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수행성의 미학은 왜 필요한가
1975년 10월 24일 인스부르크의 크린칭거Krinzinger 갤러리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여성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가 「토마스의 입술Lips of Thomas」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며 퍼포먼스는 시작됐다. 그녀는 갤러리 뒤로 가서 자신의 사진이 담긴 별 모양의 액자를 핀으로 벽에 고정했다.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하얀 보를 덮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레드와인 한 병, 꿀 한 잔, 크리스털 유리잔, 은수저, 채찍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꿀이 든 유리잔과 은수저를 들고 천천히 잔을 비웠다. 1킬로그램이 넘는 꿀을 모두 먹어 치울 때까지 이 행위는 계속됐다. 그 뒤 예술가는 레드와인을 유리잔에 붓고 천천히 마셨다. 와인 병이 빌 때까지 계속 마셨다. 그러고는 갑자기 오른손으로 유리잔을 깨부수었다.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예술가는 일어나 사진이 걸린 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벽을 등지고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본 뒤, 자신의 복부에 면도날을 그어 별 모양의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배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곧이어 관객을 등진 채 액자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렸다. 등에 피멍이 들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얼음으로 만든 십자가 위에 팔을 벌리고 누웠다. 천장에 설치된 온풍기가 그녀의 복부를 향했다. 온풍기의 열기가 상처에 전해지면서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브라모비치는 꼼짝하지 않고 얼음 위에 계속 누워 있었다. 이 고문은 온풍기의 열기로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계속될 분위기였다. 30분 동안이나 얼음 십자가 위에서 예술가가 자신을 학대하자 관객은 더 이상 그 고통을 쳐다보고만 있지 않았다. 관객들은 서둘러 얼음 십자가로 가서 예술가를 일으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행위로 인해 퍼포먼스는 끝났다.
이 퍼포먼스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이 두 시간은 행위자와 관객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시각에서 보면, 기존의 조형예술이나 표현예술에서는 볼 수 없고 정당화되지도 못할 사건이 여기서 일어난 것이다. 예술가는 이 행위를 통해 인공물, 즉 작품을 창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예술가의 손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고정된 형태로 남아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예술가는 특정 역할을 맡아서 극적 인물을 표현해내는 배우가 되지도 않았으며, 엄청난 양의 꿀을 먹고 와인을 퍼마시며 자신의 육체에 상처를 내는 인물을 재현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 예술가의 행위는 자해하는 인물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행위를 통해 아브라모비치는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 일반적인 경계선을 넘는 폭력적인 행위로 자신의 육체를 학대한 것이다. 첫째, 예술가는 과도한 양의 물질을 몸에 투입했다. 이것은 그저 먹고 즐기고 힘을 북돋는 정도가 아니라 의심할 바 없이 구토와 불쾌감을 일으키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얼굴이나 몸짓을 통해 이러한 증후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둘째, 관객은 자해로 인해 그 예술가가 겪은 육체적 고통을 함께 체험했다. 여기서도 예술가는 고통을 드러내는 기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음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불쾌감이나 고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육체를 통해 표시하지도 않았다. 현상적 고통을 표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통을 연기하는 것인지 관객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관객에게 행위자의 육체에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시키기 위해 예술가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꿀과 와인으로 몸을 채우고, 눈으로 지각되는 외상外傷을 몸에 입히면서도, 이 행위로 일어나는 내적 상태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예술가는 이를 통해 관객을 당황스럽고 불안하게 하며,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상태로 몰고 갔다. 이것은 마치 기존의 가치, 규범, 안정을 뒤흔드는 행위처럼 보였다. 갤러리 또는 극장 방문객은 일반적으로 관찰자나 관객으로 그 역할이 규정되어 있다. 방문객은 전시된 작품으로부터 멀거나 가까이 서서 결코 손으로 만지는 일 없이 관찰하기만 한다. 관객 역시 연극이 상연되는 동안 내적인 참여와 공감을 바탕으로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보지만, 결코 간섭하지는 않는다. 설사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가령 오셀로이 다른 사람이 경우에는 데스데모나을 살해하더라도 개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살인 행위는 연기일 뿐이며, 연극이 끝난 뒤 데스데모나 역의 여배우가 오셀로 역의 배우와 함께 무대 위에 올라 관객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일상적 삶에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면 당장 누군가가 간섭을 한다. 누군가가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이를 해치려 할 때, 관찰자는 자신의 신체나 목숨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한 개입한다. 그렇다면 관객은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에 어떤 규범을 적용해야 하는가? 실제로 아브라모비치는 자기 몸에 뚜렷한 중상을 입혔고, 계속해서 고문과 학대를 가하려 했다. 만약 그녀가 이 행위를 다른 공공장소에서 수행했다면,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중단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떠한가? 한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듯 보이는 행위를 하려 하는데, 이것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중단시킨다면, ‘작품’을 손상시키는 위험한 일을 범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인간의 도리로 봤을 때, 자해하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셈인가? 예술가는 관객에게 관음주의자 역할을 맡길 셈이었던가? 혹은 관객이 행위자의 고통을 중단시키기 위해 직접 행동을 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실험을 한 것인가? 여기서 무엇이 옳은 판단일까?
아브라모비치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과 일상적 삶, 미학과 윤리적 규범 사이의 중간 상태에 빠지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위기를 창출했다. 즉 일반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결되지 않는 위기를 돌발시킨 것이다. 여기서 행위자는 내적인 심리 상태를 숨긴 반면, 관객은 가장 먼저 감정과 심리를 몸을 통해 드러냈다. 사람들은 행위자가 꿀과 와인을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고, 유리잔을 손으로 깼을 때 경악했다. 필자는 아브라모비치가 자신의 살Flesh을 면도날로 긋기 시작했을 때, 이 행위가 야기한 충격 때문에 관객이 어떻게 숨죽이며 바라보는지를 말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관객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어떤 변환Transformation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관객들이 행위자의 고통을 중단시키고 퍼포먼스를 종료시킨 것이다. 여기서의 변환은 참여한 관객이 행위자로 변화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술은 예술가뿐 아니라 그 수용자도 변화시킨다고 했다. 이 말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가 아폴로의 토르소를 보고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라고 외쳤듯이, 예술가가 작품 수용자에게 영감에 사로잡히는 새로운 경험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물론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술가에 대한 일화와 전기傳記는 그들의 불면증, 마약 혹은 알코올 중독, 기타 무절제한 행위와 자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이때는 예술가가 자신의 몸에 자행한 폭력을 예술이라 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이를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의 예술가는 이와 같은 행위를 예술적 창조를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여겨 감수했거나 예술작품을 위한 과정으로 생각했지만, 이 행위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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