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제1부 l 감정의 분출
l 제1장 l 소설을 읽고 평등을 상상하다
『사회계약론』을 출간하기 한 해 전에 루소는 베스트셀러 소설 『신新엘로이즈』(1761)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현대 독자는 서한소설이 참기 힘들 만큼 느리게 진행된다고 느끼겠지만 18세기 독자들은 그것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소설의 부제는 그들의 기대감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중세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암울한 사랑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2세기 철학자이자 가톨릭 성직자인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elard는 제자인 엘로이즈Héloïse를 유혹한 대가로 그녀의 삼촌에 의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름 아닌 거세였다. 그후 영원히 격리된 채로 두 연인은 내밀한 서신을 교환했다. 이 서신들은 수 세기에 걸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루소가 현대화한 모작은 처음에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듯했다. 신엘로이즈, 즉 쥘리 또한 그녀의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지지만 권위적인 아버지의 요구에 못 이겨 무일푼의 생 프뢰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적 있는 중년의 러시아 군인 볼마르와 결혼한다. 그녀는 생 프뢰에 대한 열정을 넘어 그를 단순히 친구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녀가 물에 빠진 어린 아들을 구해낸 후 죽어갈 때 드러난다. 과연 루소는 그녀가 아버지와 배우자의 권위에 굴복한 것을 축하하려 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희생시킨 그녀의 삶을 비극적으로 묘사한 것일까?
이 줄거리는, 심지어 그 모호성을 감안하더라도, 루소의 독자들이 경험한 감정의 폭발을 거의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등장인물, 특히 쥘리와의 강한 동일시였다. 루소가 이미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이래, 그의 소설 출간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는 그가 소설의 몇몇 장을 다양한 친구들에게 낭독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볼테르는 그것을 “볼품없는 쓰레기”라고 조롱했지만,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공동편집자인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는 루소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책을 “먹어치웠다”고 말했다. 그는 루소에게 “사람들이 감성과 열정에 관해 그토록 많이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별로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검열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학자들의 저널』Journal des Savants은 이 작품의 여러 결함과 심지어 지루하게 늘어지는 몇몇 문단들을 지적하면서도 오직 냉혈한만이 “그처럼 영혼을 강탈하고 폭압적으로 쓰디쓴 눈물을 뽑아내는 감정의 분출”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도판 1)
쥘리가 죽어 있는 침대
이 장면은 『쥘리』 또는 『신엘로이즈』에서 다른 어떤 장면보다 비탄을 자아냈다. 유명한 예술가 장 미셸 모로Jean-Michel Moreau의 스케치에 바탕을 둔 니콜라 들로네Nicholas Delaunay의 판화작품은 『루소 선집』 1782년판에 등장했다.
궁정인, 성직자, 장교, 그리고 각계 일반인 들은 루소에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감정, 그들이 느낀 “감정 이상의 감정, 비상飛上 이상의 비상”이라고 적어 보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쥘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고 오히려 “동물이 포효하듯 비명을 질렀다”고 회고했다.(도판 1) 20세기의 한 비평가가 논했듯이, 18세기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 환각, 경련, 오열’을 체험했다. 영역본은 불어판이 나온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출간되었으며 1761년부터 1800년 사이에 10쇄나 찍혔다. 같은 기간에 불어판은 115쇄나 출간되었다. 이는 다국적 불어 독자층의 왕성한 독서열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신엘로이즈』를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새로운 공감의 형식을 창출했다. 비록 루소가 ‘인간의 권리’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 사랑, 미덕이라는 궤도를 회전하는 그의 소설에서 인권은 주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쥘리는 등장인물들과의 매우 강렬한 동일시를 자극했고, 그럼으로써 독자들이 계급, 성, 민족적 경계를 넘어 공감할 수 있게 했다. 18세기 독자들은, 그 이전 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과 가깝고 가장 닮은 사람들―직계 가족, 친척, 같은 교구의 신자들, 일반적으로 동일 신분의 사람들―에게 공감했다. 그러나 18세기 사람들은 더 넓게 규정된 경계를 넘나들며 공감하는 법을 점차 배워갔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볼테르의 비서에게 들은 뒤샤틀레Duchátelet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녀는 “시종들이 인간이라는 확실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벗었다. “인권이란 시종들도 인간으로 보일 때만이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소설과 공감
『신엘로이즈』 같은 소설은 개인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했던 평범한 등장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만들었다. 독자들은 이야기 형식 그 자체의 효과로 등장인물, 특히나 여걸과 호걸에 공감했다. 허구적인 서신 교환을 통해 서한소설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심리를 가르쳤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질서의 토대를 닦았다. 소설에서 중산계층인 쥘리는 물론, 새뮤얼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의 소설에 나오는 여걸이며 그 이름이 소설 제목이기도 한 파멜라 같은 시녀마저, 그녀의 고용주이며 자칭 유혹남인 미스터 B 같은 부자들과 동등하고 심지어 더 나은 사람으로 나온다. 소설은 모든 사람이 내면적 감정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소설이 자율의 욕구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처럼 이야기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통해 소설 읽기는 평등과 공감의 감각을 창출해냈다. 심리적 동일시를 자극하는 18세기의 위대한 소설 세 편―리처드슨의 『파멜라』Pamela(1740)와 『클라리사』Clarissa(1747∼48), 그리고 루소의 『신엘로이즈』(1761)―이 ‘인간의 권리’ 개념이 등장하기 직전에 출간된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공감이 18세기의 발명품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감 능력은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뇌의 생물학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인들의 주관성을 이해하고 그들의 내면적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같다고 상상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에 의존한다. 예컨대, 자폐증에 시달리는 아동은 얼굴 표정에서 감정을 유추하는 데 곤란을 겪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주관적 상태를 타인들과 관련짓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 자폐증의 특징은 타인들과 공감하는 능력의 결여이다.
