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8세기의 노비 시인 정초부鄭樵夫(1714~1789)가 죽자 주인 여춘영呂春永(1734~1812)은 벗처럼 여겼던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다음 세상에는 그런 집에서 나게나”라고 읊조렸다. 노비 출신이 시인으로 당대에 이름을 드날린 것도 특이하지만, 주인이 그를 오랫동안 벗으로 대우한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정초부가 양반들로부터 대우를 받은 것은 그가 글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시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인 여춘영의 배려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노비에게 학문의 탐구나 지배층의 배려란 비현실적인 꿈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노비가 지적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노비주들이 한결같이 부도덕한 인간들이어서가 아니었다. 노비는 신분제의 속박에 따라 대대로 주인가에 예속된 소유물이었고, 주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들의 경제적 가치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러한 속박을 노비들이 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출생의 순간 그들을 기다린 것은 노비라는 예속의 삶이었던 것이다.
노비들에게는 대개 세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지게 된다. 신분적 억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는 대신 주인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일생을 보내는 길이 그 하나다.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선택지로는 도망 같은 소극적 방식으로 혹은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는 적극적 방식으로 저항을 시도하는 길이 또 다른 하나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성장을 활용하거나 군공을 세우는 등의 방식으로 합법적인 면천을 도모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왜란과 호란, 두 차례의 전쟁 경험과 조선 사회의 경제적 성장은 노비들에게 신분 해방이라는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제공했다. 많은 노비들은 합법적, 비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노비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더 상위의 신분으로 올라서기를 원했다. 하지만 노비 신분에서의 해방이 쉬운 일이 아니었듯이, 평민을 넘어서는 사회적 지위의 획득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몇 세대를 거친 기나긴 여정을 통해 상위 신분인 양반에 접근해 나갔다.
이 책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양반을 꿈꾸었던 한 노비 가계의 2백 년의 이력을 기록한 것이다. 원래 계간 『역사비평』에 짧은 논문으로 발표했던 내용을 확대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주인공인 노비의 가계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추적하는 데 활용된 주 자료는 호적대장이다. 양반이나 국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노비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은 많지만, 그들의 가계를 복원하는 데 호적만큼 중요한 자료는 없다. 다만 현존하는 호적의 양이 많지 않고 호적에 전체 인구가 다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계 복원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 가계의 호구에 관한 단순 기록을 최대한 수합해 놓고 보면, 그들 삶의 여정이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되살아난다.
따라서 이 책은 호적을 통해 복원한 하천민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역사에 대해 높은 수준의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조선시대의 호적에 대한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상위 신분인 양반은 소수에 불과했고, 인구의 절대다수는 평민이나 노비 같은 하천민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방향은 양반 기득권의 직접적인 해체가 아니라 모두 다 양반이 되는 독특한 길이었지만, 근대 이후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상당한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잊힌 그들의 선대에 관한 기록의 복원이기도 하다.
노비에 비해 다양한 신분적 특권을 향유했던 양반들도 그들 내부에서의 상호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양반들의 꿈이었던 관료로의 진출 기회는 보통 소수의 과거 합격자에게만 주어지기 마련이었다. 경쟁의 외연이 확대되는 것을 꺼렸던 그들은 자신의 서얼이나 중인, 향리 출신들이 관료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대다수의 양반들 역시 평생 관직에 접근할 수 없었다. 지역 사회 내부에서의 권력이나 경제력도 축소 과정에 있었는데, 새롭게 형성되었던 부계 중심 가족과 친족 질서가 그들의 불안에 대한 일종의 방어막 구실을 했다.
하천민 출신들의 염원은 대다수 양반들도 기대하기 어려웠던 관료가 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의 당면 목표는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이었다. 노비들은 신분 해방을 꿈꿨고, 평민으로 성장한 이후에는 불평등한 군역 부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지위를 서서히 상승시켜 나갔던 그들은 점차 타 신분과의 구분을 가능하게 했던 양반들의 전유물을 하나씩 획득하기 시작했다. 양반들의 가족 질서도 모방의 대상이었는데, 이 역시 그들의 생존과 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책에서는 호적을 활용해 그러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려고 했다. 간혹 흥미로운 내용들도 있지만, 하천민의 삶을 희화화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양반들이 출생과 동시에 얻었던 조건을 이들이 몇 세대를 거치며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과 그의 가계는 분석의 대상일 뿐이지 그 자체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후손들 역시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들이 자신의 가계를 좀 더 화려하게 보이도록 기록의 윤색을 시도했다면, 하천민들은 자신의 가계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외형상 새로운 양반 가계가 탄생하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의 욕망을 넘어선 사회구조적인 현상이었다. 양반을 모방한다고 해서 곧바로 양반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모방 역시 신분제 극복에 기여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천민 가계의 양반 모방은 양반 문화의 수용으로 이어졌으며, 나아가 그들이 가진 지식에도 서서히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노비 시인 정초부가 양반들로부터 대우를 받았던 것은 그들이 독점해온 지적 영역에 하천민 출신이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학문을 비롯한 지적 영역에 접근한 하천민 출신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근대 이후 그들 앞에 놓인 새로운 도전 과제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양반의 외적 조건과 그들의 가족 문화를 하천민들이 갖추어 나가거나 모방했던 시기까지만 다루었다.
