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귀지
나는 외로움이 뭔지 잘 모른다. 대체로 늘 그랬으니까. 나는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늘 그래 왔으니까. 내 모어는 수화다. 아기 때부터 엄마와 수화로 대화를 나눴고 수화로 세상을 배웠다. 입술의 모양과 손짓과 눈빛으로 대화하는 것은 아름답다. 뜨개질하듯이 손으로 말을 엮는 게 좋고, 서로의 눈과 입술을 보며 집중하는 게 좋다. 그 순간엔 세상에 단둘만 있는 느낌이다.
나는 가끔 수화로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이 없어도 수화를 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정리된다. 나 자신과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수화로 혼잣말을 하며 걸어가는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손안에 투명한 새 한 마리를 기르는 느낌으로 수화를 하며 걸어 다닌다. 새를 쓰다듬듯이.
내 귀가 안 들린 기간은 십칠 년 오 개월 하고도 일주일쯤 된다. 태어난 지 열 달쯤 되었을 때 까닭 모를 고열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귀가 안 들린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구조적으로 귀에 딱히 문제는 없는데 태어날 때부터 달팽이관이 소리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 귀가 안 들리는 이유를 물으면 엄마는 언제나 고래처럼 귀지가 많아서라고 했다. 고래는 평생 귓속에 귀지를 쌓아 둔다고 한다. 이동기와 번식기에는 두께와 색이 달라지는데 그래서 나이테처럼 살아온 이력이 귀지에 그대로 새겨진다고 한다. 고래처럼 내 귀지에도 살아온 이력이 새겨지고 있을까? 언젠가 내 귀지가 그동안 수집해 온 소리를 모두 쏟아 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나는 살아왔다.
나의 출생에 관해서는 약간의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나는 서울 시내 대학이 몰려 있는 지역의 오래된 주택가에서 할머니와 고모, 엄마와 같이 살았다. 나는 엄마가 있다. 태어난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리고 아빠도 있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빠라고 짐작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아빠와 아빠의 일란성 쌍둥이 형제인데, 둘 중 한 명이 아빠다. 그건 확실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누가 아빠인지는 모른다. 유전자 검사를 해도 둘은 일란성 쌍둥이니까 친아빠일 확률은 같다. 자세한 내막이 궁금했지만, 우리 집에서 아빠에 대해 물어보는 건 금기 사항이다. 아무도 아빠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고 그들은 한 번도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서운한 적은 없었다. 부족한 것보다는 아예 없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이미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구름이 흘러가며 내는 소리, 물결이 번져 나가는 소리를 알고 있다. 상상 속에서 그 소리를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아빠도 만들어 냈다. 나의 아빠는 두 명이고, 그들은 자아가 연결된 쌍둥이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것을 느끼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그중 한 명은 화성 탐사단에 선발되어 화성에 세운 비밀 기지에서 살기 위해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적응 훈련을 받고 있다. 또 한 명은 콜롬비아의 메데인 카르텔의 제조 팀장으로 카리브해 깊숙이 숨겨진 잠수함에서 코카인을 제조하고 있다. 아마 돈을 버느라 너무 바빠서 나를 찾아올 시간이 없을 것이다. 나의 아빠는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상상이 아닌 몇 가지 사실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아빠는 단 한 번도 나를 때리거나 야단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는 좋은 아빠였다.
내게 수지란 이름을 지어 준 것은 고모였다. 한자로 빼어날 수秀에 알 지知를 쓰기로 정했다. 그런데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채 출생 신고를 하러 간 고모는 ‘수’의 한자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빼어날 수秀 대신 손 수手를 적고 왔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내 이름은 손 수手에 알 지知, 손이 안다는 뜻이 되었다. 그 이름에 퍽 어울리게도 나의 최초 언어는 수화였다.
엄마와 대화할 때 쓰는 수화는 보통의 수화와 전혀 달랐다. 우리 집에서만 통용되는 일종의 외국어였다. 엄마가 나와 소통하기 위해서 그때그때 즉석에서 수화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데 해가 갈수록 점점 복잡해졌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었다면 체계적이었겠지만 운이 없게도 그러지 못했다. 단어가 늘어날수록 동작이 복잡해지다가 결국엔 손과 얼굴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를 모두 사용하는 기묘한 막춤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단어만 반복해서 쓰게 되고 그 몇 개의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갖게 되었다. 가령 수화로 ‘작은 의자’라는 단어는 엄마 방에 있던 화장대 의자를 뜻했고, 그건 엄마가 곧 집 밖에 나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 내가 잘못했을 때 앉아 있어야 하는 의자이기도 해서 반성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 나는 미안하다는 의미로도 그 단어를 사용했다. 동시에 엄마를 뜻하기도 했다. ‘큰 의자’라는 단어는 할머니가 앉는 큰 의자를 의미했고 할머니를 뜻하면서 식사 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음식을 다 먹어 치운 ‘빈 접시’는 좋다는 뜻도 있었다. 주로 집에 있는 사물들을 수화로 바꾸어 사용했다.
