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유산
내가 죽어서라도 세상이 바뀌면 좋겠다며
내어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노동자들이 목숨을 놓을 때마다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보수언론들이 이야기한다
천상 호수 티티카카호까지 가는 뻬루의 고산 열차는
1870년 착공해 완공까지 삼십팔년이 걸렸다
공사 기간 중 이천명 넘는 인부들이 죽었다
중간 역도 없이 만년설 속을 열세시간 달리는데
딱 한번 이십분간 정차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이천명의 상여를 타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사회가 우리의 삶을 이용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죽음을 특별히 애도할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 내릴 수 있는
생의 정거장은 의외로 많지 않다
어머니의 나라말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벌교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오랫동안
혼자 ‘여천떡’이었다
이름이 따로 없다가
내가 학생이 되고서야 가끔씩
생활기록부 속에서
‘이청자’ 씨가 되었다
밥도 부뚜막에서 혼자 먹고
늘 맨 뒤에서 허둥지둥
무언가를 이고 지며 따라오던 사람
모두가 잠자리에 든 뒤 들어왔다
새벽녘이면 슬그머니
빠져나가던 사람
어디선가 빌려와
언젠가 돌려보내줘야 할
딴 나라 사람 같던
어머니
가장 가깝고도 머나먼
소라와 조개가 많이 난다는 나라
어머니의 그 나라말을
우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MRI를 찍던 날
아무리 잘 지은 건물도
투시안경을 쓴 듯 속뼈가 보인다
녹슨 철근, 뒤틀린 배관
엉성한 설비, 팩 토라진 샤시
얄팍한 전선들, 상 우그러진 닥트
시멘트 공구리에 묻힌
자갈들, 여기저기
오줌 자국까지 훤히 보인다
다른 안경을 써보려 해도
잘 안된다 눈 감아도 선하다
H빔에 발가락 물린 최씨
그라인더에 눈을 간 안씨
제 손을 타공한 김씨
엘리베이터 홀로 골인한 고씨
아시바에서 뒤로 착지한 원씨
장비에 깔려 탕탕탕 세 번 바닥을 치다 간 박씨
비 오는 날 용접선에 달라붙은 황씨
수평이 안 맞았군
마감이 허술해
저곳을 보강해줘야 할 텐데
떼먹힌 노임, 망가진 몸보다
제대로 된 일 매듭이 더 눈에 선한
노동자의 마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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