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내가 다니던 대학의 공과대학에는 그리스 조각처럼 생긴 미남 운동권 선배가 있었습니다. 세상 고민은 다 짊어진 것 같은 표정 속에도 항상 온화한 미소가 번지던 분이죠. 그가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돌멩이 아니면 반으로 접은 대학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죠. 그 노트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노트를 훔쳐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는 희한하게 노트를 작성하더군요.
펼친 노트 면을 세로로 4등분 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칸을 하나로 합하고는 여기에 책에서 얻은 정보를 파란색 볼펜으로 빽빽하게 썼더군요. 왼쪽의 첫 번째 칸에는 관련이 있는 다른 책의 정보가 빨간색 볼펜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 책을 찾아서 필요한 부분을 메모해 놓기도 했고요. 첫 번째 칸의 메모는 중간 칸의 정보보다 더 충실했습니다. 첫 번째 칸은 한 번에 완성된 게 아니었습니다. 계속 추가해서 보충한 흔적이 역력했죠. 마지막 네 번째 칸에는 검정색 볼펜으로 독후감을 썼습니다. 자기가 느낀 점, 자기의 감정 흐름을 기록한 것이지요. 책 한 권이 절대로 한 바닥을 넘지 않았습니다. 책이 두껍든 얇든 상관없이 같은 분량으로 정리한 것이지요.
당시 선배는 대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1학년이었던 제가 물었습니다. “형, 도대체 이런 식으로 몇 권이나 정리했어요?” 선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한 200권쯤 안 될까?” 그때 저도 결심했습니다. ‘나도 책을 많이 읽고 꼭 저렇게 정리해야지’ 하고 말입니다. 책을 한 번 읽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다른 책을 더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사고의 틀을 강고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개뿔! 다짐은 다짐이었을 뿐입니다. 몇 번 쓰다 말았습니다. 우선 첫 번째 칸에 쓸 내용이 없었어요. 첫 번째 칸에 뭔가를 기입하기 위해서는 이미 읽어놓은 책이 많아야 했습니다. 멋진 선배를 흉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죠. 물론 제가 포기한 공식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저는 삼색 볼펜을 너무 자주 잃어버렸어요. 이 노트 작성법에는 삼색 볼펜이 필수적이잖아요.
(…)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를 읽으면서 서평도 책만큼이나, 아니 책보다 더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크’는 우리가 깜짝 놀랐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감탄사인 바로 그 ‘이크’입니다. 각주는 책의 지식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책은 정보만 얻으려고 읽는 게 아닙니다. ‘이크’라는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책이 자신의 생각과 삶을 바꾸게 되죠. ‘이크’는 어쩌면 저자가 주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독자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크’ 순간을 포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공력이 필요하죠. 이때 필요한 게 바로 서평인 것 같습니다. 서평은 “이때 ‘이크’ 하는 거야”라고 힌트를 주는 겁니다. 저도 그런 서평을 쓰고 싶었습니다.
(중략)
1부
지금 놀러 갑니다, 과학속으로
과학이 어려운 게 아니라 쉬운 것이고 지겨운 게 아니라 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달라는 주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2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과학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만 어려운 게 아니다. 역사, 철학, 문학, 예술도 어렵다. 단지 과학은 수학이라는 자연적이지 못한 언어를 사용해서 유달리 어려워 보일 뿐이다. 그래서 수학이 아닌 자연어로 쓰인 교양 과학서가 필요하다. 교양 과학이란 지식의 나열이 아니다. 교양 과학서란 생각하는 방법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주는 책이다.
놀러 갑시다, 우주로
올리비아 코스키 외, 『지금 놀러 갑니다, 다른 행성으로』
별이나 우주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한여름 날 공룡 화석을 찾아 헤매느라 지친 몸을 사막에 누인 채 바라본 은하수를 잊을 수 없다. 장엄함이나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이런 데 쓰는 거다. 경험은 책을 소환한다. 꽤 많은 천문 우주 관련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다. 하지만 결국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인상이 남는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기체로 이루어진 별은 뜬구름 같은 존재니까 말이다. 별에 대한 관심은 내가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구형 행성으로 향하게 된다.
지구형 행성은 우리로 하여금 여행하라고 부추긴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이 달에 발을 내딛은 지 50년이 되는데 말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던 박정희 시대에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이젠 10년이면 우주여행 수준이 바뀌는 시대다.
10년 전에 『우주여행 상식사전: 위험하면서 안전한』닐 코민스 지음, 이충호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이 나왔다. 당시의 상식이란 ‘위험’이었다. ‘다른 세계의 위험: 공기, 땅, 물’ ‘복사의 위험’ ‘충돌의 위험’ ‘인간이 만들어낸 위험’ ‘의학적 위험’ ‘사회적 상호작용, 정신건강, 그 밖의 인간적 요소에 관련된 위험’이었다. 맙소사! 우주여행을 떠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게 바로 안전이긴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우주여행을 꿈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결론은 “음, 우주여행은 아주 위험한 것이구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우주여행에서 귀환하는 우주선 창으로 달의 크레이터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고, 지구로 떨어질 때 점점 커지더니 결국에는 우주선 앞 유리창을 가득 메워버리는 파란 바다를 꿈꿨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가슴 설레게 하는 우주여행 안내서가 필요하다.
