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새로운 여성 세대의 출현
이들은 학문을 통해 이론으로 페미니즘을 배우고 여성문제를 학문적으로 논하는 우리 세대를 ‘올드페미’라고 부른다. 이와 대조하여 그들은 ‘영페미’인 셈이다. 올드페미가 이론적-학문적이라면, SNS 세대의 영페미는 현실 정치적이고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활동적이며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과 혐오를 바로 자신의 무제로 간주하여 저항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참고 인내하거나 웬만하면 ‘못 본 척’ 넘어가는 예전 세대의 여성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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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이 역으로 남성을 대상으로 혐오미러링를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갑자기 여성들이 이런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과격한 방식으로 혐오를 미러링하고, 종교, 정치, 사법 분야 등 성역 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가? 그동안 여성들에게 암암리에 요구되어 온 삶의 방식을 탈피하고자 하는가? 사회가 규정해 온 여성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거기서 벗어나자는 ‘탈코르셋’을 부르짖는가? 여성 차별을 없애라고 시위하며 수만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는가?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여성 세대의 출현과 그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여성 세대의 경험을 반영하는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자 하였다. 그 방식은 특별한 형태의 심층 설문조사를 병행한 것이다. 단지 주제별로 찬반의 입장이나 어떤 관점을 취하는지 조사하기보다, 각자 그런 입장을 취하게 된 경험과 더불어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이유와 근거들을 함께 기술하는 심층 설문을 통하여, 그들의 사유와 행위동기를 최대한 이해하고자 했다. 또한 개별적 주체로서 행동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관점과 독자적인 생각들을 드러내면서도 그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지점들을 기술하고자 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현상 이면의 동기와 이유와 삶의 맥락을 짚어봄으로써, 비판 이전에 그들과 소통하고 이해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20대를 전후로 한, 그리고 30대에 걸친 이 세대는 SNS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다양한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거기서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해 온 세대이다. 설문조사에서 나타나 있듯이 이들은 매우 주체적이다. 누가 지시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따르기보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고민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당당하고 조리 있게 표현하는 세대이다. 양육과 교육에서는 예전과 달리 비교적 남녀 차별 없이 길러진 세대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도 여학생들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거침없이 자기표현을 할 줄 안다. 교육의 성과에서나 대학 진학률에서도 여학생은 남학생에 결코 뒤지지 않고 대등한 능력을 확인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성평등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반페미니스트들은 이 자료를 활용하며 더 이상 여성 할당제 등의 여성 우대는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페미니즘은 시대적 효력을 다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제도적으로나 인식적으로나 여성을 차별하고 비하하는 현실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사회의 여러 제도는 여성들의 변화된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성평등을 비롯한 여성성에 대한 사고는 과거 가부장제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들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경험하면서 이 사실을 자신의 문제로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2015년 전후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물론 인류 역사에서 여성 차별적 젠더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으나, 신세대 여성들은 사회 체계가 견고한 성차별적 위계질서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차별과 혐오를 겪으면서, ‘일베’를 비롯한 남성 위주 사이트의 여성 혐오 담론, 성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매체들, 강남역 살인 사건, 미투, 몰카 편파 수사 등에 드러난 차별적 여성 혐오 사회에 분노하고 행동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은 네트워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직접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일에 익숙하다. 이들은 탈중심적인 인터넷 세대이듯, 행동도 탈중심적이고 민주적이며, 개인적이면서도 연대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뭉치는 법을 알고 있다. 생각을 공유하며 연대하지만 과거의 운동 방식과 달리 일방적으로 리더를 만들지 않으며 일방적으로 따르지도 않는다. 모든 사안에 대해 각자 자신의 의사를 동등하게 표현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고자 한다. 대표적으로, 2016년 여름 이화여대의 시위 방식이 그 한 예이다. 당시 이화여대 학생들은 주동자 없이 직접민주주의 형태인 만민공동회의 방식으로 시위를 운영했다. 이 시위 방식은 한국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일방적 리더 없는 탈중심적 연대, 마스크 쓰기, 포스트잇 시위, 운동권이나 외부 세력과 연대하지 않기, 사적인 친목 관계를 만들지 않기 등은 최근 혜화역과 광화문 광장에 모인 여성들의 연대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이 시대 여성들은 일상의 정치를 구현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세대이다. 그들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과 일상이 정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하는 세대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일상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각자 그러한 고민의 해답을 찾으며 자신의 행위 방식을 결정하고자 하며, 중앙에서 통제하기 않는 탈중심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네트워크에서 탈중심적으로, 리더를 선출하지 않으며, 개인적 친분이 없거나 서로의 안면을 모르면서도 모이고 헤치면서 연대하고 행동하는 것은 인터넷 문화를 통해 이런 방식의 연대를 실행할 능력을 체화한 세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학문을 통해 이론으로 페미니즘을 배우고 여성문제를 학문적으로 논하는 우리 세대를 ‘올드페미’라고 부른다. 