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성재기와 남성 “연대”
2013년 어느 날 시민 단체인 ‘남성 연대’의 성재기 대표가 마포대교 난간에 위태롭게 섰다. 그가 다리 위에 서 있게 된 이유는 단체의 운영을 위한 후원금 모금을 요청하면서 던졌던 “성금으로 1억이 모이지 않으면 한강에 투신하겠다”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단체를 운영하면서 생긴 2억 원의 빚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투신이 자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금 모금 실패에 따른 퍼포먼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해병대를 나와 수영을 잘하고 최소한의 안전 조치들을 해놨으며, 그날 저녁에 고기 파티를 벌이기로 했다는 것 등이 그가 제시했던 증거였다. 하지만 결국 나흘이 지난 뒤 강의 하류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며 퍼포먼스는 사망 사고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난처한 일이다. 사인死因부터 애매하다. 그가 생전에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사고다. 하지만 장마로 불어난 한강 물에 별다른 조치 없이 맨몸으로 투신하면서 멀쩡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의도적 자살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어도, 평범한 안전사고로 바라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더 곤란한 것은 이 죽음의 의미다.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는 개인 신변의 문제나 우발적인 사고로 사망한 것이 아니다. 생전에 그는 일련의 사회적 주장과 요구들을 꾸준히 해왔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에는 마땅히 그의 활동들과 연계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건 투신의 이유는 단체의 운영비가 모금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가 평소 역설하던 더치페이나 남성 역차별 문제를 위해서였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후일 발표된 남성 연대의 성명서에서는 이 퍼포먼스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주장성매매 적발 시 구매자만을 처벌하는 내용의 성매매 특별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이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으나, 그의 죽음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한강 투신의 위험성에 대한 환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 대표의 사망 이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남성들이 온라인에 대거 나타났다. 생각해보면 그들이야말로 성 대표를 살릴 수 있었던 이들이다. 후원을 했다면, 또는 그의 ‘퍼포먼스’를 진심으로 말렸다면 그가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 연대를 향한 남성들의 ‘연대’는 그다지 끈끈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성 대표는 생전에 장난 후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2012년 즈음 일베 저장소www.ilbe.com, 이하 ‘일베’의 회원들이 남성 연대에 후원을 했다며 많게는 수백만 원의 송금 확인증을 인증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대부분 장난이거나 조작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 대표의 사후에도 장례식장을 찾아가 조의금으로 500원이나 1000원을 낸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동조하고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실질적인 도움들은 매우 저조했던 것이다.
의리 없는 전쟁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여성 혐오의 물결에 편승하고 싶어 하는 ‘관심 종자’들은 넘쳐나지만, 이들은 굳이 따지자면 ‘소모되고 버려지는’ 존재에 가깝다. 온라인에서 관련 논쟁이나 싸움이 벌어지면 약방의 감초처럼 불려 나오는 것에 비해, 정작 세력화는 그다지 진전되고 있지 않다. 누군가가 여성 혐오적 발언이나 행동을 통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온라인에서는 그들에 대한 응원물론 대부분은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이 쇄도한다. 그러나 그들이 형사처벌 또는 소송 등의 이유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응원은 곧잘 조롱으로 뒤바뀐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여성 혐오에 동조하는 남성들의 여론은 누군가가 주목을 받기 위해 나서면 그에게 관심을 주며 더 과격한 행동을 부추기다가, 그가 실제로 선을 넘고 처벌을 받으면 빠르게 ‘손절’손해를 끊어버리는 매매인 손절매孫絶賣의 줄임말로서, 손해를 보기 전에 거래, 투자, 관계 등을 단절한다는 뜻이다.한다. 이들은 이런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이 냉혹한 세상의 법칙이고 제때 손절하지 못한 이들이 잘못이라고 단정하곤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과격한 트롤링trolling을 통해 주목받기 경쟁을 벌이고자 하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남성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 사회의 주류는 이런 구도에 별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모두 페미니스트여서가 아니라, 이미 유리하게 살고 있는데 굳이 이런 구질구질한 판에 끼어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계급적인 것이든, 혹은 남성성에 대한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든, 연애와 섹스의 시장으로부터 배척당한 것이든 간에, 이 전쟁에 끼어드는 제1의 동인動因은 단연코 결핍이다. 나머지 침묵하는 다수는 그런 결핍된 남자들이 벌이는 쇼를 즐기고 그것이 만들어낸 이득들은 공유하되, 책임을 나누지는 않는다.