모든 사람은 대개 어릴 적부터 공감하기를 배운다. 비록 필수적인 어떤 성향은 생물학적으로 제공되지만, 각 문화는 공감의 표현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한다. 공감은 오직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전한다. 따라서 상호작용의 형식은 나름의 방식들로 공감을 형상화한다. 18세기에 소설 독자들은 공감대를 확장하는 법을 배웠다. 책을 읽으며 전통적인 사회적 경계, 즉 귀족과 평민, 주인과 하인, 남성과 여성, 아마도 성인과 아동 간의 경계마저 넘어 공감했다. 그 결과 타인들―그들이 개인적으로는 모르던 사람들―을 자신처럼, 마치 동일한 내면적 감성을 지닌 존재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평등’은 깊은 의미를, 특히 정치적 성과를 전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천상에서 얻을 영혼의 평등은 이곳 지상에서의 평등한 권리와는 같지 않았다. 18세기 이전에는 기독교가 후자를 인정하지 않은 채 전자를 기꺼이 수용했다.
사람은 사회적 경계를 넘어 동일시하는 능력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획득했을 것이다. 소설 읽기만이 유일한 방식은 아니었으나 소설 읽기는 특별히 시의적절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특정 소설―서한소설―의 전성시대가 인권의 탄생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서한소설이라는 장르는 1760년대와 1780년대에 성행했으며 상당히 의아하게도 1790년대에 종말을 고했다. 온갖 소설이 그전부터 출판되고 있었지만 장르로서는 18세기에, 특히 리처드슨의 『파멜라』가 출간된 1740년 이후에야 자리 잡았다. 프랑스에서는 1701년에 8편, 1750년에 52편, 그리고 1789년에 112편의 소설이 발간되었다. 영국에서는 신간 소설의 수가 1710년 이후 1760년대 사이에 6배나 증가하였다. 1770년대에는 매해 30편가량의 새 소설이 발간되었고, 1780년대에는 40편, 그리고 1790년대에는 70편가량이 발간되었다. 독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소설은 보통 사람들을 사랑, 결혼 등 일상의 문제와 씨름하거나 출세 길에 오른 주인공들로 등장시켰다. 대도시에서는 심지어 머슴과 하녀들조차 소설을 읽을 정도로 문자해독률이 높아졌다. 비록 하층민들 사이에서 소설 읽기는 그때나 오늘날이나 여전히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프랑스 인구의 80%에 달하던 농민층은 문자해독력을 갖춘 사람들도 대체로 소설을 읽지 않았다.
독자층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18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와 톰 존스, 클라리사 할로와 쥘리 데탕주 같은 평범한 남녀 영웅들은 가족의 이름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에조차도 그러했다. 17세기 소설에서는 독보적인 주인공이었던 돈키호테나 클리브 왕자 같은 귀족들은 시종, 뱃사람, 중산층 소녀들(스위스 하급 귀족의 딸인 쥘리조차도 중산층처럼 보인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8세기에 나타나는 소설의 주목할 만한 상승세를 간파한 학자들은 여러 해에 걸쳐 이를 자본주의, 상승하는 중산계급, 공적 영역의 성장, 핵가족의 등장, 젠더 관계의 변전, 심지어는 민족주의의 출현과 관련지어왔다. 소설이 상승세를 탄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그 심리학적 효과와 그것이 인권의 등장과 연관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소설이 심리적 동일시를 고무하는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특별히 영향력이 컸던 세 편의 서한소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것은 루소의 『신엘로이즈』, 앞서 영국에서 출간된 전범 격인 리처드슨의 『파멜라』 그리고 『클라리사』이다. 나는 18세기 소설 일반을 아우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소설을 집필한 많은 여성들 및 톰 존스나 트리스트럼 샌디같이 주목을 끄는 남성 주인공들을 고려할 수도 있었겠으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문화적 영향력을 이유로 『신엘로이즈』, 『파멜라』 그리고 『클라리사』, 이상 3편의 소설에 집중하기로 했다. 남성이 쓴 이 소설들은 여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은 그 자체로 공감의 변화를 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들에 대한 반응을 더 세밀히 점검한다면 공감을 터득하는 방법을 파악할 수 있다. ‘소설’novel―18세기 후반에 작가들만 받아들인 명칭―에서 과연 새로운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어떻게 특정 작품이 독자들에게 작용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서한소설에서 행위의 밖과 저 위에 있는 권위적인 관점은 없다(그것은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에서 나타나는 관점이다). 권위적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서신들에서 드러나듯이 등장인물들의 관점이다. 서신의 ‘편집자들’은, 리처드슨과 루소가 자신을 그렇게 연출했듯이, 서신이 교환되는 와중에 작가의 존재가 흐릿해지게 함으로써 생생한 현실감을 창조해낸다. 이를 통해, 등장인물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하는 듯한 동일시 감각이 고양되었다. 많은 동시대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언급했는데, 그중 일부는 즐거움과 놀라움을, 다른 이들은 염려를, 심지어는 역겨움마저 드러냈다.
리처드슨과 루소 소설의 출간은 즉각 반응을 일으켰으며 이는 모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익명의 프랑스 남자는 1742년에 『파멜라』 불어판의 ‘탐욕스런’ 수용에 대해 상술한 42쪽의 편지를 출간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가 성직자였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파멜라』 한 권 없이는 집 안팎을 출입할 수 없다.” 비록 이 소설에는 많은 결함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지만, 독자는 고백한다. “나는 그것을 먹어치웠다.”(‘먹어치우기’devouring는 이 소설들을 읽었다는 뜻으로 당대의 가장 일반적인 은유였다.) 그는 고용주인 미스터 B의 공세에 맞선 파멜라의 저항을 실제 인물의 갈등인 양 묘사했다. 이 독자는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는 파멜라가 위험에 처할 때는 전율을 느꼈고 미스터 B 같은 귀족 신분의 등장인물이 품위 없는 행동을 할 때면 분노를 느꼈다. 그가 선택하는 단어와 언어 구사 방식은 독서로 인한 감정적 몰입을 증폭시킨다.
편지로 구성된 소설은 그처럼 두드러진 심리적 효과를 낳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 형식이 ‘등장인물’, 즉 내면의 자아를 지닌 인격체의 발전을 촉진시켰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파멜라』의 초기 서신들 중 하나에서 우리의 여걸은 어머니에게 고용주가 자신을 어떻게 유혹하려 드는지 묘사했다.
