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을 잃고,
먼 땅, 먼 땅에서…….
2
나는 안개 속에 살아…… 안개 속에서 잠들고 깨어나지.
안개 속에서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지.
안개 속 어딘가 내 거울이 있어.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라는데, 내가 나를.
그 거리는 무無.
오늘은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다가 그리워.
내가 그립다는 말을 다 하네.
나는 사상이 좀 다르지.
내 몸이 작지, 내 몸이 참 작아.
내 몸은 고아孤兒처럼 작은데……
내 뒤에 아무도 없어.
빛도,
바람도 없는 곳에,
새도 울지 않는 곳에,
그림이 두 점 놓여 있어.
3
아침마다 목소리가 들려왔어.
방향도 없는 곳에서.
“숨 쉬세요.”
“숨 멈추세요.”
끝─
4
목소리들이 내 몸을 찔러, 때려.
바늘이, 망치가 되어.
“나에 대해 생각한 적 없어.”
끝─
10년 전에 바다를 떠나왔어, 내가 여든세 살 되던 해.
떠나온 뒤로 다시 못 가봤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돌아가도 싶을 때, 언제든.
끝─
바다를 떠나올 때 계절이 봄이었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그리워.
밤에 바다 앞에 앉아 있고는 했어.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어.
바다 빛깔은 못 봤어.
밤이 바다 빛깔을 지워버려서.
문 좀 닫아…….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구멍가게 딸린 횟집을 했어.
아이스크림도 팔고, 모기향도 팔고, 초도 팔았어.
낚싯대, 라면, 껌, 풍선, 폭죽.
모기향하고 초가 잘 팔렸어.
나무도마, 식칼,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생각에 잠긴 숭어,
마른행주, 모기향 연기,
헐거운 나사처럼 제자리에서 맴도는 파리 소리,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비릿하고 짭조름한 바람, 식칼을 집어 드는 손, 일진달력日辰一曆…….
문 좀 닫아…….
사흗날과 나흗날은 남쪽에 손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다니면서 사람 일을 방해한다는 귀신.이 있고,
닷샛날과 엿샛날은 서쪽에 손이 있어.
아흐렛날과 열흘날에는 손이 하늘로 올라가.
내 고향 마을 여자들은 손 없는 날에 장을 담갔어.
마른행주로 숭어 몸에 묻은 물기를 훔치고,
식칼을 집어 드는 손.
검은 밤을 흰 낮이 감싸고 있어, 숭어의 눈은.
바다에 들어갈 생각은 못 했어.
내게 바다는 바라보라고, 바라만 보라고 있는 거였어.
달력 속 그림처럼.
밤바다 소리는 뼈를 녹여.
5
내 손 잡지 마.
다른 손이 내 손 잡는 거 싫어.
내 손은 새, 구름 아래를 나는…….
새를 만질 수 있는 건 바람과 비와 눈송이뿐.
내 머리카락도 만지지 마,
한 올도.
뭘 뿌린 거야…… 내 손에 뭘 뿌린 거야?
내 방에 할머니들이 많이 있어…….
내 뺨을 때린 것도 손이었어. 돌멩이가 아니라, 나뭇잎이 아니라.
그 손이 시작이었어.
그리고 끝─
그 손을 잊은 적 없어.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일본 군의관의 손이었어.
덤불에 숨은 나를 찾아냈어.
그리고 열다섯 살이던 내 뺨을 때렸어.
군의관 얼굴은 기억 안 나.
나 살아 있어…….
6
닫힌 창.
닫힌 문.
북쪽에 걸린 긴 거울.
어디서 찬 바람이 불어오네…….
내 나이가 스물두 살이라고 했어. 집 떠날 때 열다섯 살이었는데.
서른두 살이라고 했어도, 마흔두 살이라고 했어도 믿었을 거야.
엄마가 나이를 알려주었어.
엄마는 내 나이를 세고 있었나봐, 나도 세지 않던 내 나이를.
엄마는 죽은 자식의 나이도 세는 사람이니까.
그곳에는 계절이 없었어.
세상에 계절이 없는 곳도 있다는 걸 그곳에 가서야 알았어.
그곳에는 낮과 밤만 있었어,
밤과 낮만 있거나.
내가 자식들을 죽였대…….
불 끄지 마.
7
꽃 피는 자리로, 잎 피는 자리로.
나에 대해 생각한 적 없어, 일생을…….
지옥에도 꽃이 필까.
돌에 꽃이 피었어, 번개가 치고 비가 지나간 뒤.
내가 싸우고 있어.
지금 생을 알기도 전에 지난 생을 알았어,
전생에 내가 지은 죄를.
양산에 『전생록』을 가진 할아버지가 있었어.
내 나이 스물세 살 때 할아버지를 찾아갔어.
진분홍 접시꽃, 구름, 잠자리, 엄나무…….
내가 태어난 해와 달, 날과 시로 내 전생을 찾았어.
전생에 내가 옥황상제 딸이었대.
자식을 다 죽인 벌罰로
쫓겨났대.
먼 땅, 먼 땅으로…….
그래서 삼신할미가 내게 자식을 주지 않는 거라고 했어.
자식을 달라고 독신각에 부처님을 모시기도 했어. 얼굴이 아기처럼 뽀얀 관세음보살님김복동에게 부처와 관세음보살은 동일한 존재로 이해되기도 한다.을.
잘못 모시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고 함부로 모시지 않는다는데 겁도 없이.
관세음보살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어.
내가 믿는 거…….
전생,
벌,
그리고 내가 전생에 지은 죄.
죄를 지을까봐 겁이 나…….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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