그 수화는 우리 집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이 수화로 사전을 만든다면 우리 집의 도면이 될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작은 의자-달-달-구름-접시-접시-책장-문-식탁-서랍장-마루-벽장-마당의 향나무. 이것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였고, 그것만으로도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되었다. 여기엔 우리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미묘한 농담이 있고, 뉘앙스가 있었다. 수화로 전달되는 섬세한 감정과 농담을 말로는 전할 수 없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우리 둘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세상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했다.
수화로도 즉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한국어를 힘들게 배웠다. 수화로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그걸 글자로 옮겼다가 다시 사물을 지시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은유나 추상이란 개념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게 세상의 기본값이었고 은유나 추상이 아닌 것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엄마도 나처럼 듣지 못하는 줄 알았다. 엄마는 말도 거의 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아닌 걸 알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정말 컸다.
내가 나고 자란 할머니 집은 오래된 동네의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시멘트로 널찍하게 만든 층계를 열아홉 계단 올라가면 작고 낡은 녹색 철문이 있고, 그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있고, 건물 두 채가 디귿 자 모양으로 맞닿아 있었다. 우리 집은 오른쪽에 위치한 단층 한옥이었다.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루가 있고, 세 계단쯤 내려가면 좁고 긴 부엌과 세 개의 방이 나왔다. 나무 창틀에 창호지를 댄 커다란 미닫이창이 방마다 있는 1960년대식 집이었다. 왼쪽 건물은 2층짜리 기역 자 모양의 공동 주택으로 바깥쪽은 붉은색 벽돌로 마감했고, 마당 쪽 외벽은 흰색과 검은색 타일을 붙여 모양낸 1980년대 스타일의 집이었다. 이 건물 1층엔 부엌 겸 욕실이 딸린 단칸방이 세 개, 2층엔 하숙생 방 네 개가 있었다. 이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와 하숙비가 우리 집의 주 수입원이었다. 조금씩 필요에 따라 수십 년간 불법 증축과 수리를 거듭해서, 두 건물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막상 제대로 된 공간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비계획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엷은 회색으로 칠한 안쪽 벽은 들떠서 조각조각 부서져 비듬처럼 떨어지고 있었고, 마루 앞 공간을 덮고 있는 반투명 슬레이트 지붕은 군데군데 깨져서 빗물이 샜고, 그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 아랫부분은 흰개미가 갉아 먹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쓸모없는 공간이 많다는 건 빈틈이 많다는 뜻이고, 빈틈이 많다는 건 숨을 공간이 많다는 뜻이다. 엄마는 내가 숨는 걸 싫어했다. 엄마와 나만의 수화로 듣는다고 하면 숨는다는 뜻이었다. 나무 위든 다락방이든. 누가 불러도 못 들을 테니까 절대로 숨으면 안 된다고 엄마는 수화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옥상에 있을 때, 벽장 안에 앉아 있을 때 내가 못 들어도 괜찮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아무도 나를 못 보니까. 그런 곳이라면 누구라도 들리지 않는 느낌이 될 테니까. 벽장 안에 숨어 있을 때마다 막혀버린 귀 안쪽에 나 자신이 통째로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그곳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대문 밖으로 혼자 나간 적이 없다. 그러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어른들이 겁주기도 했지만, 나갈 필요가 없기도 했다. 집 안에 모든 것이 있었다. 친구만 빼고. 할머니, 엄마, 고모와 하숙생들 대여섯 명까지. 대식구였다. 밥을 긴 식탁에 가득 차려서 함께 먹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밥을 1부, 2부로 나눠서 먹을 때도 있었다. 하숙생은 대부분 우리 집 앞에 있는 대학교에 다녔다. 하숙생들 방엔 컴퓨터와 많은 책들이 있었다. 기타와 스프링이 달린 이상한 운동 기구도 하나씩 있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모두가 알 수 없는 단어들로 빠르게 대화했다. 아무리 쳐다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방이든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었고, 어떤 대화에도 끼어들어 옆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순 없었다. 그들은 나를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귀염을 받았지만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다. 나는 강아지처럼 사랑받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내게 크고 헐렁한 옷을 입혔다. 작은 옷을 입히면 그 옷에 맞춰서 내가 자라나지 않을까 봐 걱정된다는 듯이. 바닥에 끌리는 긴 잠옷 같은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나를 하숙생들은 꼬마 유령이라고 불렀다. 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세상에 조금 삐쳐 있는, 적당히 행복한 꼬마 유령이었다.
유치원도 안 다녔던 내가 하는 일이라곤 온종일 하숙생들 방과 옥상과 부엌과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는 것뿐이었다. 잘 시간이 되면 혼자 씻고 방으로 가서 누웠다. 그러면 엄마가 내 옆에 누워서 하루 동안 보고 느낀 것을 수화로 들려주었다. 나 역시 일기를 쓰듯 내가 본 걸 엄마에게 들려주었다. 엄마가 꾸벅꾸벅 졸면 엄마의 손을 들어서 내 손을 감싸게 했다. 눈을 감으면 내 얘기를 들을 수가 없으니 손으로라도 들으라고. 들으면서 잠이 들라고. 마치 엄마와 나의 뇌를 동기화하는 과정 같았다.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 배 속에서 살았던 시절의 연장 같았고 우리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했다. 내가 비교적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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