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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걷는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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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곶 끝까지: 서론
어디에서 시작할까? 근육이 긴장한다. 한쪽 다리가 기둥처럼 땅과 하늘 사이에서 몸을 지탱한다. 다른 쪽 다리가 뒤에서 휙 옮겨 온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다. 몸무게가 앞쪽 발볼로 쏠린다. 엄지발가락이 바닥을 밀어내면, 몸무게는 또 한 번 미묘한 균형을 찾아간다. 두 다리가 위치를 바꾼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이 이어지면서, 탁, 탁, 탁, 탁, 보행의 리듬이 생긴다. 더없이 자명하면서도 더없이 모호한 이 보행이라는 주제는 어느새 슬며시 종교, 철학, 풍경, 도시 정책, 해부학, 알레고리, 그리고 애통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보행의 역사는 글로 쓰이지 않은 은밀한 역사다. 노래의 패시지, 노상의 작은 패시지, 인생사의 작은 패시지, 그리고 책 속의 작은 패시지에서 그 역사의 편린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육체적 보행의 역사는 직립보행과 인체 해부의 역사다. 대부분 보행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데 필요한 대수롭지 않은 이동 수단으로서의 실용적 행동일 뿐이다. 보행이 탐구되고 의식儀式이 되고 사색이 되는 것은 보행의 특별한 부분집합(우편배달부가 편지를 전하는 일이나 회사원이 기차에 타는 일 등과 생리적으로는 같지만 철학적으로는 다른 행위)이다. 다시 말해, 걷기를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보편적 행동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을 먹는 일, 숨을 쉬는 일과 마찬가지로 걷는 일에도 성애적 의미에서 영적 의미까지, 혁명적 의미에서 예술적 의미까지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문화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걷기의 역사가 생각과 문화의 역사(다양한 보행, 다양한 보행자들일 저마다 자기의 시대에 추구한 다양한 기쁨과 자유와 의미의 역사)의 일부가 되기 시작한다. 그런 생각이 두 발로 지나간 곳에 장소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가 다시 그런 생각을 만들어냈다. 걸었기에 골목과 도로와 무역로가 뚫린 것이고, 걸었기에 현지의 공간 감각과 대륙 횡단의 공간 감각이 생겨난 것이고, 걸었기에 도시들, 공원들이 만들어진 것이고, 걸었기에 지도와 여행안내서와 여행 장비가 생긴 것이다. 멀리까지 걸어갔으니 걷는 이야기 책들과 시들이 쓰인 것이며, 순례와 등산과 배회와 소풍을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책들이 쓰인 것이다. 역사의 풍경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다.
걷기가 아마추어적 행동이듯 걷기의 역사는 아마추어적 역사다. 걸음의 비유를 쓰자면, 걷기의 역사는 허락 없이 남의 땅(해부학, 인류학, 건축, 조경, 지리, 정치사와 문화사, 문학, 섹슈얼리티, 종교 연구)에 걸어 들어가지만 그중 어느 땅에도 머물지 않고 계속 먼 길을 걸어간다. 전문 영역이라는 땅을 진짜 땅(기름지게 경작되어 특정 농작물을 산출하는 반듯한 사각형의 농지)에 비유하면, 걷기라는 주제는 경계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 진짜 걷기와 비슷하다. 걷기의 역사는 모든 땅의 일부이자 모두의 경험의 일부라는 점에서 무한한 역사다. 다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역사는 그 무한한 역사의 일부(그 무한한 역사 속을 걸어가는 한 사람이 우왕좌왕 두리번두리번 지나간 이상한 길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우리네가 지금 이 순간까지 지나온 길들, 즉 유럽의 전통을 미국의 전통(미국 대륙에서 생겨난 완전히 상이한 척도가 수반된 수 세기 동안의 적응과 변이)과 그 외의 전통들(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전통들, 특히 아시아의 전통들)로 변형하고 전복해온 역사를 따라가보고자 했다. 걷기의 역사는 모두의 역사이며, 누가 쓰든 자기가 잘 다니는 길에 관해 쓸 수밖에 없다. 내가 따라가는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걷기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말고 다시 일어섰다. 책상 앞에서는 큰 생각을 할 수 없으니까. 밖으로 나간 나는 골짜기 언덕을 올라 능선을 따라 걷다가 태평양 쪽으로 내려갔다. 버려진 군사기지가 드문드문 박혀 있는 골든게이트교 북쪽 곶이었다. 유난히 습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있었다. 언덕에는 내가 매년 잊었다가 매년 다시 마주치는 기세등등한 풀빛이 가득했다. 비를 맞고 황금색에서 흐린 회색으로 탈색된 작년의 풀들이 그 신록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활기찬 새 봄에 어울리는 색은 아니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이 대륙의 반대편에서 나보다 훨씬 더 활기차게 걸으면서 그곳 길에 대해 썼다.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는 것은 큰 행복이다. 지금도 나는 이 행복을 언제라도 맛볼 수 있다. 두세 시간의 오후 산책은 언제나 나를 낯선 나라로, 내가 평생 가볼 수 있는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낯선 나라로 데려다준다. 처음 가본 외딴 농가 하나가 다호메이 왕국의 모든 영지를 합한 만큼이나 좋을 때가 있다. 반경 10마일, 즉 오후 산책 한 번의 거리 안에 있는 풍경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과 70년이라는 사람의 한평생 사이에는 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걷는 길도 도로와 샛길을 합쳐서 구불구불 얼추 10킬로미터가 된다. 나는 힘들었던 10년 전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 불안이 떨쳐질까 해서였다. 그 후로도 나는 자꾸 이 길로 돌아왔다. 일을 쉬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고 일을 하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다.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돈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생각과 경험과 도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고 할까. 수년간 걷기를 다른 일의 수단으로 삼아왔던 내가 걷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단든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상적으로 볼 때,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 편이 된 상태다. 오랜 불화 끝에 대화를 시작한 세 사람처럼. 문득 화음을 들려주는 세 음표처럼. 걸을 때 우리는 육체와 세상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육체와 세상 속에 머물 수 있다. 걸을 때 우리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을 펼칠 수 있다. 곶 여기저기에 흐드러지게 피는 보라색 루핀꽃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아직 때가 아니어서인지 벌써 때가 지나서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샛길로 통하는 도로의 그늘 진 가장자리에는 하얀 냉이꽃이 자라고 있었다. 냉이꽃을 보자 어렸을 때 가서 놀던 산비탈이 생각났다. 해마다 그 산비탈에 제일 먼저 하얀 냉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것도 생각났다. 내 주위로 검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날개를 파닥거리기도 했다. 검은 나비들을 보니 또 옛날 어느 때가 떠올랐다. 장소를 넘나들다 보면, 시간을 넘나드는 일이 더 쉬워지는 것 같다. 계획에서 추억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또 관찰로 넘어가고.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활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 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행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두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가능하잖은가 말이다. 걷는 일은 곧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보면서 동시에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느긋한 관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색하는 사람에게 걷는 일이 특별히 유용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경이와 해방과 정화를 얻자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도 좋겠지만 한 블록을 걸어갔다 와도 좋다. 걷는다면 먼 여행도 좋고 가까운 여행도 좋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 자리를 걷는 것도 가능하고, 좌석벨트에 묶인 채 전 세계를 도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행의 욕구를 만족시키자면 자동차나 배, 비행기의 움직임으로는 부족하다. 몸 자체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하다. 걷는 일이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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