2장 평민 혹은 그 이상
(...)
군역을 회피하는 사람들
군역 운영은 공평하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군역 부과 대상이 평민에게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불공평한 제도였지만, 중앙 군영이나 지방 병영, 지방 관청이 독자적으로 군역자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운영되지도 않았다. 한 사람이 이중으로 역을 지는 첩역疊役이 나타나기도 했고, 16세가 안 된 어린아이나 60세가 넘은 노인, 심지어는 죽은 이들이 군역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군역 문제는 그리하여 18세기 조선 사회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불공평하면서도 과도한 군역 부담에 사람들은 저항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역에서 빠져나가려 했고, 그것이 어려우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역을 맡으려 했다. 이마저도 어려운 데다 부담 능력이 없었던 이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군역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부담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수봉의 후손들은 대부분 군역을 졌지만, 일부는 그 대열에서의 이탈을 시도했다. 수봉의 두 아들 학과 흥발은 1729년에 나이가 60세가 넘어 군역에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 당시 그들의 직역은 노제어영군과 노제금위보였다. 이는 말 그대로 늙어 어영군과 금위보에서 면제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수봉의 막내아들은 돈을 들여 군역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취했다. 그는 55세 무렵 아버지 수봉과 마찬가지로 곡식을 바치고 납속절충장군의 직역을 얻어 60세가 되기 전에 군역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실 군역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은 이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1717년 그가 벽계역의 역보라는 역을 맡고 있을 때 자신의 한 아들을 도천서원의 원생으로 입속시켰다. 향교의 교생이나 서원의 원생은 양반가의 서자들이 주로 맡았던 직역이었으나, 군역을 피하려는 평민층의 자제들도 이러한 직역을 얻기를 원했다. 당시 그의 두 아들 가운데 겨우 6세인 큰아들은 이미 봉수군이라는 군역을 떠안고 있었고, 한 살 아래인 동생도 군역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때 그는 자신과 두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군역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야만 자신의 집에 부과된 전체 군역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명의 노비까지 소유해 비교적 살림이 넉넉했으므로, 이를 이용해 둘째 아들을 서원의 원생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이후 둘째는 원생과 업무 등의 직역을 맡으면서 군역을 지지 않았다. 뒤이어 수봉 역시 납속직을 얻어 군역에서 벗어났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수봉의 후손들 역시 군역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군역의 과중한 부담과 회피라는 반복되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조정에서도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관료들은 군역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과 시급한 현안만을 개선하는 두 갈래의 대책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어떤 방안이든 군역 제도 자체를 손보는 것임이 틀림없지만, 전자는 공평 과세를 통한 군역자의 안정적인 확보에, 후자는 감세를 통한 불만의 완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공평 과세를 통한 근본적인 군역 개혁안으로 나온 다양한 방안 가운데 하나가 호포법戶布法이었다. 호포는 군포를 양반, 평민 가릴 것 없이 모든 호에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군역 부담에서 제외되었던 양반 호에도 군포를 부과해 군역 운영의 안정을 꾀하려는 이 제안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장기간 논의되었다.
우참찬 윤휴가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호포의 일을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백골이나 아약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골수를 부수는 가혹한 정치에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치는 근심과 괴로움과, 놀고먹는 선비나 운 좋은 백성처럼 부역을 피하고 스스로 편하게 지내는 자의 원망,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크겠습니까?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민심의 향배와 천명의 거취가 장차 백성들의 편안하고 편안하지 아니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운 좋은 백성이나 힘 있는 이들의 편안하고 불편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
─ 『숙종실록 3년 12월 19일』
대사헌 이단하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왕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반드시 그 사정이 가지런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귀한 자는 귀하에 여기고 천한 자는 천하게 여기며 후한 자는 후하게 여기고 박한 자는 박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호포의 경우 귀천을 논함이 없이 모두 포를 내게 되니, 만약 선비들로 말한다면 평생 동안 고생하며 부지런히 독서만 하는 자가 한 글자도 읽지 않는 자와 같이 그 포를 낸다면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 『숙종실록 7년 4월 3일』
숙종 대 윤휴 같은 이는 아약(어린아이)이나 물고(죽은 이)된 이들에게까지 부과되고 있었던 군포 운영의 폐단을 막는 방안으로 호포법의 실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방안은 양반층에 대한 과세를 포함하는 것이었으므로 일견 획기적인 주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조선 전기에 천민과 노비를 제외한 모든 계층이 군역을 부담한 전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포법은 오랜 논의만 거쳤을 뿐 실제 실행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기존의 제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초기에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고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후에는 이를 바로잡으려 해도 쉽지가 않은 법이다. 더구나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관행은 조선 사회 최고의 신분층인 양반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었다. 하층민이 아닌 기득권층인 양반들에게 주어진 특혜를 되돌리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많은 관료들은 양반 사족들이 어떻게 무지한 백성들과 똑같이 군포를 낼 수 있느냐며 거세게 저항했다.
