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겐 천국이지만 누구에겐 지옥인 한국
‘서울은 위대한 혁신의 집합소’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눈보라 쳐도/ 변함없는 내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헤어져 멀리 있다 하여도 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1969년 길옥윤 작사·작곡, 패티 김 노래로 나온 〈서울의 찬가〉다. 이 노래는 원래 서울특별시의 시가市歌였지만, 노래도 좋고 가수도 좋은 탓인지 인기 가요로 널리 불려졌다. 지금도 〈서울의 찬가〉를 부르고 싶거나 긍정하고 싶은 서울 시민이 많을 게다. 나 역시 한때 서울 시민이었을 때 서울을 예찬까진 아닐망정 긍정했던 사람으로서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나는 균형을 좋아한다. 그래서 서울 비판에 앞서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울을 예찬한 어느 외국인의 주장도 소개하련다. 미국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는 『도시의 승리』2011에서 혁신과 학습을 조장하는 데 도시가 가진 우위의 대표적 사례로 한국이 이룬 성공을 들었다. 서울은 수십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오며 번영한 도시로 위상을 높였는바, 서울의 크기와 범위는 서울을 위대한 혁신의 집합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상경한 근로자들은 농촌 공동체에서 고립된 생활을 접고 세계 경제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서울은 한국인들만을 서로 연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서울은 오랫동안 한국과 세계 국가들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다. 서울은 한국과 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서울의 교통 인프라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 담긴 아이디어가 한국의 안팎으로 흐를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서울이라고 하는 초일극 중앙 집중화의 터전 위에 선 ‘아파트 공화국’이야말로 네트워크를 깔기에 가장 적합한 체제였다. 한국은 이미 10여 년 전 국민의 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할 뿐만 아니라 전화국 반경 4킬로미터 내에 거주하는 인구가 93퍼센트라 인터넷 서비스 공급에도 매우 유리한 위치를 확보해 하드웨어에선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대도시가 제공하는 네트워크 효과엔 그만한 비용과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네트워크 효과로 성장한 거대 기업들이 독과점의 횡포를 저지르듯, 네트워크 효과는 그 효과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한다. 또한 네트워크 효과를 낳게 하는 이른바 ‘연결과잉overconnectivity’은 통제 불능 등과 같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으면서 사회 전체를 파멸의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 어떤 혁신에도 지방을 희생으로 한 서울의 크기와 범위는 무조건 무한대 팽창할수록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어떤 혁신이라도 “과연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라는 물음을 피해갈 순 없다. 네트워크 효과가 아무리 유익하고 아름다워도 그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겐 흉악과 추악의 원인일 수 있다.
“강남 재건축은 복마전”
클레이저의 서울 예찬론을 가장 잘 실현한 곳은 서울 중에서도 강남이다. 강남은 어떤 곳인가? 바벨탑 정신이 가장 강한 곳이다. 이미 10년 전 박철수가 「10억짜리 욕망의 바벨탑: 대한민국 아파트, 거주 공간 아닌 금전적 이익의 결정체」라는 글에서 잘 지적했듯이, “재건축 아파트 조합 결성을 아이의 대학 합격 소식보다 더 반기는 부모들, 아파트가 구조적으로 튼실하지 못해 곧 무너지게 생겼다는 구조 안전 진단 평가 결과에 경축 현수막을 서둘러 붙이는 건설업체와 이름도 다양한 추진위원회” 등으로 대변되는 한국 아파트 문화의 발상지이자 전파지가 바로 강남이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재건축 사건이 잘 보여주듯이, 재건축의 주체들은 아파트의 높이를 두고 서울시와 싸운다. “49층으로 하겠다”와 “35층 이하로 해라”라는 식의 싸움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며, 재건축을 둘러싼 갈등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익갈등의 고농도 압축판이 되었다. “강남 재건축은 복마전”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인데, 2018년 12월 그 ‘복마전’의 일면이 공개되었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라는 서울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는 45년 된 5층 아파트지만 재건축 기대감에 집값은 최고 40억 원을 웃돈다. 재건축 사업 규모만 10조 원에 달하다 보니 일반적인 이익률 10퍼센트로 계산해도 1조 원에 이른다. 이게 바로 공사를 따내려는 건설사들 간 불법 출혈 경쟁과 금품 살포가 나무했던 이유다. 3개 건설사가 조합원에 책정한 로비 비용만 43억 원이었는데, 금품 살포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 아파트에서만 절반이 넘는 1,400여 명의 조합원이 금품을 받았다.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사람만 334명이나 되었다.
어떤 재건축 조합이건, 물리적 충돌까지 빚어지는 등 조합 내부의 갈등도 극심하다. 분쟁을 넘어 공식적으로 적발된 강남권 재건축 비리는 최근 2년간 190건에 육박하는 상황이니, 강남 재건축을 둘러싼 갈등 양상은 가히 복마전을 방불케 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셈이다.
