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일 일요일
다다를 수 없는 나라크리스토프 바타이유,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2006년 10월장으뜸 #오늘_팔린_책
새해 첫날 아침에 서가를 둘러본다.
올해는 또 어떤 책들이 이 서가를 채울까.
아직 쓰이지 않은 많은 책에 대해 상상해보다가
한 권의 책 앞에서 눈이 멎는다.
작고 가벼운 소설책.
미색의 표지에는 투박한 서체로 제목이 쓰여 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작은 서점 진열장에서 우연히 한국 번역가의 눈에 띄어 국내에 소개된 책이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어떤 책은 읽는 이의 마음에 조용히 들어앉아 자신의 색으로 마음 어딘가를 물들인다. 나는 그 책을 집어들고 오래 생각에 잠긴다. 이럴 때 서점은 꽤 낭만적인 중개인 같다.
나는 그 책을 돌려 표지가 보이게 진열해놓는다.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년 1월강윤정 #다시_읽는_책
새해 첫날엔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다.
잊지 않고 싶어서.
그의 삶과 죽음을.
2017년 1월 2일 월요일
레디메이드 인생채만식, 문학과지성사, 2004년 12월장으뜸 #지금_읽는_책
“저는 채만식을 제일 좋아합니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직원이 내게 한 말이다. 나는 놀란 얼굴로 “채만식?”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대답을 듣고도 나는 다시 물었다. “교과서에 나온 그 채만식?”
바리스타 면접을 볼 때,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를 꼭 묻는다. 보통 기욤 뮈소, 공지영,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이 나온다. 책을 좀 읽는다 하는 지원자들이라면 김영하, 로맹 가리, 밀란 쿤데라, 김연수 등을 꼽는다. 딱 한 번 ‘이상’도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채만식은, 당연히 처음이고 결단코 앞으로도 없을 이름이다. 그런데 채만식은, 당연히 처음이고 결단코 앞으로도 없을 이름이다. 채만식은 물론 유명하지만, 그것은, 그런 의미의 유명함과는 다른, 굳이 설명하자면, 교과서적인 유명함이 아닌가?
알라딘에서 주문한 채만식 선집이 오늘 도착했다. 십대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것과는 느낌이 무척 달랐다. 어딘지 모던하면서도 촌스럽고, 애처로우면서 웃기다. 변명과 푸념이 섞인 자기 환멸은 다자이 오사무를 보는 듯하다. 정말, 정말 페이보릿이 채만식일 수도 있구나. 나는 깊이 수긍하면서 1930년대, 이상의 그늘에 가려진 모던보이의 신세한탄을 음미한다.
은는이가정끝별, 문학동네, 2014년 10월강윤정 #다시_읽는_책
돌이켜보면 내게 시는 늘 바깥이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바깥. 시집을 읽을 때면 한 편 한 편 이해하지 않아도,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정념을 느끼곤 한다. 그것으로 족한 일. 시집을 읽는다는 건, 특히나 요즘같이 ‘쓸모’를 묻는 시대에 일상적이지 않고 무용한 일이지만, 그것은 자유롭게 떠돌다 결국 나에게로 향하는 집중력과 구심력으로 남는 일이기도 하다. 요컨대 ‘나의 쓸모’ ‘내 생의 쓸모’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집이야말로 어쩌면 ‘자기계발서’에 가깝다는 생각.
『은는이가』가 내게 남긴 자기계발 지침은 ‘시간운용법’이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어미와 아비가 되었다가, 다시 자식의 손에 나이든 내 몸을 맡기며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 ‘사랑의 기록’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한 생이라는 것.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가고 또 온다. 흐르는 시간은 모든 걸 바꾸어놓는다. 도리가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사랑하다의 반대말은 사랑했다이고, 행복하다의 반대말은 행복했다이고, 건강하다의 반대말은 건강했다이듯이. 그저 무엇이든 흘러오고 통과해 흘러갈 뿐. 과거는 분명 나의 시간이었으나 다시 마주할 수 없고, 미래는 분명 나의 시간이 아니나 피할 수 없다. 무력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뿐. 이 시집이 나에게 가르쳐준 시간운용법,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러므로 늘상 잊고 사는 것.
2017년 1월 3일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년 2월장으뜸 #지금_읽는_책
오랜만에 니체 선집 중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꺼내들었다.
나는 이 책을 3년 동안 읽고 있다
그러나 또 첫 페이지부터다.
글이 쓰인 시대의 정세를 모를뿐더러 밀도도 높아서 2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반쯤은 니체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또 반쯤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처음 몇 페이지의 니체는 이제 너무 익숙해서 거의 친근하게까지 느껴진다.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담소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대화보다 책 읽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는데,
내가 이해할 때까지 그가 말을 멈추고 언제까지고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A가 X에게존 버거, 김현우 옮김, 열화당, 2009년 8월강윤정 #오랜만에_꺼내본_책
새벽, 벼락같이 날아든 부고.
편히 쉬어요. 고마웠어요.
존 버거에 대해 무슨 말이든 쓰고 싶은데 오늘은 도저히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가장 최근에 존 버거의 책을 추천했던 건 ‘대학 신입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은?’이라는 물음에서였다. 그때 쓴 추천 이유를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A가 X에게』는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연인 사비에르에게 보낸 아이다의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입니다. 사비에르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죠. 너와 내가 닿아 있는 것, 그런 우리가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는 마음, 지키고 싶어하는 것…… 인생은 알 수 없는 일투성이겠죠. 그 안에서 내 손은 무엇을 하고자 할까요.
“내가 보낸 손 그림들을 창문 바로 아래 붙여놓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들이 제멋대로 흔들린다고요.
그 손들은 당신을 만지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먼 곳을 보고 싶을 때 당신의 고개를 돌려주고,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은 거라고요. 갓 태어난 아기들이 울음 대신 웃음을 터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상한 질문이죠. 우린 삶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인생에서 나의 손은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었어요.”(167쪽)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