결국 호포법은 논의만 무성한 채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조선 왕조가 마련한 방안이 균역법均役法이었다. 균역법은 양반들을 새로운 군포 부과 대상자로 끌어들이지 않는 대신, 기존 16개월에 2필이었던 군포 부담을 12개월에 1필로 줄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군포 부담을 줄여 평민 군역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었다. 균역법은 공평 과세, 양반 과세를 포기한 일종의 감세책이었다.
하지만 경제력이 있는 양반들에 대한 과세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감세가 이루어지자 정부나 군영의 재정 운영은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또 다른 잡세들이 신설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균역법의 효과는 감소했다.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던 군역 문제는 또다시 모순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 문제는 19세기까지 이어져 농민 항쟁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다. 평민들은 줄어든 군포 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보다는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찾느라 다시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는 수봉의 후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간층으로 올라가다
노비에서 해방된 수봉의 아들들은 과도한 군역 부담에 시달렸다. 수봉의 막내아들은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곡식을 바치고 절충장군이라는 직역을 얻었고, 그의 아들 가운데 1명을 서원의 원생으로 입속시켰다. 이를 통해 수봉가 후손의 일부는 군역 부담에서 자유로워졌고, 한 호에 부과되는 군역 총액을 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역의 폐단이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은 언제든지 다시 과중한 부담에 노출될 수 있었다.
균역법의 실시로 부담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평민인 이상 수봉의 후손들은 평생 군역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수봉과 그의 막내아들처럼 곡식을 바치고 통정대부나 절충장군이 되어서는 본인들만 혜택을 누리게 된다. 이제 그들은 좀 더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군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과 손자 대대로 군역에서 면제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갔다.
가장 확실한 길은 양반들의 직역인 유학幼學을 자신의 직역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래 노비였던 수봉의 가계가 평민 군역자에서 유학으로 급상승하기란 쉽지 않았다. 보다 현실적인 방안은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간층에게 주어졌던 직역, 즉 업무業武나 업유業儒를 얻어 군역자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 후반 수봉의 손자와 증손자 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호적에 나타나는 수봉의 손자 11명 가운데 4명이 1759년 군역자에서 중간층의 직역으로 상승했다. 증손자는 12명이 확인되는데, 그중 8명이 18세기 후반의 여러 시기에 걸쳐 중간층으로 올라갔다. 손자보다 증손자 대에 직역 상승자의 비율이 훨씬 높아졌던 것이다. 이는 수봉의 후손들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중간층으로의 진입이 활발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그들이 얻은 직역은 대부분 업무였고, 일부만이 업유였다. 업유와 업무는 원래 유학과 무학을 닦는 양반 자제에게 붙여진 직역이었다. 하지만 업유와 업무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면서 유학과 무학을 닦는 양반가 서자들의 직역으로 전환되었다. 수봉의 원래 주인이었던 심정량의 서자 역시 1729년 호적에서 직역을 업유로 기재했다. 업유나 업무가 양반층 서자의 직역이었던 이상 군역의 의무는 없었다.
이는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평민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유학이 되기를 기대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업유와 업무만 되어도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양반의 서자가 아닌데도 군역을 피하려는 이들이, 향리와 결탁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업유나 업무의 직역을 획득해 나갔다. 수봉의 후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정량의 서자가 업유였던 시점에서 수십 년이 흘러, 수봉의 손자가 그 업유를 칭하기 시작했다. 노비였던 수봉의 손자와 증손자들은 수봉의 옛 주인의 서자에게 붙여졌던 직역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업유나 업무였던 양반 서얼은 그들의 자손 대에 가서는 유학을 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평민들이 업유와 업무를 모칭했던 시기에, 양반의 서자들은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으로 유학이라 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봉의 후손들은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했다. 모든 구성원이 다 혜택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군역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더구나 그 길은 점차 확대되었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한 단계 더 도약을 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업유나 업무라는 직역은 평민들이 군역을 면제받고 때로는 유학으로 올라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또한 그 자체가 중간층의 직역이었던 이상,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수봉의 후손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중간층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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