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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식민지
1961년 1월 17일, 밤 10시가 다 된 카탕가의 한 덤불숲. 서른다섯 살 벨기에 경찰관 프란스 버르스회러는 현지 흑인 경찰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들에게 루뭄바의 시신을 좁은 구덩이에 밀어 넣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순간, 버르스회러는 스스로 콩고 총리를 살해하는 하수인이 되었다. 잘 훈련받은 이 경찰은 몸에 밴 습관대로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총을 쏜 시각을 기록한다. 밤 9시 43분. 그런 다음 그 잔인한 장면을 환하게 밝히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꺼져 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버르스회러는 황야가 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땀에 온몸이 흠뻑 젖었고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손은 축축하고 끈적끈적하게 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득 ‘나는 지금 벨기에에 있지 않아’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어떻게 자기 손에 유력한 콩고 정치인의 피를 묻히게 됐을까?
레오폴 2세의 땅
1870년대 들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의 상당 부분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대륙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어떻게 나눠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열강 사이에 벌어질 심각한 다툼을 피하기 위해 1885년 이 유럽 국가들은 콩고를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재위 1865~1909에게 줘 버렸고, 레오폴 2세 개인이 ‘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의 주인이 되었다. 콩고자유국은 나중에 크게 여섯 개 주로 나뉘게 된다. 서쪽 해안의 레오폴드빌, 북부의 에콰퇴르, 더 먼 북동쪽 오리앙탈, 동쪽의 키부, 중앙의 카사이, 그리고 그보다 먼 남동쪽에 행정 관할이 복잡한 카탕가가 있었다.
레오폴 2세는 이 광활한 땅이 벨기에의 영향력을 한층 높여 주고 특별한 혜택을 가져다줄 거라 기대했다. 이 식민지를 통해 그는 가톨릭교도와 세속주의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부의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과 북부 플랑드르에서 사실상 네덜란드어와 거의 같은 플랑드르어를 쓰는 사람들로 쪼개진 작은 나라 벨기에를 통합하고 싶어 했다. 유럽 북서쪽 귀퉁이에서 유럽과 공통점을 찾으려 애쓰던 엘리트들과 달리, 정작 벨기에 국민들은 ‘제국’에 별 관심이 없었다. 콩고자유국은 오늘날 미국 면적의 3분의 1이 조금 안되고 벨기에보다는 무려 여덟 배나 컸다. 레오폴 2세는 제국을 관리하는 데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레오폴 2세는 벨기에 바깥의 민간 투자자나 기업, 다른 서방 국가, 벨기에의 돈 많은 기업가, 벨기에 정부와도 계약을 체결했다. 콩고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던 그런 식민지가 아니었다. 레오폴 2세는 아프리카인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투자자들이 수익을 올리기 위해 이 광활한 땅을 경영했다.
유럽인들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콩고를 만들 때도 이전에 형성되어 있던 사회적·정치적 국경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지리에 무지한 채로 온 대륙을 제멋대로 활보했다. 그들은 기존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이고 종교적·언어적 경계도 무시했다. 때로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먼저 이득을 확보하려는 노력, 아니면 이들을 회유하려는 노력으로 새 영토가 결정되었다. 그 결과 광활한 콩고자유국이 존재하게 됐지만 콩고는 그 무렵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이 생각하던 ‘국가’로 보기는 어려웠다. 단일 국민, 공통된 인식, 공적인 역사, 지리적 동질성, 공통된 문화, 공유되는 관습, 단일한 언어, 통일된 군사행동 같은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오폴 2세가 콩고를 지배하기 위해 지워 버린 과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릴 수 있다. 대신 식민주의는 ‘벨기에령 콩고’Belgian Congo를 만들어 냈고, 레오폴 2세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있는 유럽인의 이익을 위해 일할 콩고인들을 발견해 냈다.
