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고 동물
숀 탠Shaun Tan
몽상적인 그림 세계를 지닌 작가로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주제들을 다루며,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애니메이션 단편 영화 <잃어버린 것>으로 오스카상을 받았고, 2003년에는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로 독일아동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앵무새
앵무새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앵무새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듭 묻는다. 네 앵무새는 말할 수 있어? 그건 사람들이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삶은 단어들로 규정되고 정리되고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언어를 다른 존재로부터 듣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것을 언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세련된 속임수에 불과할까? 어쩌면 무엇에 해당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 우스꽝스러운 작은 세계에서 우리가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는 느낌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단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크고 어두운 우주 속을 선회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그러니까 앵무새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앵무새가 말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거다.
앵무새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늘 앵무새가 어떤 재주를 부릴 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은 재주 부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침 앵무새들도 재주를 부린다. 그리고 정확히 우리 인간들처럼 발로 거의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우리는 입으로 호두를 깨뜨릴 수 없지만 앵무새의 부리는 기적과도 같은 기술을 갖고 있다. 갈고리인 동시에 끌 역할을 하는 아주 기발한 바이스다. 이 도구는 막강한 공룡들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 수공업자의 연장통에는 없는 섬세함과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다른 우주의 다른 지질학적 여건에서 산다면 앵무새는 거대한 기술 제국들을 세우고 인간을 애완동물로 기르며 앵무새 언어와 앵무새 재주를 가르칠 것이다……. 그들이 그런 엉뚱하고 불필요한 관심을 발전시킨다면 말이다.
앵무새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앵무새의 지능이 우리의 지능과 얼마나 유사한지에 놀라면서 그들의 유희적 호기심, 다 알고 있다는 미소를 띤 의도적으로 밝고 친절한 표정, 인간적인 작은 영혼에 감탄한다. 앵무새가 음악의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 좀 봐!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는 모습 좀 봐! 우리랑 정말 똑같네! 앵무새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사실 앵무새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는 자연이라는 거울에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 한낮의 태양을 눈 깜박이지 않고 사납게 바라보는, 그 작고 생기 있는 두 눈 뒤에는 우리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태고의 계산이 재깍거리고 있다. 앵무새는 행복하면 사납게 주둥이를 간다. 앵무새는 격노하면 흥분해서 춤을 춘다. 앵무새가 우리를 무는 것은 애정이 있기 때문인데, 그 애정은 피가 나는 상처를 남긴다. 앵무새가 토해 내는 선물은 헌신의 표시이다. 이런 이상한 감정 표현을 두고 ‘행복’이니 ‘노여움’이니 ‘애정’이니 하는, 인간의 오만한 단어들은 그저 허공에 날리는 하찮은 겨에 불과하다. 그런 단어는 쥐라기의 아침 기도처럼 우리 고막을 뒤덮는 앵무새의 소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소리는 번역이 불가능하며 대꾸할 수도 없다. 앵무새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앵무새는 우리의 음식을 훔쳐 먹고, 어깨 위에서 애교를 부린 다음, 뭔가 더 흥미를 끄는 것을 찾기 위해 날아가 버린다. 그 앵무새가 돌아와 우리의 가련한 깃털 대용물인 머리카락과 눈썹을 다듬어 주려고 우리 얼굴에 몸을 기댈 때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앵무새에게는 그건 아무래도 좋다. 앵무새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도록 둔다. 앵무새의 심장이 우리 뺨에서 정글의 아주 작은 북처럼 떨리고 지구가 수십억 년 된 지축을 또 한 번 돌면, 우리는 남몰래 생각한다. 여기, 지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앵무새와 함께 산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이상한 특권인가, 하고.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