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론을 일으키거나 거기에 붙어서 편을 끌어모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나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에 당당하려 한다. 나의 이야기가 헐겁고 어수선해도 무방하다.(5쪽)
1부
연필은 나의 삽이다
호수공원의 산신령
지난여름은 너무 더워서 호수공원에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인적 없는 공원에 연꽃이 피어서 그윽했다. 수련꽃은 물위에 내려앉은 별들처럼 보였다. 연꽃은 여기저기 피어 있어도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서 피어 있다. 연꽃은 활짝 피어 있어도 소란스럽지 않다. 연꽃은 늘 고요하고 차분하다. 연꽃은 절정에서도 솟구치지 않고 안쪽으로 스민다. 홍련紅蓮이나 백련白蓮이나, 연꽃의 색깔은 이 색에서 저 색으로 흘러가고 있다. 수련의 잎은 수면 위에 붙어서 기름진 빛으로 반짝거리고, 연잎은 코끼리 귀처럼 너울거리면서 꽃을 받쳐준다. 연잎은 꽃과 봉오리에 시립侍立한 시녀들 같다. 연꽃의 봉오리는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오는 기별처럼 기척이 없는데, 그 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는 모습은 곤한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서 이승으로 다가오는 꿈처럼 보인다.
이제, 호수공원의 연꽃은 모두 시들었다. 여름에 빛나던 꽃일수록, 가을에는 더 참혹하게 무너진다. 연잎은 누렇게 시들고 걸레처럼 썩어서 물에 떨어지고, 줄기는 모두 목이 부러져서 꺾인다. 수면에는 연꽃의 잔해로 누런 폐허가 펼쳐진다.
백일홍은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고 좀먹듯이 부스러져 내리는데, 그 꽃이 여름 내내 찬란했던 만큼 꽃이 떨어진 자리는 휑하다. 백일홍百日紅은 오랫동안 피어서 백일홍인데, 꽃이 질 때도 느릿느릿 사위어간다.
무너져서 결실을 이루니, 무너짐과 피어남이 본래 같은 것임을 가을의 호수공원에서 나는 안다.
여름꽃들이 모두 질 때 억새는 홀로 피어나서 바람 속으로 꽃씨를 퍼뜨린다. 풍매風媒하는 풀꽃들은 벌과 나비를 부르지 않는다. 억새꽃은 향기도 없고 꿀도 없다. 생김새는 초라하고 색깔은 희뿌옇다. 꽃씨는 가볍고 또 작아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 억새꽃씨는 바람에 흩어지는 미립자이다. 억새는 바람의 풀이다. 억새가 가진 것은 저 자신 하나와 바람뿐이다. 그래서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이 혼백 안에 가을빛이 모여서 반짝거린다. 작은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빛을 품고 있다. 가을 억새는 날마다 말라가면서 이 꽃씨들을 바람에 맡긴다. 꽃씨들이 모두 흩어지면 억새는 땅에 쓰러지고, 가을은 다 간 것이다.
연꽃 줄기가 꺾인 자리에, 백일홍이 떨어진 자리에, 억새가 쓰러진 자리에, 가을 잠자리들이 내려와 앉는다. 가을 잠자리는 바람을 거슬러 날지 못하고 낮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 가을 잠자리의 날개는 수평보다 아래로 처져 있다. 가을 잠자리는 내려앉은 채 바람에 흔들리는데, 잠자리가 흔들리면 잠자리 날개 무늬에 내려앉는 가을빛이 흔들린다. 잠자리는 그 자리에서 겨울을 나지는 못할 터이고, 거기서 마지막을 맞을 작정인가보다. 첫 추위에 모든 잠자리들은 죽는다고 하는데, 잠자리들이 어디서 죽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자연사한 잠자리의 무리를 본 적이 없다. 그것들의 작은 육신도 억새꽃씨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모양이다.
매미 울음소리가 사라져서 가을의 공원은 더욱 고요하다. 가끔씩 늦매미들이 우는데, 늦매미 울음은 여름날의 울음처럼 맹렬하거나 집요하지 않다. 매미의 울음은 수매미가 암매미를 부르는 구애의 절규라고 하는데, 저 작은 벌레가 어찌 그런 놀라운 사랑의 마그마를 쓰나미 같은 목청으로 폭발시키는 것인지, 사람보다 낫구나 싶다.
