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흥선대원군, 개혁가인가
망국의 원흉인가?
흥선대원군은 한국 근대사의 첫 장을 여는 인물이다. 그는 왕의 아버지이면서 왕이 아니었고, 10년간 왕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왕에 의해 물러나야 했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이 된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세도정치를 타파하면서 대내 정치에서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통상 개방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과 전쟁까지 불사하며 대외 관계에서는 보수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봉건’과 ‘외세’라는 두 변수 앞에서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 선택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왕의 아버지는 어떻게 적폐를 청산하려 했을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힘없는 왕족 출신으로 세도정치기에 안동 김씨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막걸리 대감’, ‘상갓집 개’라는 조롱을 들을 만큼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헌종의 어머니였으며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조대비신정왕후의 지원으로 그의 둘째 아들 명복이 12세에 왕위를 차지하면서 이항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의 전통은 국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왕의 친척 중에서 왕위 계승자를 선정했습니다. 선조·인조·철종·고종이 이 경우에 해당되었는데, 이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의 아버지에게도 특별한 지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호칭이 ‘대원군’입니다. 조선 시대 대원군에 봉해진 사람은 모두 4명이었지만, 오직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새롭게 즉위한 고종이 아직 나이가 어려서 형식적으로는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실제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이 되어 모든 정책을 결정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아버지가 실권을 가졌던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그 후 ‘대원군’이라는 이름은 지위로는 최고가 아니지만 실제로는 최고 권력을 휘두르는 2인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박근혜 정부의 2인자이자 실세였던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 방향을 살펴본다면 김기춘 실장에게 흥선대원군의 이미지를 씌우는 것은 과분하지 않을까요?
대원군이 당면했던 과제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조세개혁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이 집권하기 1년 전,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세제도의 문제점을 성토하는 백성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대원군 정권은 백성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세·군역·환곡에 대한 개혁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가진 자의 ‘갑질’을 막고 부자 증세와 서민 감세를 실시해서 국민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한편, 빈민들에게 복지 혜택이 직접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였습니다. 특히 군역 의무에서 특혜를 누렸던 양반들에게도 일반 백성들과 동일한 책임을 지도록 해서 사회정의를 요구했던 백성들의 외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기춘 대원군’이 대통령 비서실장의 권력을 이용해 대통령의 하수인이나 집사 노릇에 머물렀던 것과는 분명하게 대조됩니다.
대원군은 당시에 ‘폐정弊政’이라고 불린 ‘적페’의 중심에 세도정치와 양반층의 기득권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처음 조정에 나온 날, 그는 재상들 앞에서 “나는 천리를 끌어들여 지척으로 삼고자 하며,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자 하며, 남대문을 높여 삼층으로 만들고자 하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에서 ‘천리를 끌어들여 지척으로 삼겠다’는 말은 세도 가문이 배척했던 왕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겠다는 뜻이었고, ‘남대문을 높여 삼층으로 만들겠다’는 말은 정조 이후 정치권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의지였으며,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겠다’는 말은 세도 권력을 평지처럼 낮추겠다는 정치 청산의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권력의 핵심에서 떨어져 있었던 평안도 지방의 인재들이나 무신들도 국가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탕평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권력 기구였던 비변사를 개혁해서 의정부에 통합시키는 한편, 세도정치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서원을 47개만 남겨 두고 모두 없애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국의 유생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고 궁궐 앞에 엎드려 거듭 상소문을 올렸지만,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개혁 의지 앞에 뜻을 접어야 했습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보면 유생들의 강렬한 저항에 대해 대원군이 남긴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습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다시 살아서 와도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 대원군의 반응에 전국의 유생들은 크게 분노하고 실망하여 흥선대원군을 ‘동방의 진시황’이라고 비난했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가 남긴 적폐에 정면으로 맞섰던 정치 개혁가이자 ‘이단아’였습니다.
경복궁 중건은 대원군의 오판이었을까?