그렇다.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명랑한 우주여행 안내서가 나왔다. 『지금 놀러 갑니다, 다른 행성으로: 호기심 많은 행성 여행자를 위한 우주과학 상식』올리비아 코스키·야나 그르세비치 지음, 김소정 옮김, 지상의책 펴냄이 바로 그것. 이 책은 독자들이 태양계의 행성들을 안전하고(!) 재미있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 친절한 여행 안내서다. 두 저자는 스스로를 여행가이드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두 사람은 뼛속까지 우주여행 에이전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우주로 여행을 떠날 마음을 먹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성 여행 가이드를 출간하는 이유는 각 여행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최상의 정보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17쪽)
물론 책은 우주여행을 떠나기 전에 받아야 하는 훈련, 필요한 짐을 싸는 법, 우주선에서 건강을 유지하고 생존하는 방법 같은 가장 기본적이 내용을 설명한다. 이런 것은 제일 나중에 읽으면 된다. 정말로 여행 떠날 사람만 알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따로 있다. ‘가볼 만한 곳들’이라는 항목이다. 달만 해도 다양한 역사 유적지, 달 박물관, 폭풍의 대양, 아리스타르코스 고원 같은 명승지를 설명해 놨다. 잠깐! 달에 ‘달 박물관’이 있다고? 어디 보자.
“이 체제 전복적인 ‘박물관’은 아폴로 122호의 우주비행사들이 미국항공우주국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고 몰래 우주선에 실어온 것이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달 박물관은 지금도 아폴로 12호가 남긴 잔재들과 함께 남아 있다고 한다.”(61쪽)
그렇다. 책에 소개된 행성과 위성의 건물이나 도시처럼 사람이 건설한 시설 이야기는 지은이들이 꾸며낸 내용이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이 직접 발을 디딘 곳은 달밖에 없는데 말이다. 지은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간다. 현대 여행 트렌드를 살려야 한다. 요즘은 사진이나 찍으면서 다니는 관광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여행을 추구하는 시대 아닌가. 게다가 다른 행성으로 놀러 간다면 액티비티가 빠질 수 없다. 그렇다면 화성에 간 여행자는 무슨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에는 하늘 관찰하기, 암벽 등반, 더스트 데빌 쫓기, 자전거 타기, 저글링 등이 나온다. 저마다 재밌는 이유가 있다. 내가 화성에서 해보고 싶은 것은 스카이다이빙이다.
“화성은 공기가 지구보다 훨씬 희박하기 때문에 최종속도는 지구보다 다섯 배나 빠르다. 따라서 화성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려면 낙하산을 여러 개 착용해야 하고, 지구보다도 훨씬 이른 시간에 낙하산을 펴야 한다. 또한 충분히 속도를 줄일 수 있도록 아주 커다란 낙하산을 매야 한다. 지구에서는 절대로 못 느끼는 짜릿함을 경험할 것이다.”(150쪽)
만약에 목성을 여행지로 택하면 어떻게 될까? 목성은 기체형 행성이다. 우리가 내릴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로 관광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대적점과 거대한 오로라를 보는 것만으로도 본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혜성 충돌 관찰이나 목성의 자기권이 내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듣는 액티비티도 가능하다. 그런데 뭔가 아쉽다.
런던에 갔다고 해서 타워 브리지나 자연사박물관만 보고 오는 것은 아니다. 여유가 있다면 조금 떨어진 그리니치 천문대도 버스를 타고서 다녀온다. 마찬가지로 이 행성 여행서에는 목성에 간 사람들이 다녀올 수 있는 곳을 안내하는 ‘근처에는 뭐가 있을까?’라는 코너가 있다. 만약에 목성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이오, 에우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 같은 갈릴레이 위성만 소개했다면 부실한 여행서다. 그런데 이 책은 놀랍게도 트로이 소행성군과 레다 그리고 아말테아 같은 숨겨진 위성도 소개한다.
“거대하고 광대한 목성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면 갈릴레이 위성보다 좀 더 안쪽 궤도에서 목성 주위를 도는 작은 위성들 중 한 곳을 방문해보자. (…) 아말테아에서 보는 목성은 지구에서 보는 보름달보다 약 100배 크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구름과 대적점을 충분히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말테아는 12시간 정도면 목성 주위를 한 바퀴 돈다.”(192쪽)
불과 300쪽 남짓을 읽다 보면 우리는 태양계의 행성을 모두 여행한다. 뭐가 남았냐고? 과학이 그대로 남았다. 여행으로 배우는 천문 우주 과학책. 기가 막힌다. 최고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