 시대, 외국어를 배워야 할까?
“미래 글로벌 사회에서는 영어가 더 중요해질 테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아들이 ‘컴퓨터가 알아서 번역해주는 세상에서 뭐 하러 고생스럽게 영어를 배워요?’라고 되묻더군요.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중학생 학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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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번역의 정확도가 높아지면서 외국어의 장벽이 낮아졌습니다. 동시에 교육현장에는 새로운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자동 기계번역 시대에도 외국어를 배워야 하나?’ ‘배울 필요가 있다면 어째서일까?’ ‘인공지능 시대 외국어 학습법이 달라져야 하나, 아니면 배움엔 황도가 없다는 말처럼 전통적 방법이 최선일까?
먼저 빠르게 발전하는 자동 기계번역의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기계번역은 네이버의 번역 앱인 ‘파파고’나 구글 번역이 대표적인데, 번역 앱에 문장을 입력하거나 말을 하면 원하는 언어로 번역해주는 서비스입니다. 구글의 한국어-영어 번역은 다른 언어 짝에 비해 데이터가 부족해 정확도가 낮았는데 이 역시 최근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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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인공지능과 번역의 미래’ 포럼이 열렸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최신 기계번역 기술을 소개했는데, 참석한 통번역가 250여 명의 한숨이 포럼이 진행된 4시간 내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동번역 기술이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이젠 우리 직업의 미래가 캄캄하다”는 탄식이었지요. 2017년 3월 언론은 ‘이세돌-알파고’ 대국 1년을 맞아 한국 사회에 일어난 변화를 점검했는데요, 지난 20년간 줄곧 국내 1위를 지켰던 통번역대학원 준비학원이 문을 닫았고, 통번역대학원 지원자가 크게 줄었다는 기사도 실렸습니다.
기계번역이 완벽하지 않아도, ‘쓸 만한 수준이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통번역가의 직업환경은 변합니다. 정재승 교수는 “인공지능 번역이 93%의 정확도만 보인다고 해도 번역에 드는 비용이 거의 없고 속도가 무척 빠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번역의 질이 특별히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인공지능에 번역을 맡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동번역 기술은 ‘외국어 무섬증’을 앓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고 반가운 소식이지만, 통번역가들에겐 재앙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힘들여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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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공지능 자동번역 시대라고 해서 외국어 학습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어를 학습하는 방법과 평가하는 방법, 그리고 외국어 학습의 목적이 달라질 뿐입니다. 평소에 쓸 일이 거의 없는 어려운 단어를 외우고 이를 평가하는 시험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스마트폰으로 온갖 사전을 즉시 이용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편리한 기계번역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판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 능력을 두뇌에 내장하고 있느냐, 컴퓨터와 번역 앱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느냐는 중대한 실력 차이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글로벌화로 외국어의 활용 범위와 쓸모는 갈수록 늘어나게 됩니다. 물론 자동번역 앱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늘 도구를 꺼내 의존하면서 그 말의 핵심 정보만을 전달받는 경우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생생하게 느끼는 대화는 완전히 다릅니다.
물론 외국어 학습방법은 바뀝니다. 미래엔 스마트폰이 더 소형화하고 편리한 착용형웨어러블 기기로 바뀌거나 아예 몸속에 전자칩 형태로 이식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외국어 문장을 만나면 단어 뜻만 찾는 게 아니라 번역 앱을 통해 즉시 모국어로 바뀐 문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 활용할 가능성이 낮은 어려운 단어나 구문을 익힐 필요는 없지만, 해당 언어의 구조와 일상적 활용을 배우는 것은 변하지 않을 학습방법입니다. 어려운 외국어 단어나 낯선 구문은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만, 도구를 믿고 외국어를 통째로 기계에 맡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도구가 편리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여러 사례로 알 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전자계산기와 엑셀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세상에서 계산 능력은 필요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복잡한 수식 계산과 통계처리는 계산기와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지만 셈할 줄 모르면 정상적 일상생활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주산과 암산을 배우고 19단을 외우면 수학을 더 잘하게 될까요? 만약에 그런 결과가 입증된다면 지금도 주산학원이 성업 중일 텐데, 현실은 반대입니다. 수능에서 수학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빠른 연산 능력이 해결을 좌우하는 문제는 출제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도 연산 능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학은 기본적으로 추리하는 법,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수학적 사고와 문제풀이를 하려면 기본적 연산 능력과 문해력이 요구되지만 이는 목적을 위한 도구일 따름입니다.