콩고가 얼마나 응집력이 떨어지는 곳이었는지는 두 사례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바콩고Bas-Congo로 알려진 지역은 예전 콩고 왕국의 일부였다. 이 고대 해양 국가는 유럽 열강에 의해 북쪽으로 프랑스령 콩고와 레오폴 2세의 콩고, 남쪽으로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앙골라로 분할되었다. 1920년대에는 이곳에서 콩고의 수도이자 주의 이름이기도 한 레오폴드빌오늘날의 킨샤사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백인들이 만든 더 크고 이질적인 국가가 아니라 예전의 콩고 왕국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꿈꿨다.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콩고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레오폴드빌은 유럽인들이 콩고 내륙으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었다. 벨기에인들이 국가 건설을 구상했다면 아프리카의 심장부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레오폴드빌에 ‘식민지 본부’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콩고 남동부 카탕가에는 중앙집권에 반대하는 다른 세력이 존재했다. 카탕가 일대는 나중에 엘리자베스빌오늘날의 루붐바시을 중심으로 한 콩고의 주요 채굴 지역이 된다. 지난날 레오폴 2세는 카탕가에서 영국을 몰아냈다. 영국 식민지 로디지아가 이 카탕가와 인접해 있었는데, 영국과 벨기에는 이곳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두고 힘을 겨루고 있었다. 레오폴 2세는 카탕가에서 가까스로 영국을 꺾었지만 영국인들에게 이권 사업의 결정권을 상당 부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카탕가는 콩고에 할당되었지만 폭넓은 자치권을 얻었고 벨기에가 지배하는 콩고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지위를 누렸다. 콩고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대부분은 이 카탕가에서 나왔고 이곳의 유력 기업들은 그들의 소유주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이런 업체들 가운데에는 벨기에 최대의 광물 회사인 위니옹 미니에르 뒤 오 카탕가UMHK, ‘위니옹 미니에르’로 줄임도 있었다. 이런 기업인들은 근처 남쪽에 있는 영국 세력권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레오폴드빌의 행정 관할 아래에 있는 것보다 브뤼셀과 바로 연결되는 쪽을 원했다. 한 벨기에 외교관이 직통 라인을 놓았을 때 레오폴드빌과 엘리자베스빌은 파리와 이스탄불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레오폴 2세는 스스로 ‘발전의 전초기지’라고 부른 곳에서 20년 동안 끔찍한 통치를 자행함으로써 지난 세기 내내 비판받았다. 연이어 추문이 터지고 잔혹 행위에 대해 국제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벨기에 기득권층에서도 콩고 정책을 두고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레오폴 2세는 1908년 마지못해 자신의 ‘영지’를 벨기에 정부에 내주게 된다. 개혁가와 정치인들은 식민 정부가 콩고인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그들의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판단했다.
벨기에령 콩고
정부가 국왕으로부터 콩고를 넘겨받고 벨기에가 정직한 ‘가게 주인’으로 거듭났지만 국가와 자본가 사이의 협정은 계속되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를 꾸준히 약화시켜 왔다. 하지만 마을이나 내륙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속한 부족에서 정체성을 찾았고 부족장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벨기에의 경제적 수요 또는 더 넓은 바깥세상의 매력 때문에 흑인들은 수 천 명씩 가족이 있는 집에서 자취를 감췄고 유럽인이 만든 도시로 흘러들어 갔다. 콩고의 양 끝에 있는 레오폴드빌과 엘리자베스빌, 내륙 깊숙한 곳의 코키야빌오늘날의 음반다카과 스탠리빌키상카니, 룰루아부르카낭가 같은 도시들이다. 아프리카인에게는 숙소가 주어졌고 의료 서비스가 지원되었으며, 벨기에인들이 생각하기에 아프리카인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사회적 환경이 제공되었다. 유럽인들은 식민지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그들이 처한 위치와 단순한 노동을 가르치기 위해 초등학교를 지었다. 기이한 보호 통치가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에서 꽃을 피웠다. 물론 벨기에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권리나 고등교육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처사는 유럽인들을 이주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카탕가와 키부의 몇몇 백인 농장주들은 콩고를 고향이라고 불렀지만 진짜 주인이든, 대리인이든 모두 대개 몇 년 만 콩고에 머무르다가 영구 귀국 전 긴 휴가를 위해 벨기에로 돌아가곤 했다. 나중에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시민의식이 싹틀 무렵 모든 사람들은 흑인만의 정치 조직체를 떠올렸다. 벨기에는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죄다 시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만약 ‘시민’이라는 말이, 개인이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고 참여할 수 있으며 그 체제를 따르는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콩고에는 여전히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감독 기관이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20세기 초까지 식민지 콩고가 가져다준 자부심은 벨기에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남부 왈롱 지방과 네덜란드어를 쓰는 북부 플랑드르의 문화적 간극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벨기에에서는 국제 언어인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우세했지만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플랑드르 민족운동을 통해 네덜란드어의 공신력이 높아졌다.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공식언어인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벨기에인 다수는 태어날 때부터 플랑드르어를 배우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플랑드르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 더 나은 직업을 찾기가 어려웠고, 그들이 느끼던 열등감을 때때로 지배받는 아프리카인들에게 풀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식민주의자들 사이에 문화적 평화를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어를 쓰는 백인으로서 흑인과 다른 도덕적 우월함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콩고에서 플랑드르 지방 출신과 왈롱 지방 출신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켜 주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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