… 그는 두 번인가 세 번 제 입술을 뺏었어요. 겁나도록 탐욕스럽게 말이에요. 결국 저는 그를 밀쳐버리고 여름별장에서 뛰쳐나왔지요. 하지만 그는 다시 절 낚아채고는 문을 잠가버렸어요. 하마터면 제 삶을 돈 몇 푼의 가치에 팔아버릴 뻔했지요. 그는 말했어요.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파멜라. 나를 겁내지 마. 저는 말했어요. 난 머물지 않겠어요. 머물지 않겠다고, 이런 말괄량이 같으니! 그가 말했죠. 너는 네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전 외경심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존경심도요. 그래서 말했어요. 그래요. 나는 알아요, 주인 양반, 아주 잘 말이에요. 제가 댁의 시녀라는 걸 잊어버릴 수도 있겠죠. 주인에게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댁이 잊어버린다면 말이죠. 전 흐느끼고 엉엉 울었답니다. 가장 슬프게. 이런 얼빠진 말괄량이가 있나! 그가 말했어요. 내가 너를 해치기라도 했단 말이냐? 전 말했어요. 예, 주인 양반. 세상에서 가장 큰 해를 입혔어요. 당신은 내게 나 자신을, 내게 속한 것을 잊어버리라고 가르쳤지요. 그리고 운명이 만든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가르쳐주었지요. 당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면서, 가엾은 시녀에게 그렇게 마음대로 하시면서.
(도판 2)
미스터 B가 파멜라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읽는다
소설 도입부의 한 장면에서 미스터 B는 파멜라에게 달려들어 그녀가 쓰고 있는 편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쓰는 행위야말로 그녀의 자율성을 위한 수단이었다. 예술가들과 출판업자들은 주요 장면을 시각적으로 변형하는 데 개의치 않았다. 네덜란드 예술가 얀 푼트Jan Punt가 제작한 이 판화는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초기 불어판에 수록되었다.
우리는 그녀의 어머니와 더불어 그 편지를 읽는다. 우리와 파멜라 사이에는 어떠한 화자도, 어떠한 인용부호도 놓여 있지 않다. 우리는 파멜라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사회적 거리가 잠시 소멸되고 그녀의 자기 소유가 위협 받는 것을 함께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도판 2)
비록 그 장면은 많은 연극적 특성들을 담고 있고, 편지 속 파멜라의 어머니를 위한 자리를 남겨두긴 했지만 연극과는 또 다르다. 파멜라가 자신의 감정을 상당히 풍부하게 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 그녀는 탈출 계획이 무산되자 자살을 감행할지를 고민하는 편지를 쓴다. 이와 대조적으로, 연극은 대개 무대 위에서 행위나 말을 통해 내면적 자아의 상태를 암시하므로 그것을 서한소설의 방식대로 시시콜콜 다룰 수가 없다. 수백 쪽에 달하는 소설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리고 자아 내부의 시각으로 한 인물을 드러낼 수 있다. 독자는 그저 파멜라의 행동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글로 표현하는 인격의 개화에 동참한다. 독자는 동시에 파멜라가 된다. 자신을 그녀의 친구나 외부 목격자로 상상하는 동안에도 말이다.
1741년 리처드슨이 『파멜라』의 저자임이 알려지자마자(그는 익명으로 출간했다) 그는 편지들을 받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열광적인 독자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그의 친구 에어런 힐Aaron Hill은 편지에서 “종교의 정수, 잘 길러진 품성, 사리분별, 선한 본성, 위트, 기발함, 건전한 사고, 그리고 도덕성”을 부각시켰다. 리처드슨은 1740년 12월 초 책 한 권을 힐의 딸에게 보냈고 힐은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난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책을 읽어주기만 했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다시 그것을 내게 읽어주는 걸 듣지.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말일세. 그리고 나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 주님께서야 이 상태가 언제 끝날지를 아시겠지. … 그것은 밤새 공상을 펼치게 하네. 책의 모든 장들이 마력을 갖고 있네그려. 열정과 의미라는 마력 말일세.” 그 책은 독자에게 일종의 주문을 던졌다. 소설의 이야기―서신 교환―는 예기치 않게도 그들을 자신에게서 떼어내 새로운 경험으로 휩쓸고 갔다.
힐과 그의 딸뿐만이 아니었다. 『파멜라』는 영국을 곧 광기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한 마을에서는 미스터 B가 결국 파멜라와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교회 종을 울렸다고 한다. 2쇄는 1741년 1월에 출간되었고(초판은 1740년 11월 6일에 나왔다), 3쇄는 3월, 4쇄는 5월, 그리고 5쇄는 9월에 나왔다.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초판에 대한 패러디, 장문의 비평, 시, 모작模作을 썼다. 그리고 수년에 걸쳐 작품이 여러 차례 연극무대에 오르고 주요 장면이 회화나 판화로 묘사되었다. 1744년 불역본이 교황청 금서 목록에 올랐고, 곧 루소의 『신엘로이즈』도 많은 계몽주의 저작들과 더불어 이에 합류했다. 이 소설에서 힐이 보았다고 주장한 ‘종교의 정수’나 ‘도덕성’을 모두가 찾지는 못했던 것이다.
리처드슨이 1747년 12월 『클라리사』를 출판하기 시작했을 때, 기대감은 고조되었다. 마지막 권이 1748년 12월에 나올 때까지(총 7권으로 각 권이 300∼400쪽에 달했다) 리처드슨은 해피엔딩을 간청하는 편지들을 받았다. 클라리사는 집안에서 맺어준 지긋지긋한 구혼자를 피하기 위해 호색한 러브레이스Lovelace와 도주를 감행한다. 그러고 나서 자신에게 약을 먹인 후 강간하려는 러브레이스를 떨쳐내야 한다. 러브레이스의 참회와 구혼, 그리고 그에 대한 미련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는 죽는다. 호색한이 그녀의 정조와 자존심을 강탈하려 했기에 비탄에 빠진 채로. 도로시 브래드섀이Dorothy Bradshaigh 여사는 죽음의 장면을 읽으면서 받은 자신의 감흥을 리처드슨에게 자세히 전했다. “저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울음을 터뜨리곤 하지요. 오늘 아침식사 때도 그랬고 바로 지금 또 그러네요.” 시인 토머스 에드워즈Thomas Edwards는 1749년 1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일생 동안 그 사랑스런 소녀에게 느낀 것만큼 크나큰 비탄에 빠져본 적이 없다.” 그는 일찍이 “성스런 클라리사”라고 언급한 바 있다.