지난 시절에 글씨를 똑바로 아름답게 쓰는 기술은 손쉽게 직업을 보장받는 중요한 능력이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문자생활을 하는 세상에서 손글씨의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해서 누구나 깔끔하게 문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손글씨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캘리그래피와 같은 새로운 영역이 출현합니다. 외국어 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영어·중국어 학습을 포기하고 기계번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과 기본적 어학 실력을 갖추고 필요할 때 적절하게 도구를 활용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또한 미래는 지식정보사회이기 때문에 누가 더 고급 정보와 지식에 빠르게 접근하고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인터넷 정보 대부분은 영어이고 글로벌 지식사회의 공용어도 영어입니다. 과거에는 영어를 배운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영어 실력을 업무와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국경과 언어권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글로벌 세상이 되어가고, 지식정보화에 따라 일상과 직무에서 영어를 쓸 상황은 늘어나게 됩니다. 무역업과 같이 국제관계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번역 앱과 번역가가 있어도 해당 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국가별로 지역전문가를 육성하는 것이 사례입니다.
둘째, 외국어는 다른 문화와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안다는 것은, 날 때부터 주어진 환경이 아닌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방식의 사고구조와 문화를 알게 되고, 더 다양한 생각과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인식과 경험을 확대하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베스트셀러 《라틴어 수업》은 로마법을 전공한 한동일 교수가 대학에서 한 라틴어 강의를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라틴어는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중세의 문헌이나 종교를 연구하는 소수 전문가를 위한 학술어입니다. 처음 몇십 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던 한 교수의 강의는 신촌 대학가에 차츰 알려지기 시작해 청강생까지 몰려드는 최고의 인기 강의가 되었습니다. 한 교수는 강의에서 라틴어의 문법과 단어를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는 고대 로마의 철학과 역사, 문화와 지혜가 담겨 있기에 많은 학생들의 호응을 얻는 것입니다. 한 교수는 결국 서구문명의 지적 전통을 돌아보는 라틴어 강의를 통해 자신과 인생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제 라틴어는 실생활에서 무용하지만, 라틴어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갑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이나 일본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4층이 없거나 F로 표시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에서는 숫자 ‘8’에 대한 선호가 커서, 8이 연속으로 들어간 전화번호나 차량 번호판이 거액에 거래됩니다. 이들 나라의 언어에서 4와 8의 발음이 각각 ‘죽음死’과 ‘부富’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알게 되면 해당 언어를 쓰는 문화권을 이해하게 돼 인간 행동의 배경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공부에 대하여Of Studies〉라는 글 첫머리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꾸밈을 위해, 그리고 능력을 키우기 위해 배운다Studies serve for delight, for ornament, and for ability”고 말합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단지 실용적 목적으로만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어를 통해 우리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세계를 넓힐 수 있습니다.
셋째, 기계번역 시대에도 번역의 결과물을 판단하는 외국어 실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도구가 발달하더라도 영어와 한국어의 미묘한 어감 차이나 말하는 사람의 의도, 말하는 상황의 분위기까지 기계가 번역해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글 번역에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입력하면 ‘Piribu is a man’이라고 번역됩니다. 중의적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될 때 기계번역은 여러 개의 번역을 제시하는데, 최종적으로 어떤 번역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Piribu is a man’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차이는 미래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계번역에 의존하는 관행이 일상화되면, 기계가 번역한 결과물을 단순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외국어와 한국어에 이해가 깊은 사람은 기계번역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그 결과를 판별해 자신이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편리한 자동번역 도구 사용이 보편화되면 번역 결과의 미묘한 차이를 식별해낼 수 있는 외국어 실력이 희소해지고, 따라서 소중해지게 됩니다. 기계번역의 결과를 매번 의심하고 검증할 필요는 없지만, 도구를 잘 활용하려면 도구를 사용한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문장력과 비슷합니다. 의무교육을 마친 사람 누구나 기본적인 읽기, 쓰기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문장력이 불필요해지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문장력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세상이지만, 똑같은 문장에서 글쓴 사람이 미묘하게 표현한 의도와 기법을 읽어내는 능력, 나아가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의 가치는 결코 덜해지지 않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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