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권력에 이르는 길
퉁다오通道라는 작은 장터 마을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오늘날 중국에도 별로 없다. 이 마을은 샹강湘江의 좌측 강변을 따라 약 1.5킬로미터 길이로 자리 잡고 있다. 마을 한편에는 누런 강물이 넓게 흘러 내려가고 다른 한편에는 계단식 논이 펼쳐진 나지막한 산이 있다. 퉁다오는 중국 남부의 세 개 성, 즉 광시성廣西省, 구이저우성贵州省, 후난성湖南省이 만나는 작은 소수민족 지역의 중심에 있다. 지저분하고 황폐한 이 마을의 중심가에는 진창길이 길게 뻗어 있다. 마을에는 점포도 몇 개 없고 현대적인 건물은 더더욱 없다. 주민들 스스로 이곳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체념하듯 말한다. 하지만 수십 년 전에 흥미로운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1934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중국공산당 홍군紅軍 지휘부가 이곳에 모여 회의를 했는데, 바로 그 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최고 권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퉁다오 회의는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회의다. 홍군이 이 마을을 거쳐 갔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기록은 그 당시에 병사들이 담벼락에 쓴 구호를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뿐이다. 병사들이 쓴 구호는 “모든 사람은 무기를 들고 일본에 맞서 싸워라!”였다. 1934년 당시 이 회의에 참석했던 홍군 지휘부는 지금은 모두 죽고 없다. 회의 참석자와 회의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가 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는 회의 장소가 퉁다오 외곽의 어느 농가였으며 한편에서는 마침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때 마오쩌둥은 만 41세 생일을 2주 앞두고 있었다. 키가 껑충하고 마른 체구였던 마옹는 이즈음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몹시 수척한 상태였다. 헐렁한 회색 무명옷이 금방이라도 어깨에서 흐럴내릴 것 같았다. 말라리아를 심하게 앓고 나서 아직 회복 중이던 터라 때로 들것에 실려 다녀야 했다.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보다 키가 컸던 그는 얼굴이 온화하고 말끔했으며 더부룩한 검은 머리 한가운데에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좌파 성향의 미국 작가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는 이 시기 직후에 마오쩌둥을 만났다. 스메들리가 본 마오쩌둥은 목소리가 높고 손이 여자처럼 길고 섬세하게 생겼으며 쉽게 다가가기 힘든 인상이었다.
마오는 얼굴이 길고 검은 편이었으며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마는 넓고 높았으며 입매는 여성스러웠다. 그를 묘사하는 다른 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는 분명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 이런 여성적 자질과 달리 그는 황소처럼 고집이 셌고 자존심과 목적 의식이 강철 기둥처럼 내면을 관통하고 있었다. 몇 년이든 묵묵히 기다리며 지켜보다 결국은 뜻을 관철하고 마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그는 신랄하고 음울한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영혼 깊숙이 격리되어 있는 어두운 지하 공간에서 울려나오는 듯했다. 여태껏 아무에게도 열어 보이지 않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문이 하나쯤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장 가까운 동지들에게조차 마오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메들리의 표현처럼, 그의 정신은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 잡아 그를 고립시켰다.” 마오의 인품은 충성심을 끌어냈지만 애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는 성미가 불같았지만 동시에 무한한 인내심도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시야를 지녔으면서 세부 사항을 살필 때에는 지나치게 규칙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번 뜻을 세우면 굽힐 줄 몰랐지만 극도의 섬세함도 지니고 있었다. 공적으로 카리스마의 화신이었지만 사적으로는 음모가였다.
그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고 그의 아내를 살해했으며 그의 부모 무덤을 파헤친 국민당은 1930년대 내내 마오쩌둥을 공산당 홍군의 최고 지도자로 판단했다. 국민당이 자주 그러했듯이, 이것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다.
당시 공산당의 권력은 ‘3인단三人團’이 쥐고 있었다. 3인단의 첫 번째 인물은 보구博古, 1907~1946였다. 1934년에 27살이던 보구는 당의 총서기였고 공식적으로 ‘당 중앙의 업무에 대해 전반적인 책임을 지는 동지黨中央工作的工作全部竭盡責任心的同志’로 알려져 있었다.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을 나온 보구는 언뜻 조숙한 소년처럼 보였다. 튀어나온 큰 눈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보구에 대해 한 영국 외교관은 ‘골리워그golliwog, 얼굴이 까맣고 눈이 동그란 헝겊 인형’처럼 생겼다고 말했다. 점잖지 못한 표현이었지만 적절한 비유였다. 코민테른은 보구를 낙하산 인사로 갑작스럽게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투입했는데, 공산당이 소련의 정책 노선을 충실하게 따르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3인단의 두 번째 인물은 홍군의 총정치위원 저우언라이였다.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는 보구였지만 배후 실력자는 저우언라이였다. 그는 모스크바의 신뢰도 확보하고 있었다. 세 번째 인물은 독일인 오토 브라운Otto Braun이었다. 그는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 고문이었다. 브라운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는데 코가 높고 치아도 큼직했으며 동그란 테의 안경을 썼다.
