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어긋나도칸나꽃 피어나고흰곰들은 부서지는 빙판을 걸어가요내가 새매라고, 예티라고, 부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저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그들의 형제인 나를왜 내게는소리 없이 소낙비를 뚫고 가는 날개가 없을까요어떻게 나는인간의 육신과 마음을 얻었을까요구겨진 종이 같은재를 내뿜는 거울 같은늘 약속은 어긋나고 예언은 빗나갔어요맨발의 지팡이들은 오래전에 추방되었어요잠들기 전에내 무덤을 환하게 여는 눈빛을 주세요무덤에 절을 할 거예요돌에 물을 뿌릴 거예요조금씩 달라지는 별들의 표정을 지켜볼 거예요‘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이 책은 읽는 자의 운명을 알려준다 갓난아기의 피로 씌어졌으나 말이 말을 뚫고 혼이 혼을 뚫고 간 흔적만 흐린 얼룩으로 남아 있다모든 그림자에게 빛을, 빛에게는 그림자를 던져주지만 일곱개의 촛불을 켠 금요일 밤 장님이 된 자만 읽을 수 있다 읽는 동안 운명이 바뀌고 마침내 빛이 없는 찬란을 만나 또다시 제 눈을 찔러야 한다재 속에서 태어난 물고기 같은 책피고 지는 나뭇잎, 연인의 젖은 입술, 부서지는 얼음 조각에도 숨어 있는 이 책은 오늘 내 눈물 속에서 울고 있다 웃고 있다 불타고 있다한때는 ‘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당신처럼존재하지 않는, 사라지지도 않는예禮한밤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손톱을 깎고떨어진 머리카락을 화장지에 곱게 싸 불사른다엉킨 숨을 풀며씻은 발을 다시 씻고손바닥을 펼쳐손금들이 어디로 가고 있나, 살펴본다아직은 부름이 없구나더 기다려야겠구나, 고립을 신처럼 모시면서침묵도 아껴야겠구나흰 그릇을 머리맡에 올려둔다찌륵 찌르륵 물이 우는 소리 들리면문을 조금 열어두고 흩어진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불을 끄고 앉아나는 나를 망자처럼 바라본다초록이 오시는 동안은(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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