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엔 한자어와 영어를 한마디도 안 쓴 까닭이 있다. 그 옛날 글을 모르던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니나들은 제 뜻을 내둘할 때 먼 나라 사람들의 낱말을 썼을까. 마땅쇠 안 썼으니 나도 그 뜻을 따른 것뿐이니 우리 낱말이라 어렵다고만 하지 마시고 찬찬히 한 글자 한 글자 빈 땅에 콩을 심듯 새겨서 읽어주시면 어떨까요. (머리말)
| 글쓴이의 한마디 |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 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름정서과 갈마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끈 싸움과 든메사상와 하제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 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해엔 더 달구름세월이 가기 앞서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글로 엮으려다가 그만 덜컹, 가슴탈심장병이 나빠져 아홉 때결시간도 더 칼을 댄 끝에 겨우 살아났다. 이어서 나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목숨을 걸고 글을 써 매듭을 지은 것이 이 버선발 이야기라, 이것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딱 두 가지만 다짐을 하고 싶다.
첫째, 이 이야기는 아마도 니나 이야기로는 온이인류의 갈마에서 처음일 것이다. 그러니 입때껏 여러분이 익혔던 앎이나 생각 같은 것을 얼짬잠깐만 접어두고 그냥 맨 사람으로 읽어주시면 어떨까요.
둘째, 이 이야기엔 한자어와 영어를 한마디도 안 쓴 까닭이 있다. 그 옛날 글을 모르던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니나들은 제 뜻을 내둘표현할 때 먼 나라 사람들의 낱말을 썼을까. 마땅쇠결코 안 썼으니 나도 그 뜻을 따른 것뿐이니 우리 낱말이라 어렵다고만 하지 마시고 찬찬히 한 글자 한 글자 빈 땅에 콩을 심듯 새겨서 읽어주시면 어떨까요.
어허라, 이 글이 참말로 글묵책으로 엮여져 나오긴 나오는 걸까? 이 주어진 판을 깨는 예술, 미적 전환의 계기, ‘새뚝이’가 나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저 모르는 체 기다려보는 길 밖에 없을 듯싶으다.
2019년 2월
백기완
콩받고 소리
썰렁하게 빈 밭, 거기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조짚 낟가리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납작납작 엎드린 집들이 즐비한 마을을 지나고 또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가파른 골짝으로 꺾어 들면 갑자기 무지 높다락 바윗돌, 그 외로운 그림자만을 이웃으로 한 코촉집방이 하나뿐인 집 하나가 느닷없이 불쑥한다.
지붕도 볏짚을 엮어 올린 이응이 아니다. 널따란 가나무도토리나무 닢으로 얼기설기 엮은 지붕이라는 게 오랜 달구름세월에 시달려온 탓인지 아예 바닥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눈깔을 골똘히 붙박아볼 것이면 그렇게 만만하게만 여길 집은 아니다. 미욱하리만치 삐죽삐죽한 돌로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높다란 굴뚝만큼은 보라는 듯 콧대가 솟아 있다. 그래서 저만치 먼 둘레인들 한눈으로 엮어버리는 그런 꼴이다.
살림살이는 비록 거친 언덕빼기, 빨랫줄에 펄떡이는 발싸개처럼 목이 메어 있긴 하지만,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은 어엿하다, 이눔들아라고 우겨대는 듯한 집.
바로 거기서다. 새벽녘만 되면 웬일로 콩받고 소리가 콩다콩 콩다콩 들려왔다. 토까이토끼 새끼라도 잡아다 놓고 한바탕 굿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 집 다섯 살배기 꼬마 버선발이 부엌을 가로지른 새끼줄을 잡느라 콩다콩 콩다콩 뛰고 있는 것이다.
새끼줄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던가. 웬걸, 택도 없는 소리. 바로 그 새끼줄에 매달아놓은 밥보자기를 떼느라 콩다콩 콩다콩 뛰고 있는 것이다.
잘 알고들 있다시피 밥보자기라고 할 것이면 어쨌든지 올리게밥상에 올려놓아져야만 한다. 그도 아니면 다락에 얹어놓든가.
그런데 어째서 새끼줄에, 그것도 부엌을 가로지른 새끼줄에 대롱대롱 매달아놓았을까.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참말로 입맛이 떨떠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침밥이자 낮참이라는 거
오매 다섯 살배기 꼬마 버선발은 그 집에서 엄마하고 딱 둘이서 살고 있었다. 이름도 성도 없이 그냥 버선발.
어째서 버선발이었을까. 버선발은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그의 엄마도 그렇고 하나같이 성이라는 게 없었다. 때문에 이름도 무슨 뜻을 두어 ‘버선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추우나 더우나 노다지늘 발을 벗고 살다 보니 지나던 사냥꾼들이 그렇게 부르곤 해 아예 이름이 되고 만 것이다. ‘불림’이라는 말 말이다. 주어진 판은 깨고 새판을 일군다는 한소리 불림.
버선발은 거기서 그렇게 엄마와 딱 단둘이서 살고 있는 것 같아도 알로사실는 혼자 살았다.
남의 집 머슴을 사는 엄마가 마치 새끼줄에 목이 매인 망아지처럼 새벽부터 일터엘 나가시게 되면 집구석이라는 게 버선발의 그 알량한 밥이나마 차려놓을 만한 데가 없었다. 이 때문에 밥 냄새를 맡은 집쥐들만 아글아글 덤벼드는 것이 아니다. 들쥐 새끼들까지 다투어 쑤셔 먹으려 드니 어쩌는 수가 있는가. 밥보자기를 아예 새끼줄에 매달아놓아 버선발은 그것을 떼느라 콩다콩 콩다콩 콩받고 소리를 내는 것이다.
콩다콩 콩다콩 한참 만에야 밥보자기를 낚아채 펼쳐보았자 기름기가 찰찰 밴 쌀밥이기는커녕 말라도 까실하게 말라 배틀어진 깡조밥 한 덩어리. 거기다가 건건이반찬라는 것도 그 밥 덩어리 위에 달랑 얹어놓은 된장 한 숟갈, 그나마 가시구더기가 바글바글 들쑤셔 먹던 된장 한 숟갈. 그런 밥이나마 노다지 혼자 먹어야 하는 버선발의 눈매엔 늘 아다몰이상한 이슬이라는 게 사릿아리까리 하고 서리곤 했다. 젖은 눈 말이다.
쓸쓸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그 깡조밥에 목이 메어도 꽉꽉 메어서 그랬다.
하지만 버선발은 그 때문에 단 한 술번도 징징대진 않았다. 징징대보았자 새벽같이 일을 하러 나가신 엄마가 “아이구. 내 새끼야. 건건이도 없는 깡조밥을 혼자서 먹다니” 하고 얼떵곧바로 돌아오시질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