가을 매미는 마그마가 고갈되어서 두어 번 울다가 울음을 그친다. 그 짝들도 이미 기력이 다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울어보는 매미의 울음을 그 짝들이 경청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첫 추위에 이것들도 다 죽는다.
가을이 깊어지면 물속의 자라들은 바위에 올라가서 햇볕을 쪼인다. 자라들은 볕을 몸속에 저장해서 겨울을 날 작정인 모양이다.
자라들은 몇 시간이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저네들끼리 장난도 치지 않는다. 자라는 오직 고요해서, 바위와 구별하기 힘들다.
자라의 눈은 바늘구멍처럼 작은데, 그 구멍으로 날카로운 빛을 쏘아낸다. 자라들은 그 눈으로 공원 너머의 내 작업실 쪽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자라의 눈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자라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자라의 마음에 관해서 인간은 무엇을 아는가. 자라는 인간의 언어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인간이 자라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자라와 내가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자라의 눈에 보이는 것과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같은가 다른가. 자라의 눈에는 내가 자라로 보이는가……
이래서, 나는 자라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못한다.
공원 안 동물원의 두루미는 햇볕 비치는 자리에 외발로 서서 목을 틀어 머리를 죽지 밑에 파묻고 있다. 아이들이 불러도 두루미는 쳐다보지 않는다. 두루미는 한쪽 다리로 한나절을 서 있으면서도 다리를 바꾸지 않는다. 어떤 때는 흙을 파고 들어앉아서 사람 쪽을 외면하고 있다. 두루미는 시베리아를 오가는 철새인데, 사람한테 붙잡혀서 갇혀 있다. 가끔씩 날개를 펴고 높은 소리로 울면서 철장 안을 날아보는데, 그때 두루미는 가장 불쌍하다.
두루미는 얼마 전까지 한 마리였는데 그후에 짝을 지어주어서 지금은 두 마리다. 이 두루미는 금실이 안 좋아서 늘 따로따로 논다. 한 놈은 저쪽에서 외발로 서 있고, 다른 놈은 그 반대쪽에서 외발로 서 있다. 두루미에게는 대체 어떤 외로움이 있다는 것인가. 가을에 두루미는 더 쓸쓸해 보인다. 저런 서먹한 금실로 어찌 겨울을 나겠는가 싶다.
호수의 잉어는 천적이 없고 먹을 게 많아서 그런지 다들 살쪄 있고 움직임이 활발하다. 잉어는 얼음 밑에서 겨울을 나니까, 물이 차가워질수록 신나는 모양이다.
내가 물가에 서면 잉어들이 다가오는데, 그중에서 대가리에 흰 점 박히고 주둥이 둘레가 립스틱 칠한 것처럼 빨간 놈이 특히 나에게 자주 왔다. 나는 그놈이 나를 알아보고, 나를 맞이하러 오는 걸로 생각했다. 나는 이걸 동네 아이들한테 자랑했는데, 물론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저마다 제 물고기를 정해놓고 물가에서 서로 “온다 온다, 내 거야” 하면서 재재거렸다. 언젠가는 동네 인터넷방송 기자가 이 소문을 듣고 진짜로 물고기가 특정 사람을 알고 찾아오는지를 촬영하러 오겠다고 해서 내가 말렸다. 나는 그 기자에게 아이들의 놀이를 훼방 놓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겨울에 호수가 얼면, 잉어도 자라도 얼음 밑으로 들어가고 오리도 나들이를 하지 않으니까 물가에서 놀던 아이들은 심심하다.
나는 20년째 일산 신도시에서 살고 있다. 50살 때 이사 와서 지금 70살이 되었다. 20년 전에 이사 올 때는 지금의 정발산동에 마을이 없었고, 집은 나의 집을 포함해서 두 채뿐이었다. 나는 지금의 일산동구청과 롯데백화점 자리에서 연을 날리며 놀았다. 50대와 60대는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나는 정발산의 숲과 호수공원 나무에 많이 의지했다. 고양시는 그 20년 동안에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커졌다.