『클라리사』는 일반 대중보다는 지식층 독자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13년 동안 5쇄가 나왔고 곧 불어판(1751), 독어판(1752), 네덜란드어판(1755)이 발간되었다. 프랑스에서 1740∼60년에 만들어진 개인 서고에 대한 어느 연구는 『파멜라』와 『클라리사』가 세 편의 영국 소설(헨리 필딩Henry Fielding의 『톰 존스』가 여기에 포함된다) 중에서 가장 많은 서고들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보고했다. 일부 독자들은 『클라리사』의 많은 분량 때문에 중도에 읽기를 포기했다. 리처드슨은 심지어 초고 30권이 인쇄에 들어가기 전부터 걱정이 앞서 지면을 줄이려 한 적도 있었다. 파리의 한 문예 소식지는 이 책의 불역본에 관해 상반된 평을 내놓았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가장 강렬한 쾌감과 가장 심한 지루함이었다.” 하지만 두 해가 지나 다른 주장이 나왔다. 많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성격을 그려내는 리처드슨의 천재성이 클라리사를 “아마도 이제까지 인간의 손으로 쓰인 가장 놀라운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소설이 리처드슨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믿은 루소도 『클라리사』를 자신의 소설 다음으로는 최고라고 평가했다. “그 누구도, 어떤 언어로도 『클라리사』에 필적하거나, 심지어 거기에 근접만이라도 하는 소설조차 쓰지 못했다.” 『클라리사』와 『신엘로이즈』의 비교는 18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잔느 마리 롤랑Jeanne-Marie Roland은 혁명기에 지롱드파의 장관이자 비공식 조정자였던 인사의 아내였는데, 1789년 친구에게 고백하길, 루소의 소설을 매년 다시 읽었으나 여전히 리처드슨의 작품이야말로 완전함의 극치라고 했다. “세상에서 『클라리사』와 견줄 소설을 써낼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그 작품이야말로 이 장르의 백미이자 견본이며 모든 모방자에게 실패를 안겨준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걸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루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남성들, 심지어는 고위급 군인들마저 쥘리에게 강렬하게 반응했음을 알 수 있다. 퇴역 장성인 루이 프랑수아Louis François는 루소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저로 하여금 그녀에게 미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저로부터 짜낸 눈물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 저는 여태 그토록 달콤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은 너무나 강렬한 효과를 불러일으킨 나머지 절정의 순간에는 그만 행복하게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일부 독자는 여걸과 자신을 동일시했음을 인정했다. 곧 명성을 얻게 될 출판업자 팡쿠크C. J. Panckoucke는 루소에게 말했다. “저는 온 가슴으로 쥘리가 품은 감정의 순수함을 느꼈습니다.” 심리적 동일시는 공감으로 이어져 성별 경계를 넘어섰다. 루소의 작품을 읽은 남성 독자들은 쥘리와의 이별을 강요당한 연인 생 프뢰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고, 쥘리의 순한 남편 볼마르나 그녀의 위압적인 부친 데탕주 남작에게도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여성 독자들처럼, 남성 독자들도 자신을 쥘리와 동일시했던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고 고결한 삶을 살고자 한 그녀의 투쟁은 바로 그들 자신의 투쟁이 되었다.
서한소설은 그 형식을 통해 자아가 ‘내면성’(내면의 핵심을 보존한 것)의 수준에 달려 있음을 웅변했다. 여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한다. 이에 더하여 서한소설은 모든 자아가 이러한 내면성을 갖고 있으며(등장인물 중 다수가 글을 쓴다), 어느 정도는 동등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서신 교환은 예컨대 시녀 파멜라를 짓밟힌 자의 전형이 아닌 자긍심을 지닌 자율적 개체의 전범으로 변모시킨다. 파멜라와 마찬가지로 클라리사와 쥘리도 개인성 그 자체를 대변한다. 독자는 그들 자신과 다른 개체들이 가진 내면성의 능력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 소설들을 읽은 모든 이가 같은 감정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만담가인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은 리처드슨의 “지루한 탄식”이 “서적 판매상이 고안한 고급스런 삶의 형상들이며 감리교 목사나 축성할 연애담이다”라며 조롱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리처드슨과 루소가 문화의 급소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음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클라리사』의 마지막 권이 출간된 지 한 달 후, 리처드슨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의 남매이자 그녀 자신이 성공한 소설가인 세라 필딩Sarah Fielding은 이 소설을 변호하는 56쪽 분량의 소책자를 익명으로 발간했다. 비록 그녀의 오빠인 헨리 필딩이 『파멜라』에 대한 첫번째 비방문 중의 하나(『‘파멜라’라고 불리는 책에 담긴 악명 높은 숱한 오류와 잘못된 재현들을 폭로하고 반박하는, 샤멜라 앤드루스 여사의 생을 위한 변명』, 1741)를 출간했지만 그럼에도 세라는 리처드슨과 좋은 친구가 되었고 그는 그녀의 소설 중 한 권을 인쇄하기도 했다. 그녀가 창조한 허구적 인물인 클라크 씨는 자신을 환영의 그물망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리처드슨이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나로서는 모든 할로 양들(원문대로)과 친밀한 듯싶다. 마치 내가 그들을 어린 시절부터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다른 등장인물인 깁슨 양은 리처드슨의 문학적 기예를 칭송했다. “정말 진정으로, 선생님, 당신은 그처럼 언급하시는군요. 이러한 방식으로 말해지는 이야기는 천천히 진행될 수밖에 없고, 등장인물들은 오로지 전체에 엄밀히 주목함으로써만 드러나게 된다고. 하지만 저자는 현제시제 그리고 일인칭으로 글을 씀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얻습니다. 그로 인한 타격은 즉각 심장을 꿰뚫고 우리는 그가 그려낸 모든 비애를 느낍니다. 우리는 『클라리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울지요. 그리고 그녀와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고난을 겪어나간답니다.”