이와 대조하여 그들은 ‘영페미’인 셈이다. 올드페미가 이론적-학문적이라면, SNS 세대의 영페미는 현실 정치적이고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활동적이며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과 혐오를 바로 자신의 무제로 간주하여 저항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참고 인내하거나 웬만하면 ‘못 본 척’ 넘어가는 예전 세대의 여성들과 다르다. 나는 ‘올드페미’라고 규정당하는 일순간의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영페미들의 당당하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경이롭기 조차하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행동하면서도 SNS를 통해 연대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프라인에서도 함께 행동한다. 이러한 여성 연대는 한국 역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놀라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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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확산되어 가던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해 메르스 사태와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은 새로운 자각을 하기에 이른다. 남성들이 만드는 기존의 가부장제 프레임으로는 여성 혐오를 극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여혐으로 자신들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특히 메르스 사태에서 드러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비하 등 여성 혐오에 반발한 여성들이 집결하여 ‘메갈리아’가 탄생되었다. 이들은 여혐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남혐으로 돌려주겠다는 저항 의식으로 대응했으며, 여기서 혐오에 대한 미러링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예전과 달리 더 이상 개념녀가 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격한 방식으로 혐오를 미러링함으로써 여성들의 고통과 분노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메갈리아에서 분리되어 나온 워마드는 생물학적 여성 외의 남성을 배격하는 급진적 방식을 채택했으며,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수용하여 더욱 과격한 방식으로 혐오 전략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여성 차별적 혐오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면서, 여성들은 여성 혐오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에서 철학 상담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해 오면서 학생들과 상담하거나 그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던 만큼 학생들의 고민과 목소리를 이전부터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 이해되지 못했던 점들도 요즘의 현상과 연관해 보면 퍼즐 조각들이 맞추어지듯이 설명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나는 어떻게 일상 속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새로운 세대이자 영페미들은 일상의 삶에서 성차별과 여혐과 대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여성 세대에게 페미니즘은 일상의 실천인 동시에 바로 자신의 삶을 주체로서 사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몰카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남녀 차별적 편파 수사에 분노하며 법과 제도의 개선을 부르짖으며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나 여성들의 저항에 대해 쏟아지는 기사나 방송들을 접하면서, 중요한 맥락을 놓치거나, 편견 때문에 실상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피상적으로 비난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혹자는 워마드의 ‘혐오스러운 발언과 행동’이 페미니즘을 후퇴시키고 그로 인해 ‘이제 페미니즘은 끝났다’라고 평가하거나 예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워마드는 단지 혐오를 양산하는 괴물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학생이거나 일반 여성일 수도 친구와 가족일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동시에 그에 대해 숙고하는 개인들이다. 나는 상담실에서, 강의실에서 여성 차별적 혐오에 대해 상처 입고 진지하게 고충을 털어 놓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때로는 워마드 사용자들의 고민이 중첩되는 것을 느낀다. 토론시간에 일부 학생들은 여성 혐오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혐오로 맞서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일부는 그것에 반대하지만, 여성 혐오가 극심한 상황에서 그들을 비난할 순 없다는 심정을 밝히기도 한다. 또한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혐오 전략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지금도, 입장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 안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이 내가 경험한 새로운 세대 여성들의 모습이자 행동 방식의 일면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최근의 여성들의 행동을 비롯하여 영페미니스트들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편협하고 일방적인 악플러들이나 일부 학자들은 워마드의 과격한 특정 행위를 거론하며 페미니즘 전체를 정신병자 취급 하지만, 그들을 생각 없이 미쳐 날뛰는 페미들로 규정해선 안 된다. 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차별과 여혐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왜 그들은 그토록 분노하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이해가 남녀 해결의 현상과 여성들의 사회적 저항과 정치적 시위에 대한 대책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이상이 내가 이 책을 저술하고자 하는 이유이자 배경이다. 나는 이 책에서 메갈리아로부터 이어지는 워마드의 혐오 미러링을 중심으로 혐오 전략의 역할과 문제를 검토하겠지만, 이보다 넓은 맥락에서 최근에 부각되는 한국 페미니즘의 흐름과 연관 지어 조명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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