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
‘독서사’란 무엇인가
책 읽기란 어떤 인간 활동인가? 그것은 어떤 역사를 가진 것인가?
『고양이 대학살The Great Cat Massacre』로 유명한 문화사학자 로버트 단턴의 말처럼 책의 역사와 독서의 역사는 다르다. 책의 역사는 책과 인쇄물을 매개로 하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경로를 추적한다. 즉 저자로부터 출발하여 출판사 → 인쇄업자 → 서적상 → 독자까지 연결되는 “‘커뮤니케이션 회로circuit’의 각 단계와 전 과정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어떻게 변천 혹은 발전”했는지, 또 어느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시스템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는가를 이해하려는 것이 책의 역사”이다. 이에 비해 독서의 역사는 ‘커뮤니케이션 회로’의 마지막 경로이자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실현되는 단계인 읽는 행위를 탐구한다. 그것은 누가, 무엇어떤 책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읽(었)는가라는 “육하원칙에 입각하여 과거의 독서 양상과 관행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밝히는” 것을 우선 목적으로 한다.
분명 참고할 만하고 이해하기 쉽긴 하지만, 단턴이 말한 누가 언제 어떻게 무슨 책을 왜 읽었는가라고 한 여섯 항목은 한편으로는 통속적이고 추상적인 범주이다. 그런 항목은 독서문화의 실제를 보여주는 기본 과제일 수 있지만, 모두 같은 중요성을 지니거나 그 자체로 어떤 시대 책 읽기의 역사적 의미를 나타내주지는 못한다. ‘누가’독서행위의 주체 ‘무엇을’책·잡지, 기타 인쇄물 등의 대상 같은 항목은 독서사의 기본이며 시대를 드러내줄 것이나, ‘어떻게’독서의 지배적 방식나 ‘왜’독서의 목적 또는 사회적 의미는 깊은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파악하기 어렵고 시대적으로도 보다 천천히 변할 것이다.
즉 책 읽기의 역사도 역사의 하나로서 수많은 사실들이 사가史家에 의해 집적·재구성되고 해석되어 서술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근대의 책 읽기》천정환 같은 연구에서는 ‘누가’소수의 엘리트에서 대중으로 ‘무엇을’전통적 서적에서 근대의 인쇄 매체로 외에도 ‘어떻게’공동체적 독서에서 개인적 독서로, 그리고 낭독에서 묵독으로가 중요했다. 현대 혹은 탙근대의 책 읽기를 논해야 하는 여기서는 서술의 중요 과제가 달라진다.
‘독서문화사’의 의의는 무엇인가
독서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현상이다. 독서의 수행은 사람마다의 몸과 뇌지력를 통해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이다. 독서는 적당한 체력과 선행 지적 훈련, 그리고 독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TV 보기 같은 일과는 달리 매우 의식적이고 집약적인 지적 활동이다. 그런데 책의 선택과 구입, 독서 과정과 독서 후 인식과 행동의 변화에 이르는 모든 일은, 개인이 속한 당대의 이런저런 문화적 정황에 의해 주어지는 집합적 행위의 일부다. 이 집합적 행위와 인식을 ‘독서문화’라 지칭하고자 하는데, 그 안에서 개인은 어떤 책을 택하고 읽는또는 택하지 않거나 읽지 않는 자유를 가진다.
독서라는 사회적 행위와 그에 관련된 집합적 인식과 수행으로서의 독서문화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 사가 로제 샤르티에는 대혁명 전후에 일어난 문화적 변혁과 프랑스에서의 ‘근대의 책 읽기’를 기술하며, 그 시대의 새로운 독서란 “‘사적 개인에 의한 이성의 대중적 사용’이라는 칸트의 관행에 따르는 것”이라 했다. 바꿔 말하면 근대의 여명기, 대혁명을 앞둔 시대의 프랑스에서 독서행위가 근대적 ‘자유’와 비판이성과 연결되는 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점을 한국에 적용하면 어떨까? 예컨대 1900년대의 조선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또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일까? 그 사람은 아마 새로운 문명의 도래에 따른 전통사회의 ‘창조적 파괴’를 경험하는 ‘신청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오늘날 한국에 적용하면 어떠할까? 이를테면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독서문화에서 주요 영역을 차지하게 된 자기계발서 읽기를 ‘사적 개인에 의한 이성의 대중적 사용’과 결부시킬 수 있을까?
그 같은 방향 있는 거시적·미시적 변화를 ‘독서문화사’라 할 때 한국 독서문화사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 1945년 해방 당시 전체 한반도 주민의 절반 정도는 문맹자였다. 70여 년이 흐른 이제 문맹자는 거의 없다. 그런데 교육열이라면 세계 어딜 내놔도 1등이고 무려 80%의 고교 졸업자가 대학을 가는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에서 ‘실질 문맹률’이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라니 이건 또 무슨 변괴인가? 이 변화의 방향을 선택하여 기술하는 것 자체가 곧 문화사를 이해하는 근본 시각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한국 독서문화의 거시적 변화를 이해하려 한다.
독서와 우리 현대사를 함께 보고자 하는 이 자리는 곧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지식문화와 맺는 관계를 보는 자리이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거대한 ‘인간 개발’과 지식 발달사의 동력이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자료로 근근이 시작했던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이제 1천만 종의 서책이 쌓여 있으며,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은 유사 이래 최고의 학력과 두뇌를 가지고 있다. 즉 독서의 현대사는 전문지식·상식, 그리고 교양의 역사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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