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마이클 아티야Michael Atiyah
에든버러 대학
필즈 상
아벨 상
밝은 대낮에 수학자는 개울가의 돌을 하나씩 뒤집어보듯 정확성을 기하며 그가 만든 수식과 그 증명을 확인한다. 그러나 휘영청 보름달이 뜬 밤에 수학자는 꿈을 꾼다. 별 사이를 두둥실 떠다니며 천상의 기적에 감동한다. 수학자는 바로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다. 꿈이 없다면 예술도, 수학도, 삶도 없다.
“꿈의 힘Puissance du reve” 철두철미한 평론가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가 그의 유명한 환상문학선집에 이 제목을 골랐다. 낮과 밤. 치밀한 계산과 자유로운 영감. 이들은 서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관계다. 낮이 되면 사람들은 일을 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든다(반대일 때도 있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정체를 드러낼, 마이클 아티야가 말하는 수학자들은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여 마치 커튼을 젖히고 나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울의 이쪽과 저쪽을 쉬지 않고 왕래한다.
가혹한 현실
알랭 콘Alain Connes
콜레주 드 프랑스
프랑스 고등과학연구소
필즈 상
크라포르드 상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금메달
서두 :
이 글은 수학과 나의 매우 개인적인 관계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의 내용은 나의 견해일 뿐 ‘일반적인’ 관점으로 볼 수 없다. 수학자는 저마다 ‘특별한 케이스’임을 잊지 말자.
내 생각에 수학은 무엇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가장 고도로 발달된 사고思考의 도구이자 개념의 원천이다. 새로운 개념은 사고의 증류기에서 오랜 증류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처음에는 수학을 공간의 과학인 기하학, 기호 조작의 예술인 대수학, 무한과 연속에 접근하게 해주는 해석학, 정수론 등과 같이 개별 분야로 나누려는 시도를 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수학의 세계가 갖는 본질적 특성, 즉 한 부분을 고립시키려 하면 결국 그 부분도 본질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반항 행위 :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수학의 기본은 배우면서 수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을 하면서 수학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하다. 물론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다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기하학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제대로 소화도 못하면서 지식만 자꾸 흡수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내가 보기에 수학자가 되는 것은 반항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수학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어떤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 책에서 읽은 내용이 그 문제에 대해 본인이 갖고 있는 주관적 관점과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대부분은 잘 몰라서 그런 것이지만 직관과 증명에 근거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무지無知가 대수인가. 게다가 그것을 계기로 수학에는 절대적 권위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열두 살배기 학생도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보일 수만 있다면 선생님과 동등해질 수 있다. 학생이 갖추지 못한 지식을 선생이 방패삼을 수 없다는 점에서 수학은 다른 학문과 다르다. 다섯 살배기 아이도 아빠에게 “아빠, 세상에서 가장 큰 수數는 없어” 하고 말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다. 책에서 읽어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증명했기 때문이다. 수학은 활짝 열린 자유의 공간이다. 규칙을 잘 지키면서 그 공간을 발견할 줄 알기만 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스스로 권위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곧장 책을 펴고 책에서 뭐라고 했는지 확인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독립심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머릿속에서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수학이라는 땅의 아주 작은 부분과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고, 수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지표를 갖고 파헤치려는 신비의 땅에서 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 도약 :
수학자의 역할에는 두 가지 면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증명하고 확인하는 역할로, 강한 집중력과 날카로운 이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전이라는 면모도 존재한다. 비전이라는 것은 직감을 따르는 움직임 같은 것으로, 확실성을 따르기보다는 시적인 특성을 갖는 이끌림에 가깝다. 간단히 말하면 수학적 발견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에는 이성적으로 전달 가능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존재한다.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이 바로 비전이다. 그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일종의 시적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적 도약은 말로 전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전달하거나 말로 표현하고자 하면 고정된 동상을 세우는 결과를 낳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발견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움직임을 잃게 된다.
퍼즐 조각이 충분히 모아지고 비전이 문제 해결로 나타나는 게 보일 때 상황은 달라진다. 내가 처음 수학자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자크 딕스미에Jacques Dixmier 교수님 밑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할 당시, 내가 발견한 것 중 가장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비가환환이 시간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내가 증명했던 것은 비가환환이 완전히 표준적으로 주어진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도미타이론에 의한 진화(변화)는 하나의 상태에 의존했고, 사실 내적 자기동형(대칭성)을 감안하면 그 상태에만 의존했는데, 그 자기동형들은 자명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증명하는 바는 비가환성이 시간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무無에서 말이다! 뚝딱! 그냥 그렇게! 물론 즉각 알 수 있는 사실은 환은 많은 불변량을 갖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기처럼 원상태로 돌아가는 시간 말이다. 그러나 이 결과가 완벽하게 표현 가능하고 전달 가능하다 할지라도 초기 발견의 경이로운 움직임인 시적 요소를 고갈시키지는 않는다.
수학적 현실 :
내가 무척 존경하는 시인들 가운데 이브 본느푸아Yves Bonnefoy가 있다. 그의 방법론이 수학과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수학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물질적 현실에서 인간이 쌓는 경험을 원료로 삼는다는 점일 것이다. 시의 주재료는 개인의 내면적 존재와 외부의 거친 현실이 만나 일으키는 충돌이다. 반면 수학자의 여정은 그와는 다른 지역, 다른 풍경에서 벌어지는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수학자는 시인과 다른 현실에 부딪힌다. 그러나 수학적 현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적 현실만큼이나 힘들고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비전의 순간들만으로 수학을 할 수는 없다. 비전의 반대편, 그러니까 증명이 끝난 다음 단계에는 혹시 틀리지는 않았나 염려하는, 불안과 고통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면 절벽을 내려오는 것과 비슷하다. 늘 밑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되뇔 수밖에 없다. ‘이런, 여기서 틀렸을 수도 있겠군. 아니면 벌써 틀렸는지도…….’ 확신할 수 없으니 늘 두려울 수밖에 없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불안에 휩싸여 수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진짜 현실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현실은 아니지만 가혹하기는 훨씬 더 가혹하다.
따라서 진리의 개념은 다른 세상, 외부 현실이 아닌 수학적 현실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에 적용된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핵심 포인트는 평생을 바쳐 그 세계를 탐험한 수학자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세계의 경계와 연관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한다는 사실이다. 여행의 출발점이 어디였든지 간에, 그 여행이 꽤 길어지고 극도로 전문화된 분야에 갇혀 지내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타원함수, 모듈러형식, 제타함수 등 전설적 도시 중 하나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그리고 수학의 세계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분이 서로 닮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Alexander Grothendieck도 『추수와 파종Recoltes et semailles』에서 그가 여행을 시작했던 해석학의 땅에서 대수기하학의 땅으로 넘어갔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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