스위스의 이름난 생리학자이며 문학자인 알브레히트 폰 할러Albrecht von Haller는 1749년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azine에 익명으로 『클라리사』에 대한 비평문을 실었다. 할러는 리처드슨의 독창성을 변호하고자 분투했다. 비록 이전 프랑스 소설들이 많은 미덕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이들이 “대개 저명인사들의 고명하신 행위들을 재현하는 데 그친” 데 반해, 리처드슨의 소설에서는 독자가 “우리 자신의 삶과 동일한 단계에 놓인” 등장인물을 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 스위스 학자는 서한의 구성에 면밀히 주목했다. 비록 독자들은 모든 등장인물이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과 사고 전반을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기록한 것을 허구적이라 여기긴 했지만, 서한소설은 각 등장인물의 성격을 세밀히 묘사함으로써 할러가 연민이라고 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비극은 결코 그 같은 힘으로 제시된 적이 없었던바, 이는 클라리사의 죽음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접하면 가장 완고하고 무감각한 기질마저 연민으로 순화되고 눈물에 젖어드는 수많은 예에서 명백해진다.” 그는 결론지었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쓰였건 그에 버금갈 만한 작품을 갖고 있지 않다.”
타락 또는 고양?
당대인들은 이러한 소설을 읽는 것이 정신보다도 육체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았으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구교와 신교 성직자들은 천박함, 유혹, 그리고 도덕적 타락이 내재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일찍이 1734년에 소르본대학 출신의 사제 니콜라 랑글 뒤프레누아는 비록 익명으로라도 소설을 변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국이 소설을 “우리 안에 너무나 생생하고 두드러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처럼 많은 들쑤심” 운운하며 금지하려 들자 이에 대한 모든 논의를 집요하게 반박했다. 소설은 어느 시대에나 적합했다고 주장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에나 경신輕信, 사랑, 그리고 여성이 지배해왔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에도 소설이 계속 쓰여짐으로써 풍취를 돋우었다.” 소설을 전적으로 탄압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잘 만드는 데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그는 제안했다.
소설이 쏟아져나온 세기 중반에도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1755년에 다른 가톨릭 사제 아르망 피에르 자캥Armand-Pierre Jacquin 신부는 400쪽에 달하는 글을 통해 소설 읽기가 도덕성, 종교, 그리고 모든 사회질서의 원리를 손상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장한다. “이 작품들을 읽어보시오. 그중 대부분에서 신적인 권리와 인간의 정의가 위반되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위가 조롱받고, 결혼 및 우정의 신성한 유대가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위험성은 바로 그것들이 지닌 매력에 숨어 있었다. 소설은 끊임없이 사랑의 유혹을 던짐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가장 나쁜 충동을 행동에 옮기도록, 부모와 교회의 충고를 거부하도록, 공동체의 도덕적 비난을 무시하도록 부추겼다. 자캥 신부가 제공할 수 있던 유일한 위안거리는 소설에 지속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독자는 처음에는 소설을 탐독하지만 그것을 결코 다시 읽지는 않는다. “소설 『파멜라』가 곧 잊힐 것이라는 나의 예견이 틀렸던가? … 3년 안에 『톰 존스』와 『클라리사』도 마찬가지 운명이 될 것이다.”
유사한 불평이 영국 신교도의 펜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비체시무스 녹스Vicesimus Knox 목사는 몇 십 년간 지속된 불안을 1779년에 들어 요약 정리했다. 그는 소설이야말로 퇴화되고 죄에 물든 쾌락으로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더 진지하고 교육적인 독서로부터 이탈시킨다고 주장했다. 영국 소설들의 증가는 프랑스식 방탕벽을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될 뿐이며 작금의 부패를 드러낼 뿐이었다. 녹스는 리처드슨의 소설이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는 인정했지만, 불가피하게도 저자는 미덕과는 양립할 수 없는 장면을 상술하고 또 그러한 감정을 자극했다고 꼬집었다. 소설을 이처럼 경멸한 것은 성직자들만이 아니었다. 1771년 『레이디스 매거진』Lady’s Magazine에 실린 한 편의 시는 널리 공유되던 생각을 요약해놓았다.
파멜라라는 이름 석 자만큼은
그 이상 더 잘 알 수는 없겠지.
내가 혐오하는 소설들 때문에
내 마음이 때 묻지는 않았네.
많은 도덕주의자들은 소설이 특히 하인과 소녀들의 마음에 불만의 씨를 뿌릴 거라고 우려했다. 스위스의 물리학자 사무엘 오귀스트 티소Samuel-Auguste Tissot는 소설 읽기를 자위행위와 관련지었다. 자위행위는 물리적, 정신적, 그리고 도덕적 퇴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티소의 생각이었다. 그에 따르면, 육체는 자연적으로 퇴화하는데 자위행위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 과정을 단축시킨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빈둥거림, 무기력, 잠자리에 지나치게 오래 있는 것, 아주 부드러운 침대, 풍성하고 양념이 많이 들어가고 소금간이 되어 있고 포도주가 가득한 정찬, 의심스런 친구들, 그리고 음란서적들이야말로 이 같은 무절제를 낳기 쉬운 원인들이다.” “음란”이라고 말했을 때 티소는 솔직히 포르노그래피를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에 ‘음란한’licentious이라는 말은 에로틱한 것과 관련이 있었으나 어감이 더 나쁜 ‘외설적인’obscene과는 구별되었다. 사랑에 관한 소설들은―18세기 소설의 다수는 연애담이었다―쉽사리 음란함의 범주에 편입되었다. 영국에서는 특히 기숙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이 그러한 “비도덕적이고 비위를 거스르는” 책들을 손에 넣어 침대에서 몰래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스러워 보였다.
사제들과 의사들은 소설 읽기를 시간, 생동감, 종교, 그리고 도덕성의 상실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그들의 가정에 따르면, 독자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소설 속에 나타나는 행위를 모방할 터였다. 『클라리사』를 읽은 여성 독자는, 클라리사처럼 가족의 소망을 저버린 채 싫든 좋든 그녀를 망치는 러브레이스 유의 호색한을 따라 도주하는 데 합의할 것이다. 1792년 익명의 영국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소설의 증가는 매춘의 증가와 수많은 간통 및 치정에 의한 가출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소설들은 육체를 과도하게 자극하고,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자기몰입을 부추길뿐더러 가정적·도덕적·종교적 권위를 파괴하는 행위를 조장했다.
