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다음 차가 첫차다. 시의 한 대목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문장이지만 실제로 막차를 놓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기 힘든 ‘죽은 말’이다. 막차를 놓쳐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막차와 다음 날 첫차 사이 그 하룻밤이 얼마나 길고 막막한지.
‘막’ 자가 들어간 말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온다. 막배, 막장, 막노동, 막소주, 막걸리, 막둥이, 막말, 막가파, 막장 드라마…. ‘막차의 시대’를 급박하게 토해놓은 김경후의 시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원룸 전사라니. 사실 원룸에 사는 전사戰士는 전사가 아니다.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전사가 갈구하는 무기는 직업이다. 인센티브와 유급휴가가 있는 번듯한 정규직. 하지만 시 속 청년은 “탈 차”도 없고 “기다릴 차”도 없으며 찾아오는 이조차 없는 무직자다. 원룸에서 혼자 사는 전사에게는 하루 24시간이 전시 상황이다. “밤마다, 나는, 막차”라고 되뇌는 청년에게 과연 다음 날 새벽 첫차가 있을 것인가.
미래세대가 미래 앞에서 어깨를 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청년에게 되돌리는 것은 몰지각하다 못해 폭력에 가깝다. 청년에게 잘못이 있다면 기성세대가 만든 세상에 적응하려 했다는 것이다. 지난 9월 하순 노년이 나섰다. ‘60+기후행동’이 첫발을 뗐다. “우리 노년이 누려온 물질적 풍요가 청년의 미래를 빼앗아온 결과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출범 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미래세대로 하여금 “밤마다 막차”를 타게끔 한 장본인이 노년이라면, 그렇다, 노년이 나서서 첫차를 마련해야 한다. 만시지탄에 비육지탄이지만, 우리 노년이 마음을 모아 미래로 가는 첫차를 만든다면 그 차에 어디 청년이나 어린이만 타겠는가.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