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연암의 연행과 《열하일기》
그리고 〈옥갑야화〉
〈허생〉은 〈옥갑야화〉의 일부분이고, 〈옥갑야화〉는 《열하일기》의 일부분이다. 《열하일기》는 이른바 연행록燕行錄이다. 조선 후기 북경-연경燕京에 다녀오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의 여행 체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연경에 다녀온 사람의 기행문이 곧 연행록이다. 조선 사신단은 보통 10월 말에 서울을 출발해 한 달이면 압록강가 의주義州에 도착했고, 강을 건너 다시 한 달을 지나 북경에 닿았다. 사신단의 도착 날짜는 어림하여 12월 29일쯤이었다. 하루, 이틀 예행연습을 거쳐 1월 1일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에 참여한 뒤 1~2월 동안 북경에서 체류하다가 3월 1일쯤 출발해 역시 두 달 걸려 서울로 돌아왔다. 모두 6개월 정도가 걸리는 여행이었다.
이 반년을 소요하는 북경행이 조선 사람들의 유일한 해외 체험이었다.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갈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본 막부幕府 쇼군將軍의 습직襲職을 위시한 아주 드문 외교적 의례가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 횟수 역시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 말까지 12회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청淸이 중국 대륙을 차지한 그다음 해인 1645년부터 강화도조약을 맺은 1876년까지 232년 동안 조선은 모두 605회에 걸쳐 사신단을 북경으로 보냈다. 조선 후기 사족체제는 중국과 일본 외에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이거나 다른 국가를 직접 체험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왕환한 중국의 북경이야말로 조선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었던 것이다.
이 유일한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의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살았던 조선 후기에는 오직 경화세족京華世族만이 북경에 갈 수 있었다. 연암은 조선 후기 명문가 중의 명문가 출신이다.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선조宣祖 이래 저 복잡하기 짝이 없었던, 또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정변政變 속에서 살아남아, 19세기 말 조선이 종언을 고할 때까지 조선 최상층부의 명문으로 인정받던 가문이다. 이런 대단한 가문의 자제가 북경에 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연암이 북경에 간 데는 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북경행은 가장 가까운 벗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으로 인한 것이었다.
연암은 1737년에 태어나서 1805년에 사망했으니, 담헌보다 여섯 살 아래다. 담헌은 알다시피 1765년 12월 2일 북경에 도착하여 1766년 1~2월 북경에 머물다가 3월 1일 북경을 거쳐 서울로 향했다. 담헌의 북경 체류는 조선 후기 수많은 인사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북경에서 체류하는 동안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등 세 명의 항주杭州 출신 한인漢人 지식인들과 일곱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급기야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맺고 돌아왔던 것이다. 돌아온 이후에도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담헌 이전에도 조선 사신단은 중국에 무수히 파견되었지만, 사신단의 수행원이 중국 지식인과 진심을 털어놓고 형과 아우의 관계를 맺은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담헌이 북경에서 중국인 친구들을 사귄 일은 서울의 경화세족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조가 신임하던 신하인 김종수金鍾秀의 형 김종후金鍾厚는 원래 김원행金元行을 스승으로 모신, 담헌과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담헌이 오랑캐의 조정에서 벼슬하려는 ‘오랑캐와 다름없는’ 중국인과 친구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담헌은 김종후와 두 차례에 걸쳐 논쟁을 벌였다. 담헌은 화이론에 사로잡힌 김종후를 뒷날 〈의산문답醫山問答〉에 ‘허자虛子’로 등장시켜 질책하고 비판한다. 《열하일기》〈호질虎叱〉의 북관 선생北郭先生 역시 김종후를 모델로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김종후와는 달리 담헌이 북경에서 친구를 사귄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연안 주변의 젊은이들,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와 유득공柳得恭 등이 그들이었다. 담헌이 중국에 다녀온 1766년까지 담헌을 몰랐던 이들은, 담헌이 엄성·반정균·육비와 나눈 필담을 통해 알게 되고, 또 담헌의 중국인 벗들을 동경하여 따로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776년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柳琴이 북경에 가서 담헌이 열었던, 국경을 초월한 우정의 길을 확장했고, 이어 유득공이 북경은 아니지만 중국의 대도회지인 심양瀋陽 땅을 밟았다. 그리고 2년 뒤1778 박제가와 이덕무가 북경에 도착했다. 가까운 벗들이 북경과 심양을 다녀온 뒤라 연암은 심한 소외감을 느꼈다. 그 소외감이 1780년 연암을 북경으로 떠나보냈다. 연암은 같은 해 8월 1일 마침내 북경에 도착했다. 담헌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14년 뒤다.
연암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건륭제乾隆帝는 열하热河, 곧 지금의 청더시承德市에 있는 별궁인 피서산장避暑山莊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선 사신단은 8월 5일 북경을 떠나 열하로 향했고, 닷새를 여행한 끝에 9일 열하에 도착했다. 15일 다시 북경으로 떠날 때까지 이레 동안 열하에서 머물렀다. 연암은 열하에서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경개록傾蓋錄〉〈심세편審勢編〉〈망양록忘羊錄〉〈곡정필담鵠汀筆談〉〈피서록避暑錄〉〈동란섭필銅蘭涉筆〉 등 《열하일기》의 중추를 이루는 글을 썼다. 연암이 열하에서 머무른 숙소는 태학太學이었다. 태학의 명륜당 앞에는 일수재曰修齋와 시습재時習齋 등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진덕재進德齋와 수업재修業齋 등이 있었다. 명륜당 뒤에는 큰 벽돌을 깐 대청이 있었고, 왼쪽과 오른쪽에 작은 방들이 있었다. 오른쪽 방은 정사正使가, 왼쪽 방은 부사副使가 숙소로 삼았다. 비장裨將과 역관은 방 하나에 같이 묵었고, 두 주방廚房 사람들은 진덕재에 나누어 들었다. 비장과 역관, 주방 사람들의 숙소를 굳이 밝히는 이유는 《열하일기》의 어떤 이본에는 허생 이야기가 〈옥갑야화〉가 아닌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란 이름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진덕재야화〉에 의하면, 연암은 “여러 비장, 역관과 진덕재에서 밤에 이야기를 하였다與諸裨譯夜話進德齋.”고 하였다. 하지만 비장과 역관은 진덕재가 아닌 다른 재실을 숙소로 삼아들이 진덕재에 들어가 밤에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연암은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옥갑玉匣’이란 곳에 이르러 하루를 묵는다. 여기서 그는 여러 비장과 침상을 나란히 하고 밤에 이야기를 나눈다行還至玉匣, 與諸裨連牀夜語. 비장은 한 사신단에 서너 명 정도인데, 삼사三使, 곧 정사·부사·서장관書狀官을 수행하는 자제비장子弟裨將을 말한다. 북경에서 열하로 갈 때 정사 박명원朴明源은 주부主副 주명신周命新을, 부사 정원시鄭元始는 진사進士 정창후鄭昌後와 낭청郎廳 이서귀李瑞龜를, 서장관 조정진趙鼎鎭은 조시학趙時學을 비장으로 데리고 갔다. 연암은 자제군관으로 따라간 것이 아니고 자비로 오로지 구경을 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반당伴當이라고 부른다. 자제군관은 모두 삼사의 자제나 조카 들이다. 연암 역시 박명원과 재종再從 관계이기에 반당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연암이 이들 비장과 한곳에서 침상을 나란히 하고 밤에 이야기를 나눈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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