리처드슨과 루소는 소설과 관련된 부정적인 평판을 피하기 위해 저자보다는 편집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리처드슨은 『파멜라』를 출간했을 때, 결코 소설이라 칭하지 않았다. 초판의 제목은 너무나 많은 주장을 한다. ‘파멜라: 또는 보상받은 덕성. 젊고 아름다운 댐즐이 그녀의 부모님께 보낸 가족 편지들: 청춘 남녀의 마음에 덕성과 종교의 원리를 고양시키기 위해 이제 처음으로 출간되다. 진리와 본성에 토대를 두는 동시에 흥미롭고 감동적인 여러 사건으로 쏠쏠한 재미를 주는 이야기는, 많은 부분에서 오락만을 꾀하여 그들이 훈육해야 할 마음에 불을 놓는 이미지들을 완전히(원문대로) 배제한다.’ 리처드슨의 ‘편집자’ 서문은 “다음과 같은 서신들”의 출판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서신들은 젊은이들의 정신을 계도하고 증진시키며, 종교와 도덕성을 고취하고 악덕을 “가장 적절한 색채로” 그려낼 것이다 등등.
비록 루소 또한 편집자로 자청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분명히 소설로 생각했다. 『신엘로이즈』의 서문 첫 문장에서 루소는 소설을 자신의 연극비평과 연결시켰다. “대도시에는 극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패한 사람들에게는 소설이.” 이 정도로는 충분한 경고가 아니라고 보았는지, 루소는 서문 제목을 ‘소설에 관한 편집자와 서신 집필자의 대화’로 정했다. 여기서 등장인물 ‘R’(루소)은 소설에 대해, 그것이 실제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창조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는 흔한 비난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불평을 듣는다. 나도 그렇게 믿고자 한다. 독자의 눈앞에 자기 것이 아닌 재산의 가식적 매혹을 끝없이 연출함으로써 소설은 그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것을 경멸하도록 이끌며, 상상 속에서 그들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이와 그것을 맞바꾼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결국 그렇게 믿고 마는데, 이는 미치광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그러고 나서 루소는 독자들에게 소설을 제공했다. 그는 심지어 대놓고 항거했다. 루소는 말했다. 누군가 소설을 썼다고 나를 비난하길 원한다면, 나를 제외하고 지상의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게 하시오. 나로서는 그러한 사람에 대해 어떠한 존경심도 갖지 않을 것이오. 루소는 기꺼이 인정했다. 자신의 책이 거의 모든 사람을 중상모략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뜨뜻미지근한 즐거움은 주지 않을 것이라고. 루소는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크게 기대했다.
리처드슨과 루소가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될 것을 염려했음에도 이미 일부 비평가들은 소설 작품들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내놓기 시작했다. 리처드슨을 변호하던 세라 필딩과 폰 할러는 『클라리사』를 읽음으로써 촉발된 공감 또는 연민에 주목했다. 이 새로운 견해에 따르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몰입하기보다는 타인을 더 많이 동정하게 했고, 그럼으로써 더 높은 도덕성을 고취했다. 소설을 가장 명석하게 변호한 사람 중 하나는 디드로로서, 그는 『백과전서』에서 자연권 항목을 집필했고 그 자신 소설가이기도 했다. 리처드슨이 1761년 사망했을 때, 디드로는 리처드슨을 고대의 위대한 작가들, 이를테면 모세, 호메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등과 비교하는 추도사를 썼다. 또한 디드로는 독자가 소설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에 대해 상술하기도 했다. “독자는 조심하면서도 그의 작품들에서 어떤 역할을 택한다. 당신은 대화에 빠져들고, 승인하고, 비난하고, 찬양하고, 착각하고, 분노를 느낀다. 나는 얼마나 여러 번 스스로 놀라지 않도록 제어했던가, 마치 극장에 처음으로 따라가서 우는 아이에게 충고하듯 말이다. ‘그것을 믿지 마라, 그는 너를 속이고 있어. … 네가 거기 간다면 너는 미아가 되고 말 거야.’” 디드로는 인정한다. 리처드슨의 이야기는 네가 거기에 있다는 인상을 창조한다. 더욱이 이것은 너의 세계이지, 머나먼 나라가 아니며, 이국적인 장소도 동화도 아니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실제 사회에서 취해 창조한 것이다. … 그가 묘사하는 고통은 나 역시 느끼는 것들이다.”
디드로는 ‘동일시’나 ‘공감’ 같은 용어는 쓰지 않았으나 무심코 그러한 감정을 묘사했다. 그는 인정한다. 당신은 등장인물들에게서 당신 자신을 본다. 상상력을 동원해 행위 속으로 비약한다. 당신은 등장인물들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간단히 말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고 당신이 직접 접할 수 없으며(당신 가족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동일시의 결정적 요소로서, 상상 속에서는 당신 자신이기도 한 누군가와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이 과정은 왜 팡쿠크가 루소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를 설명해준다. “저는 온 가슴으로 쥘리가 품은 감정의 순수함을 느꼈습니다.”
공감은 동일시에 근거를 둔다. 디드로는 리처드슨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자신을 불가항력적인 공감의 체험으로 이끌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감정 교육의 온실이었다. “단 몇 시간 만에 나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경험할 수 없을 만한 수많은 상황들을 거쳤다. … 나는 내가 뭔가를 경험했다고 느꼈다.” 디드로는 어찌나 강하게 동일시했던지 소설 말미에 이르러서는 망연자실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는 오랜 시간 지지고 볶으며 함께 살다가 이제 이별의 순간에 이른 사람이 느낄 법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홀로 놓인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디드로는 행동으로는 자아를 상실해버렸으나 독서로 자아를 되찾았다. 그는 이전보다 더 많이 자아가 분리된다고 인식하게 되었지만―그는 외로움을 느낀다―타인들이 자아를 갖는다는 인식 또한 전보다 강해졌다. 그러니까 ‘내면의 감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권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디드로는 더욱이 소설이 무의식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사람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충동에 의해 선함으로 이끌린다고 느낀다. 불의에 직면할 때, 당신은 자신에게조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낀다.” 소설은 명확한 도덕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효과를 낳는다.