공산당 군대의 참담한 패배가 이어지는 1년 동안 이 세 사람이 당을 이끌었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이미 중국 대부분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고히 한 상태였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자신의 지배에 치명적이고 장기적인 도전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인 군사 고문의 도움을 받아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 둘레에 강력한 토치카를 만들어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이 점점 더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공산당은 천천히, 그렇지만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홍군의 목이 서서히 죄어들고 있었다. 3인단은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마오쩌둥이 지도부의 일원이었다고 해도 더 잘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 마오는 보구에 의해 2년 전부터 지도부에서 밀려나 있었다. 마오에게는 아무 힘이 없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몇 달간 고뇌에 찬 논쟁을 벌인 끝에 결국 1934년 10월 중앙 근거지를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장제스의 군대가 숨통을 끊으려고 다가옴에 따라 완전한 패배를 피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필사의 도박을 감행한 것이었다. 약 1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횡단한 이 행군은 후에 ‘대장정大長征’이라고 불리게 된다. 역경을 뚫고 나아갈 용기, 철저한 자기희생과 규율, 불굴의 의지의 영웅적 상징이 될 대장정은 사실 처음에는 ‘전략적 이동戰略大轉移’으로, 조금 뒤에는 그저 ‘서쪽을 향한 행군西部進軍’이라고 불렸다.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후난성 서북 지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지역 군벌軍閥들은 장제스의 야심에 의심을 품고 그에게 협조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그 일대 공산당 세력과 합류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행군은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홍군은 첫 번째 포위망을 손쉽게 빠져나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포위망 역시 뚫을 수 있었다. 국민당 정보기관에서 공산당이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3주가 넘게 걸렸다. 하지만 네 번째 포위망인 샹강 전선은 달랐다.
11월 25일부터 12월 3일까지 1주일 넘게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결과 홍군은 1만 5천 명 내지 2만 명의 전투원을 잃었다. 4만 명에 달한 예비 병력과 짐꾼이 대오를 이탈하여 도주했다. 10월에 출발했을 때는 모두 합쳐 8만 6천 명이었는데, 짐 나르는 행렬이 무려 80킬로미터에 이르러 마치 거대한 뱀이 구불구불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남은 인원은 3만 명 남짓이었다. 훗날 마오쩌둥이 행군 중인 군대라기보다 이삿짐 나르는 사람들 같았다고 표현한 이 장대한 행렬은 샹강 전투에서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강변의 진흙탕과 언덕 곳곳에 사무 집기, 인쇄기, 당의 공문서, 이동식 발전기 등 온갖 잡동사니가 나뒹굴었다. 공산당이 지난 3년 동안 벨기에보다 약간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쌓인 이 물건들은 짐꾼의 등에 실려 산을 넘고 논두렁을 지나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온 끝에 이렇게 버려졌다. 각종 대포, 기관총, 단 하나 있던 엑스선 촬영기마저 내동댕이쳐졌다. 이 짐 때문에 행군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고, 지나치게 덩치가 커지고 약해진 홍군은 장제스가 놓은 덫으로 천천히 기어들어 갔던 것이다.
웬만한 일로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홍군 지도자들도 이렇게 큰 재앙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동안 애써 만든 근거지를 아쉽게 탈출한 것이 10월이었는데, 불과 2개월 만에 병력의 3분의 2를 잃을 것이다.
1주일 뒤 홍군은 드디어 추격자들을 떨쳐버리고 후난성 남부 지역으로 진입했다. 부대가 재편성되고 전체적인 질서를 회복했다. 하지만 지도부 내에서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다. 3인단에게 책임을 물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이날, 즉 1934년 12월 12일 퉁다오 마을에서 회의를 한 여덟아홉 명의 지친 당 지도자들에게는 책임을 묻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이 행렬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보구와 오토 브라운은 원래 계획대로 후난성 서북부 지역으로 가자고 고집했다. 하지만 군사 지휘관들이 반대했다. 장제스의 30만 병력이 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 행군을 강행하는 것은 홍군의 전멸을 초래할 일이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동쪽에서 후난성 군벌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다급하면서도 열띤 토론 끝에 서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구이저우성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임시 결정이 내려졌다. 거기서 당 정치국 전원회의를 열어 향후 전략을 논의하기로 했다. 이 타협안은 마오쩌둥이 내놓았다. 1932년 마오가 군 지휘부에서 축출된 이후 당 간부들이 처음으로 그의 의견을 듣고 채택했던 것이다. 샹강에서 크게 패배한 뒤에야 비로소 마오는 영향력을 회복했다. 중국 속담에 만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마오쩌둥에게 퉁다오 회의는 바로 그 한 걸음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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