여전히 남자들의 중요한 덕목으로 의리를 말하곤 하지만, 이 성전性戰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의리 없음이야말로 젠더 권력이 어디로 쏠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남자들은 굳이 나서서 연대할 필요가 없다. 굳이 남성의 인권을 소리 높여 외칠 필요도 없다. 가장 효과적인 대응 전략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 제기와 평등에의 목소리를 뭉개면서 가만히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버튼 눌린 남자들
하지만 최근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남자들의 수는 점점 늘고 있다. 2015년 등장했다가 사라졌으나 영원히 한국 남자의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메갈리아’ 이후의 일이다. 메갈리아는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급진적인 메시지를 넘어, ‘여자도 남자를 아프게 할 수 있다’라는 경천동지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그동안 여성들에게 쏟아졌던 수많은 혐오 표현들을 반전한 ‘미러링’은 순백의 설원 같던 남자들의 마음에 거친 발자국을 남겼다.
마음껏 여성 혐오적 표현을 사용하던 남자들, 혹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김여사’나 ‘된장녀’ 짤방을 보며 남의 일인 듯 히죽거리던 남자들은 그야말로 광분했다. 그 수많은 반격들 중에서 가장 핵심은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에 대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자료들에서는 한국 남자의 평균 성기 크기를 발기 전 6.9센티미터 발기 후 9.6센티미터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1위 콩고12/16cm나 일본8/13cm보다 작은 것은 물론 인도발기 후 10.02cm보다 작은 최하위권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국 남자의 작은 성기를 손동작으로 나타낸 메갈리아의 로고는 남자들로 하여금 비슷한 손동작만 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하는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반응은 남자들 간의 경쟁에서뿐만 아니라, 여자들과의 경쟁에서도 패배하기 시작한 남성들이 증가하면서 심화되었다. 오늘날 남성들의 학력 저하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초·중·고·대를 막론하고 학교 현장에서 남자들은 뒤처지고 있다. 또한 제조업이 위기를 맞이하고 서비스업이 대두되는 산업구조의 변화는 특히 하층계급의 남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물론 여전히 소득이나 취업률을 비롯한 대부분의 경제적 지표들은 남성의 우위를 압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남자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경제적 삶을 기대하기 힘들어진 것은 확실하며, 곳곳에서 추락의 징후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위협을 느끼고 있는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을 자신에 대한 역차별로 인지하여 공격하고 있다.
물론 남성에게 더 강하게 적용되는 제약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계 부양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은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와는 상관없이 사회 대부분의 남성에게 작용하는 압력이다. 결혼을 해 정상 가족을 꾸리고 생계 부양자로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라는 식의 인식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으며, 강력하게 구속력을 행사한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남성 가장을 가족의 ‘주인’으로 여기고, 구성원들을 비인격화하는 풍조 역시 성립하게 된다.
한국 사회 남성들의 오래되고 집단적인 트라우마인 군 복무의 경험 역시 남성들에게 제약으로 인식된다. 군 복무는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별다른 사회적 보상 없이 의무로서 허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폭력과 위험에 노출되며, 특정한 관점과 의견을 강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분명 문제적이지만, 이에 대한 남성들의 불만이 주로 또래의 여성들을 향한다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남성들이 병역의무에 대해 쏟아내는 주장을 종합하면 자신들의 병역은 분단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너무 큰 손해이자 상처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수고와 고통을 여성들이 알아주어야 하는데, 여성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권리만을 요구하고 남성들을 위로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이라는 식의 기괴한 전개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회운동 주체들이 진행해온 징병제 개선 운동혹은 모병제 전환 운동이 남성 일반에게 인기를 끈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병영 인권화 조치에 대해 가장 많은 비난을 쏟아내는 집단은 다름 아닌 예비역들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는 엇박자의 상황이 이어지게 된다.
최근 무자비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회경제적 삶의 전반적인 후퇴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 역시 문제적이다. 그리고 남자들 역시 이 여파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양극화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의 격차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회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여파는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에 더 심각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지위는 적어도 젠더라는 범주에서는 언제나 주류의 지위를 차지한다. 물론 개개인의 위치는 젠더만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계급이나 인종지역, 장애 여부와 같은 다른 범주들과의 교차 속에서 정해진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성애자 남자이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젠더를 가진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범주는 그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그 영향력의 차이는 발생할 수 있을지언정, 스위치처럼 개별적으로 켜고 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성애자 남자라는 젠더는 그가 빈곤하거나 유색인이거나 장애인일지라도 남성 지배의 지분을 일정 정도 공유하며, 각자의 상황에 따라 그것을 행사하게 된다. 이것이 특권이 되지 못하는 아주 소수의 공간들이 있지만, 거기에서 남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이 남자가 아닌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편함에 비길 수 있는 바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이런 조건들이 아무 의미 없으며,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에 달렸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으며, 패배는 각자의 책임이라고 가르친다. 과거에는 윤리적인 영역에 속했던 정체성의 문제들이 이제는 이해득실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특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역)차별로 인식하곤 한다. 오로지 내 눈앞의 풍경만이 진실이다. 그 속에서 남자들은 자기 연민과 정당성을 주조해낸다. 이 남자들은 기만자들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을 믿고 있는 이들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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