20년 전의 어린 나무가 이제는 크게 자라서 잎이 무성하고 그늘을 거느려서 사람과 새를 모은다. 나는 내가 점찍어놓은 나무들이 자라는 과정을 20년 동안 들여다보았다. 나무의 우듬지 쪽 윗가지들은 새롭게 뻗어나와서 바람에 출렁거리지만, 밑동에 가까운 굵은 가지들은 더 굵어지고 껍질이 더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가지가 벌어진 각도나 방향은 어렸을 때의 표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나무는 커졌고, 사람들은 사라졌다. 20년 전에 공원에서 장기를 두던 노인들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노인들은 이사를 갔거나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그들의 뒤를 잇달아서 늙은, 다른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 이 판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장기를 둔다. 다 같이 늙었다는 동류의식이 작용하는 때문일 것이다. 노인들은 장기판을 들고 여름에는 그늘을, 겨울에는 햇볕을 따라서 옮겨다닌다.
장기판 둘레에는 여러 노인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다. 겨울의 눈구덩이 속에서도 노인들은 오리털 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장기를 둔다.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가 장기 말을 옮길 때만 뺀다. 호수공원의 장기판은 수준이 높아서 내 실력으로는 끼어들기 어렵지만, 나는 하수들끼리 겨루는 판에서 몇 번 붙어본 적이 있었는데, 판판이 깨졌다. 나는 장기판 둘레에 서서 구경도 많이 했는데, 실전하고는 달라서 구경으로는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패자부활전을 기다리는 노인들은 줄담배를 피워가며 잡담을 했다. 노인들은 죽음을 아주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엿들으면서 메모를 했다.
— 그, 최씨 있잖아, 1·4 때 내려왔다는 사람. 요즘 안 보이네.
— 그 사람 죽었대. 부산 사는 아들네 집에 가서는 죽었다는구만.
— 그래? 멀어서 문상 못 가네.
— 이 사람아, 장기판에서 무슨 문상인가?
— 아니 최씨가 누구야? 난 기억 안 나.
— 아, 거 왜 상象 잘 쓰는 사람 있잖아, 상으로 난데없이 옆구리 찌르는 사람 말이야. 못 당하지, 못 당해.
상 잘 쓰는 사람! 나는 이 사소한 것의 신선함에 놀랐다. 이렇게 기억되는 생애는 얼마나 가벼운가. 상은 사정거리가 너무 길고 진로에 장애가 많아서 나는 상을 잘 부리지 못한다. 나는 초장부터 상을 상대의 졸과 바꿔놓고 끝판에 후회한다. 나중에 호수공원 장기판에서 나는 ‘상 못 쓰는 사람’으로 기억될 법한데, 잘 쓰는 사람은 기억되지만 못 쓰는 사람은 기억되지 않는다.
언제나 혼자서 산책 다니는 노인도 있다. 내가 아는 한 노인은 늘 추석이나 한식 때 성묘 가서 만난다. 산소는 일산에서 가깝다. 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와 그 노인의 아내의 묘소가 바로 이웃이다. 묘비를 보니까, 노인의 아내는 40대에 죽었고 자식은 없었다. 노인은 늘 혼자서 아내의 무덤에 왔다. 제사음식도 없고, 절도 하지 않았다. 낫 한 자루와 호미 한 개를 들고 와서 풀을 깎고 잡초 뿌리를 뽑았다. 그 묘지에는 넝쿨이 우거져서 봉분을 덮었다. 걷어내려면 한나절이 걸렸다. 노인은 힘이 부쳐서 자주 쉬었다. 나는 노인의 작업을 거들어주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 노인은 무덤을 향해서 나 간다, 라고 말했다.
이 노인은 나보다 열 살쯤 위였는데, 몇 년 뒤부터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호수공원에 왔다. 내가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무릎에 관절염이 왔다고 했다. 노인은 휠체어에 음향기기를 매달아놓고, 노래를 들으면서 존다. 노인이 늘 듣는 노래는 남인수, 배호이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이 노인도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다.
*남인수 노래 〈고향의 그림자〉 첫 소절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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