픽션 읽기에 대한 가장 깊은 철학적 성찰은 헨리 홈Henry Home과 케임스Kames 경이 쓴 『비평의 요소들』Elements of Criticism(1762)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의 법률가와 철학자로서 소설 작품을 그 자체로 논하지 않고, 픽션 일반이 독자들로 하여금 묘사된 장면을 상상하도록 하는, 일종의 ‘이상적 현재’ 또는 ‘각성시키는 꿈’을 창조한다고 논증했다. 케임스는 이 같은 ‘이상적 현재’를 황홀경 같은 상태로 묘사했다. 독자는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자의식과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는 의식,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를 모두 잊고 모든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마치 그가 증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케임스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은 이러한 변화가 도덕성을 고무한다는 점이었다. ‘이상적 현재’는 독자로 하여금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감정을 열어놓게 한다. 개인은 자신의 사적인 이해를 벗어나 ‘관용과 호의의 행위’를 수행하도록 고무된다. ‘이상적 현재’란 곧 힐이 말하는 “열정과 의미의 마력”의 다른 용어였던 셈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명백히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 로버트 스킵윗Robert Skipwith은 제퍼슨 부인의 의붓 자매와 결혼한 사람인데, 제퍼슨에게 1771년 편지를 보내 추천도서 목록을 요청했다. 제퍼슨은 정치, 종교, 법, 과학, 철학과 역사에 걸쳐 고대와 근대의 많은 고전들을 추천했다. 제퍼슨은 그의 목록을 시, 연극, 소설로부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로렌스 스턴Lorence Sterne, 헨리 필딩,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Jean-François Marmontel, 올리버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 리처드슨, 그리고 루소 같은 이들의 작품과 케임스의 『비평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서 목록이 수록된 편지에서 제퍼슨은 ‘픽션의 여흥’에 관해 늘어놓았다. 케임스처럼 그도 픽션이야말로 덕성의 원리와 실천 모두를 부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셰익스피어, 마르몽텔, 스턴 등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제퍼슨은 그들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스스로 자애롭고 고마운 행위를 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경험하고 반대로 악행이나 비도덕적 행위를 역겹게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주장하길, 픽션은 역사책을 읽는 것보다 도덕적 경쟁의 욕구를 더 효과적으로 창출한다.
소설에 대한 견해들의 이러한 갈등에서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일상의 세속적 삶을 도덕성의 토대로 상향 평가하는 일이다. 소설 읽기를 비판하는 이들의 눈에는 소설의 여걸에 대한 동정심이야말로 개인에게서 최악의 것을 고무시키고(욕망과 과도한 이기심을 조장한다) 세속세계의 돌이킬 수 없는 퇴화를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공감을 통한 도덕화라는 새로운 관점을 가진 이들에게 그러한 동일시는, 열정을 고무하는 일이 개인의 내적 본성을 변화시키고 더 도덕적인 사회의 구현에 일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인간의 내적 본성이 사회적·정치적 권위의 토대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소설이 던진 마법의 주문은 광범위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 드러났다. 비록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소설의 지지자들은 리처드슨이나 루소 같은 저자들이 독자를 일종의 종교 체험에 해당하는 일상생활로 이끈다는 점을 이해했다. 독자는 일상의 감성적 밀도를 이해하고, 자신 같은 대중이 스스로 도덕적 세계를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권은 이 같은 감정들이 뿌려진 온상에서 자라났다. 인권은 오직 대중들이 타인들을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도록 배울 때에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허구적이긴 해도, 드라마에서만은 현재적이며 친숙하고 평범한 등장인물들과 자신을 조금이나마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평등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별난 운명
이 3편의 소설들에서 심리적 동일시의 초점은 남성 저자가 창조한 여성 등장인물이다. 물론 독자가 남성 등장인물과도 동일시했다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컨대 제퍼슨은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1759∼67)의 운명과, 스턴의 분신으로, 『감상적 여행』Sentimental Journey(1768)에 나오는 요릭의 운명에 도취되었다. 여류 작가들 또한 감동을 받은 남성과 여성 독자들에 속했다. 프랑스의 법률 개혁가 자크 피에르 브리소Jacques-Pierre Brissot는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계속 인용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국 소설은 단연 패니 버니Fanny Burney의 『세실리아』Cecilia(1782)였다. 그렇지만 버니의 예가 말해주듯이, 여성 주인공들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표방했다. 그녀가 쓴 3편의 소설 모두 각 작품에 나오는 여걸들의 지역적 특징을 지닌 이름에서 따왔으니 말이다.
여걸 캐릭터가 호소력을 지닌 까닭은 그들이 자립하길 바랐으나 이를 결코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부친이나 남편에게서 독립할 법적 권리가 거의 없었다. 독자들은 그러한 여성들이 피할 수 없던 압력을 잘 이해했기에 여걸들의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매우 통쾌하다고 느꼈다. 해피엔딩 사례로, 파멜라는 미스터 B와 결혼하고 자유에 대한 일정한 구속을 받아들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클라리사는 자신을 강간한 러브레이스와 결혼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쥘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거부하기 위해 아버지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지만 끝내는 죽고 만다.
일부 현대 비평가들은 이들 이야기에서 마조히즘이나 순교를 읽어내지만 당대인들은 다른 면을 보았다. 남성, 여성 독자들은 한결같이 이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는데, 이는 작중 여성들이 굳센 의지와 강렬한 개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단지 여걸들을 구해내기만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걸들처럼 되고 싶어 했고 심지어 비극적 죽음을 맞은 클라리사나 쥘리까지도 닮고 싶어 했다. 세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행동이 대개 부모나 사회가 부과하는 제한들에 맞서는 여성 의지의 표현이었다. 파멜라는 자신의 덕성과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미스터 B에 맞섰고 결국 승리를 끌어냈다. 클라리사는 같은 이유로 처음에는 가족, 그 다음은 러브레이스에게 맞섰고, 클라리사와의 결혼을 간절히 원했던 러브레이스는 퇴짜를 맞았다. 쥘리는 생 프뢰를 포기하고 볼마르와의 가정생활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투쟁은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각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은 여걸들의 독립에 대한 요구로 환원된다. 남성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단지 여성의 의지를 부각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여걸들과 동일시하는 독자는 모든 사람, 심지어 여성도 더 큰 독립을 추구한다는 점을 깨달았고 주인공의 심리적 분투를 상상 속에서 경험했다.
