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인류세'라는 균열
지구 역사의 균열
먼저 과학부터 살펴보자. 지질 연대표는 중대한 지질학적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지구의 역사를 절節, Age, 세世, Epoch, 기紀, Period, 대代, Eon로 나눈다. 국제층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는 지질연대에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를 공식 도입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암석의 지층을 전문 연구하는 지질학자인 층서학자는 보수적인 전문 분야 중에서도 가장 전통에 묶인 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은 가장 급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지구과학자들이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격한 증가와 그로 인해 지구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연쇄적인 영향 때문이다. 해양 산성화, 생물종의 멸종, 질소순환의 혼란 등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힘들이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산업혁명 초기 대량으로 석탄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간이 기후 시스템을 교란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그 이후 150년 동안 점진적으로 증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증했다. 현재 다양한 지표들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인간은 지구 시스템에 급격하고 명백한 혼란을 야기했다. 지구과학자 윌 스테픈Will Steffen은 전후 시기야말로 “변화의 속도와 파급력에 있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시기로” 단연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다른 지구 시스템 과학자들은 다소 다르게 표현한다. “지난 60년에 걸쳐 인간과 자연세계의 관계에 인류 역사상 가장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 세계적인 경제 성장, 자원 이용, 쓰레기 양과 관련한 장기적인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불렸고, 이 같은 추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를 근거로 과학자들은 새로운 지질시대가 처음 제시했던 18세기 말이 아니라 1945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피력한다. 엄밀하게 층서학적 견지새로운 시대를 공식화하는 결정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으로부터 100만 년 후 암석기록의 가장 뚜렷한 지표는 1945년 원자폭탄 폭발의 결과로 지표면 전반에 급작스럽게 퇴적된 방사성 핵종일 것이다. 이른바 ‘밤 스파이크’bomb spike로 알려진 현상이다. 핵 시대가 그 자체로 지구 시스템의 기능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945년에 퇴적된 방사성 핵종을 함유한 지층은 미국이 전 세계적 패권을 장악하게 된 시대와 전후 수십 년 동안 이뤄진 놀랄 만한 물질적 확대, 즉 자본주의가 대대적으로 성공한 시기의 서막을 알리는 전조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공이 지구 시스템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지속적 증가를 보여주는 킬링곡선Keeling Curve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결과를 제시한다. 지구과학자 제임스 시빗스키James Syvitski는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아무 편견도 담겨 있지 않은 양적인 측정에 따르면, 인간은 빙하기가 우리 지구에 영향을 미쳤던 정도에 비견될 만큼 방대한 규모로 지표면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빙하기보다 훨씬 짧은 기간 내에 이뤄진 일이었다.” 지구 시스템의 경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화되었다.
이런 변화들이 어째서 실질적으로 영속적인지 이해하기 위해 우선 지구온난화 문제를 단독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지구 시스템의 탄소축적량에 변화를 가져왔다. 탄소는 기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필수 원소다. 수백만 년 동안 땅 속 깊은 곳에 화석 형태로 갇혀 있던 거대한 탄소 저장고가 채굴되어 연소되며 지구 시스템에 탄소가 방출되었다. 이렇게 방출된 탄소는 대기와 대양, 생물권을 이동한다. 아마도 수십만 년이 지나야 탄소의 상당량이 다시 땅속에 고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한두 세기에 걸쳐 대기에 방출된 이산화탄소는 끊임없는 영향을 미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산화탄소는 자연 현상을 통해서도 대기권으로 방출되기 때문에 해양은 이미 인간이 대규모로 화석연료를 이용하기 시작했던 때보다 3분의 1 이상 더 산성화되었다. 수천 년에 걸친 기간 동안 높아진 산성도는 심해 해저에 탄산칼슘이 퇴적되는 자연 과정에 교란을 일으킨다. 그린란드 빙상 같은 거대한 빙하의 불안정한 상태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수만 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향후 몇 세기에 걸쳐 해수면 상승을 초래할 얼음 없는 지구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지구 시스템의 구조는 혹 가능하다고 해도 원래대로 복원하는 데 수천 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네이처〉에 기고한 22명의 지구과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앞으로 몇 십 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전체 인류 문명의 역사보다 더 오래 이어질, 파국으로 치달을 광범위한 기후변화를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화할 수 있는 한시적인 기회다.”
인류가 사라지거나 혹은 더 이상 지구 시스템에 개입하지 못할 정도로 입지가 줄어들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행성의 변화를 주도할 행성 차원의 거대한 과정들 ― 궤도 촉성, 판구조론, 화산활동, 자연 진화 등 ― 이 인간이 남긴 영향을 압도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홀로세, 즉 온화한 기후가 장기간 지속되어 문명이 번성할 수 있었던 지난 1만 년의 시대와 유사한 상태에 접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구는 이미 다른 궤도로 선회했다. 일부 과학자는 최근 수십 년간 인간이 야기한 변화가 대단히 엄청나고 오래 지속될 것이라서 우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세’가 아니라 다세포 생물의 출현이 지구 역사에 초래한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 ‘대’, 바로 인류대Anthropozoic era에 진입했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1945년은 지구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질학적 진화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힘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자발적 존재인 인간이 주체가 된 새로운 지질학적 힘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전환점이다. 우리는 인간이 주체로서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에 익숙하며, 초기 인류가 출현해 문자가 발명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선사시대’라 칭한다. 이제 우리는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긍해야 한다. 즉 인간이 지구의 심원한 역사의 경로를 변화시키는 주체, 더 정확히 말하면 지구의 아득한 미래, 소위 ‘탈 역사’post-history를 야기할 사건의 주체가 아닌지 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인류세가 인류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지만, 최근의 수십 년은 지구의 생물지리학적 역사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전환기이기도 하다. 지구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얽혀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운명이 다른 하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겨우 몇 십 년 만에 우리는 지구 전체의 역사 ― 지구의 형성부터 종국에는 태양이 폭발하여 결국에는 일어나게 될 지구 멸망에 이르는 역사 ― 가 돌이킬 수 없게 둘로 나뉘는 것을 목도했다. 오로지 맹목적인 자연의 힘에 의해서만 지구의 역사가 결정되었던 45억 년, 그리고 의식적인 인간의 힘이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그 힘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그 후의 50억 년으로 역사가 갈리게 될 것이다. 만일 인류가 사라진다고 해도 지구 시스템을 주도하는 거대한 힘들은 지속될 것이고, 인류가 자연경관에 남긴 더욱 뚜렷한 영향들도 종국에는 지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남긴 영향력의 흔적 ― 인류의 흥망성쇠와 영속적인 유산 ― 은 무엇보다 암석기록을 통해 지층의 교란이 있었음을 보여줄 것이다. 즉 인류의 역사는 100억 년 동안 이어질 수 있는 지구 역사의 중간 어디쯤에서 수십 년 간에 걸쳐 쌓인 기이한 지층으로 뚜렷하게 남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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