다른 지역의 ‘강남 따라하기’는 이런 문제에서까지 어김없이 작동한다. 재건축 조합은 서울에만 400개가 넘고, 전국적으론 1,200여 개에 이르는데, 검찰 수사관 출신으로 도시 정비 사업 전문가인 법무사 김상윤은 “조합 있는 곳에 비대위 없는 곳이 없다”며 “대부분의 조합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각종 비리 의혹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김상윤은 “도시 정비 사업 과정에서 비리가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은 제3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해 조합원들의 의사 결정이 왜곡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조합과 시공사 등이 동원하는 ‘OS’를 가리킨다. 원래 아웃소싱Outsourcing을 뜻하는데,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용어로 변질되어 홍보 용역업체가 조직적으로 동원한 인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조합 임원선거에서부터 각종 용역 사업비를 결정하는 총회, 시공사 선정 투표 등 중요 사안마다 이들이 개입하는데,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2014년 지방선거 때 일이다. 서울 한 지역에서 당시 새누리당이 구청장 후보를 뽑는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해당 지역 조합장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OS를 대거 동원해 내부 경선을 뒤집기도 했다.”
조직적 동원이야말로 ‘선거의 꽃’이라고 하는 세간의 상식에 비춰보자면, 바로 이런 게 한국형 선거 민주주의의 본질은 아닐까?
“웅크리고, 견디고, 참고, 침묵하는 고시원의 삶”
그런 복마전은 서울 집중과 같이 이루어진 ‘아파트 공화국’이 애초에 계급 전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원죄와 무관치 않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인 손낙구는 “아파트는 자본주의 초기 딱한 처지의 가난한 노동자를 위한 공공주택으로 출발한 임대주택이었다. 착한 집이었다. 죄 없는 아파트가 한국에 와서 고생하고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딴판이었다.
한국의 아파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발레리 줄레조Valérie Gelézeau는 “한국에서 아파트 단지는 ‘중간계급 제조 공장’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중간계급 제조 공장’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군사작전식으로 맹렬하게 이루어진 아파트 건설로 아파트가 전체 주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6년 60.1퍼센트로 역사상 처음으로 60퍼센트를 넘어셨으니, 성공적인 작전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 작전은 사회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증명해온 ‘중간지위 순응 효과middle-status conformity effect’를 겨냥한 분할 지배 전략의 일환이었다. 중간계급은 사회적 지위를 열망하면서도 지위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보수성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중간계급을 정치적 지지의 보루로 삼고자 했던 역대 정권들은 아파트의 대량 공급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수도 적고 정치적 영향력도 미미한 하층계급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집이란 무엇인가? 『한국일보』는 이런 답을 내놓았다. “누구에겐 ‘욕망의 바벨탑’ 누구에겐 ‘절망의 외딴방’. 돈이 되는 ‘욕망의 바벨탑’ 이야기는 늘 무성하지만, ‘절망의 외딴방’ 이야기는 그곳에서 사람이 죽어나갈 때에만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다. 죄 없는 아파트는 ‘중간계급 제조 공장’이 된 반면, 아파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하층민은 쪽방으로 밀려났으니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빨리 죽어야 하는데…… 그 생각밖에 없어. 차에 몇 번 뛰어들려고 했는데…….” 어느 쪽방 주민의 말이다. 그럼에도 만화방이나 찜질방 등 다중 이용업소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2.5평 쪽방을 ‘천국’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다. “사람이 몸 누일 곳이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해요. 노숙자 쉼터에 있을 때는 매일 잠자리 번호표를 받으려고 몇 시간씩 기다리곤 했어요.”
찜질방을 오가다가 돈이 조금 모이면 찾는다는 고시원은 어떤가. 2018년 11월 9일 18명의 사상자사망 7명를 낸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을 통해 드러났듯이, 고시원도 도저히 집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주거 조건이 극도로 열악하다. 『조선일보』 기자 김은중이 고시원에서 3주간 산 뒤에 체험 기사를 썼는데,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겠다.
“서울 종로구 한 고시원은 방이 1평3.3㎡도 되지 않아 ‘닭장’ 같았다. 메스꺼운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습기 때문에 온몸이 금세 끈적끈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얇은 패널로 만든 벽은 아무런 소음도 막지 못했다. 한 투숙자가 ‘이곳에선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며 이어플러그귀마개를 건넸다. 앞서 고시원 생활을 겪은 이들은 ‘머물수록 우울해지고 신경이 예민해진다’고 입을 모았다. 외부인을 초대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빛도 들어오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감이 더 커져갔다. 2주차에 접어들자 맨정신으로 고시원에 귀가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술에 취해 들어가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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