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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서
주위를 보면 너나없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 사람 천지다. 근래에 조용하고 빠르게 확산하는 현상 중 하나가 공황장애, 공황발작이다. 의료 관련 통계를 들먹이지 않아도 주변에 공황발작을 겪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걸 피부로 실감한다.
공황발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 망치처럼 날아오는 증상이다. 그 순간 당사자는 죽을 것 같은 공포를 생생하게 감각한다. 그런 현상이 몇 분간 지속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극단의 공포다. 그런 경험을 한두 번 하면 일상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인다. 언제 어디서 그 광폭한 불안이 자신을 쓰나미처럼 덮칠지 알 수 없다. 예측할 수 없으니 대비할 수 없고 대비할 수 없으니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스타들이 공황장애를 많이 앓는 이유
정상급 연예인 중에서 공황장애를 고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팬들에게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자 꿈을 이룬 사람들이다. 안티팬도 있겠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호감팬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으니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연예인으로서는 최종 목표를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정상에 올라 맛보는 개인적 성취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주머니까지 두둑하다.
애정 과잉이 골치 아프지 결핍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들이 왜 공황장애 행렬의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좌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꿈을 이룬 사람의 좌절은 도대체 무엇일까. 꿈을 이뤄도 좌절하고 못 이뤄도 좌절을 피할 수 없다면 꿈의 실현 여부와 좌절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스타들이 겪는 공황장애의 근원을 살펴보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이 왜 이렇게 아픈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스타들의 공황장애는 우리 내면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의 욕망이 한곳에 집결한 교차로가 있다면 그 교차로 한가운데서 자리 잡기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스타들이다.
스타의 삶 속에는 우리 내면의 욕구와 욕망의 풍경이 그대로 압축돼 있다. 병든 장기 전체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몸속에 바늘을 밀어넣어 장기 조직을 조금만 떼어내 현미경으로 보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병에 걸렸는지, 병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병의 예후는 어떨지 등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타의 삶 일부를 떼어 심리적 현미경으로 보면 그 속에서 우리들 삶의 내밀한 모습들이 보인다.
거칠게 분류하면 스타는 두 종류다. 애초부터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획돼 세상에 나오는 스타가 있고, 자기 방식으로 나를 표현했을 뿐인데 대중의 폭발적인 환호와 관심을 받아 스타가 되는 이도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원래 그런 것뿐인데 독특하다고 주목받으며 인기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나’를 표현하는 건 나에겐 숨쉬듯 자연스럽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대중이 그 점을 특별한 것으로 느끼고 좋아하기 시작하면 숨쉬는 걸 한 번도 의식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호흡이 신경 쓰이듯 그때부터 ‘나’는 ‘나’를 의식하게 된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보면 그것이 원래의 나였는지, 내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인 건지 스스로도 혼돈스러워진다. 애초에 대중의 욕구와 취향에 맞춰 기획된 스타는 물론이고 출발선이 달랐던 스타들까지도 그런 의식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나는 나를 의심하고 추궁한다. 나는 진짜 나인 것인가?
스타란 너대중의 취향에 나를 온전히 맞추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생태계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나를 너에게 맞추는 촉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다르게 표현하면 스타가 누리는 지위와 힘은 빼어난 재능과 고도의 촉을 바탕으로 자기 소멸의 경지에 다다른 이가 누리는 화려한 보상이다. 그게 스타의 본질이다. 일시적으로 그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스타라면 그런 삶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스타는 화려하게 시든 꽃 같다.
스타가 가장 완벽하게 빛나는 순간은 나를 너에게 완벽하게 맞추었을 때다. 내가 온전히 ‘너의 욕망 그 자체’일 때,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나’가 사라졌을 때다. ‘나’를 주장하는 모습이 가능할 때도 있다. 만 원 안에서 물쓰듯 써도 좋다는 호의처럼 ‘너’가 ‘자기 주장을 하는 나’를 근사하게 바라봐주는 범위에 한해서다. 온전히 ‘나’이려고 하면 스타의 자격은 몰수당한다. 스타로서의 수명은 그것으로 끝난다. 최소한 그 생태계에서는 추방된다. ‘너’의 욕망에 반反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타의 삶은 우리 삶의 완전한 축소판이다. 일상에서 누군가의 기대와 욕구에 맞춰 끊임없이 나를 지워간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서 SOS를 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해외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일하는 한 매니저는 출근과 동시에 자기 이름이 아닌 영문 이름 ‘마이클’로 자신을 설정하고 마이클로 일과를 시작한다. 업무 중 수시로 받는 무시와 모욕을 본래의 ‘나’가 아닌 ‘마이클’이 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공과 사를 분리하는 프로의식에 투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었지만 어느 날 출근길에 가슴을 움켜쥐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하다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게 팩트다. 공황발작은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르스 부호 같은 급전急電이다. “내가 희미해지고 있어요. 거의 다 지워진 것 같아요”라는 단말마다. 공황발작의 원인을 생물학적 요인 중심으로 판단하면 증상을 없애기 위해 약물치료에 보다 치중하겠지만, 그러다 보면 공황발작이 의미하는 개인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집중과 해결은 놓치기 쉽다.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모든 아기가 아름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스타로서의 성공도 매력적인 나일 때, 독특한 내 스타일을 그대로 드러낼 때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의 욕망에 완벽하게 맞춰 움직이는 나로 살아갈 때만 가능하다. 스타는 어느 순간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자산이 전부 너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지금은 마음껏 인출해서 쓸 수 있지만 너의 눈밖에 벗어나는 순간부터 한 푼도 인출할 수 없으며, 그 즉시 천둥벌거숭이로 겨울 벌판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인기 절정의 연예인도 결정적 실수나 악성 댓글 한 번에 그간의 모든 환호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이 된다. 하루에 천 통 넘게 오던 팬레터가 거짓말처럼 한 통도 오지 않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그야말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럴 때 스타는 인기나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구나를 생생하게 실감한다. 그걸 뼛속에 새긴다. 지금의 인기가 아무리 높아도 악착같이 돈을 더 모으려 하고 훗날을 위해 따로 무엇이라도 도모하려 한다.
사람에 대한 스타들의 인식은 스타가 되기 전과 달라진다. 좋은 쪽으로가 아니다. 그들에게 사람은 공포에 가까운 존재가 되고 그 공포는 내면화된다. 그런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욱 ‘너’에 충실해지려 한다. 계속적으로 ‘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나’의 욕구이고 ‘내 삶’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 공포를 극복하기 어렵다. 줄타기 같은 삶을 시작한다. 나와 너가 순간순간 겨루다가 서서히 나를 지워나가기로 한다. 그렇게 자기 소멸의 길로 접어들며 병이 든다.
스타가 아니더라도 부모나 배우자의 강력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 자체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 주어진 역할에 헌신하는 것이 자기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스타들이 겪는 공황장애 삶의 원리와 매우 닮아 있다.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삶의 풍경이다. 자기성自己性이 소거된 채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예견된 수순이다.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절대 멎지 않으며,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지만 물리적으론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공황발작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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