경복궁 중건 사업은 대원군의 실패한 정책으로 자주 거론됩니다. 대다수 역사 교과서는 경복궁 중건과 관련해서 많은 농민들이 공사에 동원된 점과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행된 원납전·당백전·통행세 등을 거론하며 부정적으로 서술합니다. 조선 8도에서 동원된 백성들의 고달픔을 담고 있는 〈경복궁타령〉 등의 참고 자료도 경복궁 중건의 부작용을 더 입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소재가 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한국사 강사가 ‘흥선대원군이 농민들을 잡아다가 노임도 주지 않고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주장했다가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경복궁타령〉을 확대해석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정식 궁궐을 다시 조성하는 사업은 수많은 어려움을 동반하는 국가 프로젝트였습니다. 왜란 당시의 임금이었던 선조도 여러 번 중건 의지를 밝혔지만 실현하지 못했고, 왕권이 안정된 숙종 때에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정치 10단이었던 대원군이 ‘돈 먹는 하마’로 변신할 경복궁 중건의 어려움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270년 동안 방치되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옛 궁궐은 대원군에게 지난날 세도정치에 눌려 있었던 ‘황폐한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또한 270년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과거 왕들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직접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궁궐의 곳간을 채우고 높이를 올리는 것은 그 넓이와 높이에 비례하는 권력의 크기와 응집력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서 설치한 영건도감은 수도 한양을 정비하는 일도 함께 담당했습니다. 당시의 한양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하수구가 막혀서 물이 넘쳐흘렀고 집집마다 오물을 청계천 등에 마구 버려서 냄새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경복궁 중건은 궁궐을 다시 세우는 일에 한정되지 않고, 서울을 재정비하는 도시계획 사업이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중건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사업의 첫 시작은 원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원로회의에 부쳤을 때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추진하기로 결정되자 여러 세력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가 뒤따랐습니다. 뒷날 문제가 되는 원납전도 이때는 희망자에 한해 자발적으로 납부되었고 많은 백성들도 자원해서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가했습니다. 심지어 농사철임에도 중건 공사에 자원자들이 모여들자 농사를 소홀히 할 수 없다며 되돌려 보낼 정도였습니다. 대원군도 공사에 자원하는 백성들을 위해 위로금을 지급하고 농악대나 남사당패를 동원하여 공사 현장에 구경꾼이 몰려드는 멋진 장면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경복궁 중건은 흥선대원군의 최대 업적으로 교과서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복궁 본궁이 거의 완성되고 전각들도 뼈대를 갖추어 갈 무렵, 불이 나서 건물 800여 칸과 목재를 모두 태워 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다음 해에도 대형 화재가 나서 건축 재료로 확보해 둔 목재와 판자 들이 재로 변했습니다. 경복궁 공사가 거의 절반 정도 완성된 시점에서 만난 또 하나의 불운이었습니다. 두 번의 화재는 중건 공사를 추진하던 동력을 떨어뜨렸고, 조선 정부의 부족한 국가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경복궁 중건은 초기에 형성된 충분한 공감대에서 벗어나, 조선 정부의 일방적인 강행 의지와 그로 인한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자원해서 납부한 돈’이라는 뜻의 원납전은 재산에 따라 일정한 액수의 돈을 관리와 부자 들에게 배당하는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고, ‘원망하며 납부하는 돈’이라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원납전을 무리해서 거두었음에도 필요한 액수가 채워지지 않자, 조정은 당백전을 발행합니다. 경복궁이 완성될 때까지 거둬들인 원납전이 약 780만 냥인데, 당백전의 총액은 1600만 냥, 즉 원납전의 두 배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당백전의 명목가치는 엽전의 백 배에 해당했지만 실질가치는 엽전의 5~6배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돈을 만드는 순간 정부는 95배 정도의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치 없는 고액 화폐를 시장에 유통시키자 예상대로 물가가 순식간에 올랐습니다. 또한 관청에 보관하고 있던 동전 재료가 떨어지자 전국에 구리와 쇠붙이를 거둬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농민들의 멀쩡한 식기나 농기구까지 징발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원납전의 피해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한정되었지만, 당백전은 가난한 농민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혀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1865년에 시작된 경복궁 중건은 결국 1872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도 함께 일어나 전쟁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대외적 위기 속에서도 경복궁 중건은 강압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 때문에 조선 전국을 뒤덮은 수많은 부작용이 일어났고, 경복궁이 그 위엄을 완전하게 갖춘 1년 뒤에 이 부작용들이 부메랑이 되어 대원군의 몰락을 부르게 됩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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