18세기 소설은 자율성에 대한 깊은 문화적 선입견을 반영했다. 18세기에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이 분야에서 획기적 변화를 이끌었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자유에 대해 말할 때, 표현의 자유든, 종교의 자유든, 아니면 루소가 『에밀』(1762)에서 훈계한 바에 따라 소년들에게 불어넣는 독립성이든,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염두에 두었다. 자율성의 정복이라는 계몽주의 서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1784년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Was ist Aufklarung?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가 계몽을 “인간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에서의 탈출”이라고 정의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어 미성숙이란 “타인의 지도 없이는 스스로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라고 주장했다. 칸트에게 계몽이란 지적 자율성, 즉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와 존 로크John Locke는 17세기 혁명의 정치사상의 영향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타인들과 사회계약을 맺은 자립 남성이야말로 정치적 권위가 정당성을 얻기 위한 유일한 토대라고 주장했다. 신권, 성경, 역사에 의해 정당화되던 권위가 자립 남성 간의 계약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면, 소년들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로크와 루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교육이론은, 징벌을 통한 강압적 복종을 강조하던 데서 독립의 주요 도구로 이성을 계발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로크는 『교육에 관한 고찰』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1693)에서 새로운 실천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성장하면 우리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우리는 합리적인 피조물이며 자유를 지닌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질책과 위협 속에서 불편하지 않기를 바란다.” 로크가 인식했듯이, 정치적·지성적 자율성은 새로운 성격의 아동(그의 경우, 소년·소녀 모두) 교육에 달려 있었다. 자율성은 새로운 이념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요청했다.
따라서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기 위해서는 심리적·정치적 변화,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철학적 변화가 요구되었다. 『에밀』에서 루소는 어머니들에게 그들의 자식과 사회, 정치적 압력 사이에 심리적 장벽을 쌓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촉구한다. “일찍부터 쌓으시오, 당신 자제분의 영혼 주위에 울타리를 말이오.” 영국의 설교자이며 정치 팸플릿 작성자인 리처드 프라이스는 1776년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을 옹호하는 글을 쓰며 주장했다. 자유의 네 가지 일반적 측면 중 하나는 신체의 자유, 즉 “우리를 행위주체Agents로 구성하는 자발성 내지는 자기 결정의 원리이다”. 프라이스에게 자유란 자기 지도 또는 자기 통치와 동의어였다. 이는 정치적 은유로서, 이 경우 심리적인 것을 연상케 하나 양자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계몽사상에 고취된 개혁가들은 신체를 보호하거나 루소식으로 영혼의 울타리를 쌓는 차원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들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혁명기의 가족법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독립성 제한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읽을 수 있다. 1790년 3월 신생 국민의회는 장손에게 유산 상속의 특권을 부여하던 장자상속권과 가족들이 발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식을 가둘 수 있도록 용인하던 악명 높은 봉인장lettres de cachet을 철폐했다. 그 해 8월, 의원들은 자식에 대한 부친의 전권을 용인하지 않고 부모와 20세 이하 자식 간의 논쟁을 청문하는 가정재판 기구를 설립했다. 1791년 4월에 의회는 모든 아동이 남녀 구별 없이 동등하게 상속받아야 한다는 법령을 포고했다. 그리고 1792년 8월과 9월에 의원들은 성년을 25세에서 21세로 낮추면서 성인은 더 이상 부권에 종속될 수 없다고 선언했고,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이혼을 합법화하면서 남녀 모두에게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갖도록 했다. 간단히 말해, 혁명가들은 개인의 자율성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더 큰 자율을 위한 요구는 미국 독립 이전이라면 법률보다는 자서전과 소설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1753년의 혼인법(26 Geo II, c. 33)은 부친이나 보호자가 합의하지 않으면 21세 이하인 사람의 결혼은 불법으로 간주했다. 이 같은 부권의 재천명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아내에 대한, 부친의 자식에 대한 낡은 가부장적 지배는 18세기에 걸쳐 점차 약화되었다.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1719)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1771∼88년에 쓰인)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미국의 저술가들은 독립성을 최상의 미덕으로 축복했다. 난파 선원의 이야기를 다룬 디포의 소설은 어떻게 사람이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지에 관한 입문서였다. 따라서 루소가 디포의 소설을 어린 에밀이 읽어야 할 도서로 선정했다거나 『로빈슨 크루소』의 초판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1774년 독립전쟁이 막 시작되려는 차에 출간되었다는 점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로빈슨 크루소』는 1775년 아메리카 식민지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다. 이 책과 경쟁한 것은 『체스터필드 경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Chesterfield’s Letters to His Son와 존 그레고리John Gregory의 『딸에게 남긴 아버지의 유산』A Father’s Legacy to His Daughters인데, 이 작품들은 소년·소녀의 교육에 관한 로크의 견해를 대중화한 것이다.
비록 수미일관하지는 못했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젊은이들은 가족이 여전히 큰 압력을 행사하고 있더라도 점점 더 자기 뜻대로 배우자를 선택하고자 했다. 『클라리사』처럼 많은 소설들이 이러한 문제를 줄거리의 초점으로 삼았다. 아이 양육 문제에서도 미세한 태도 변화가 드러난다. 영국인들이 어린아이를 강보에 싸는 행위를 중단한 이후에도 프랑스인들은(루소라면 프랑스인들을 충분히 말릴 만했건만) 학교에서 체벌을 지속했다. 1750년대까지는 영국 귀족 가정에서는 더이상 자녀의 걸음걸이 지도용 끈을 사용하지 않았다. 자녀의 몸이 쇠약한 경우에는 더 빨리 중단했는데, 이는 자녀들을 강보에 싸서 키우지 않고 일찍부터 화장실을 쓰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독립성을 갈수록 강조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기록은 종종 더 혼란스럽다. 영국에서 이혼은 다른 신교 국가들과는 달리 18세기에는 실제로 불가능했다. 1700년에서 1857년 사이에 혼인소송법에 따라 이혼 건을 청문하기 위한 특별법정이 열렸을 때, 겨우 325건만이 영국, 웨일스 그리고 아일랜드 국회의 사법私法에 의해 인가되었다. 이혼 건수가 18세기 전반기에 14건에서 후반기에는 117건으로 증가했음에도, 이혼은 소수 귀족 남성들에게 국한되었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충족 사유를 채우기 힘들어 거의 불가능했다. 18세기 후반에는 해마다 겨우 2.34건의 이혼만이 인가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이혼을 합법화하여, 프랑스에서는 1792년과 1803년 사이에 2만 건가량의 이혼이 (혹은 해마다 1800건이) 인가받았다.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법적 별거는 일부 허용한 채로, 일반적으로 이혼을 금지하는 영국의 노선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