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로 이 칼럼 쓰기, 쓰고 고치고 바꾸고 줄이고 하는 그 글들과의 씨름에 버릇되면서 내 의식의 결기를 다잡고 거기서 빚어질 긴장과 씨름했다. 글은 그 글 쓸 즈음의 시의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무엇을 써야 할지 주제와 줄거리를 찾고 고르고 구성을 하는 절차를 어느 문학적 글쓰기나 시사적 기사 쓰기 못지않은, 아니 칼럼의 성격에 어울려야 할 제약을 지키기 위해 더 심하게, 사유들 속을 부지런히 헤매야 한다. 그런데 그 외형의 한계가 주는 내면적 자유가 즐거워오는 것이다.
젊은 나는 기자로, 문학평론가로 행세하면서 기사며 문학작품 비평을 쓰는 동안 이런저런 매체로부터 청탁을 받고 또 갖가지 글들을 썼다. 정치와 현실에 대한 묵직한 글이기도 했고 회상이나 일상에의 잡상에 이르는 가벼운 글이기도 했다. 나이 들기를 넘어 늙어가면서 내 직업적 글쓰기의 테두리는 줄어들고 때마다 자리마다 느끼고 생각나는 일들도 좁아졌다. 그런 참에 더러 온 청탁이 정기 칼럼이었고 「한겨레」는 아예 기명의 ‘칼럼’을 부탁해왔다. 기왕의 글쓰기 수준과 책임을 한 급 올려주는 느낌이어서 영예롭게 여겨야 했고 그렇게 그 난을 채운 지 어느 사이 9년째에 이르렀다. 그런 참에 문득 ‘칼럼’이란 글의 성격, ‘칼럼니스트’로서의 자세를 물어와 나는 당혹했다. ‘칼럼’ 필자로 글을 써왔지만 정작 ‘칼럼’이 어떤 유의 글을 가리키는지 별다른 의식도 없었고 그 글을 쓰는 품새를 특별히 가다듬지도 않아온 것이다.
정신이 퍼뜩 들어 문학적 장르로 규정된 것도 아닌 ‘칼럼’의 정체를 새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어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프라임 영한사전」의 ‘column’에는 첫 뜻 ‘기둥’에 이어 ‘원주 모양의 물건’이란 풀이, 군대의 ‘종대’가 있고, 추가로 ‘(신문 등의) 난’, ‘(신문의) 특약 정기 기고란’이라 하여 비교적 분명한 풀이를 주고 있었다. 그 풀이에는 ‘기둥 모양에서 세로로 긴 페이지의 난’으로 그려진 도표도 있었다. 그래서 대충 신문이란 나날의 소식을 알리는 특정한 매체, 정기적이란 시간성, 특약이란 관계로 이루어진 글쓰기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대체로 그런 틀로 ‘칼럼’을 써왔던 것 같긴 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공공연한 의미로 내 뜻을 넓혀 읽는 이들의 공감을 얻을지, 그러려면 어떻게 글줄을 늘이고 구성을 짜야 할지 고심하며 정해진 마감과 글의 길이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두 달에 한 번의 그 고역에도 나는 이 독특하다고 해야 할 장르의 글쓰기를 즐겨왔던 것 같다. 매일의 뉴스를 보도하는 매체이기에 그 주제는 시의성을 고려하며, 정한 날짜까지 원고를 보내야 하는 약속을 오히려 달가워했다. 나는 바로 이 칼럼 쓰기, 쓰고 고치고 바꾸고 줄이고 하는 그 글들과의 씨름에 버릇되면서 내 의식의 결기를 다잡고 거기서 빚어질 긴장과 씨름했다. 글은 그 글 쓸 즈음의 시의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무엇을 써야 할지 주제와 줄거리를 찾고 고르고 구성을 하는 절차를 어느 문학적 글쓰기나 시사적 기사 쓰기 못지않은, 아니 칼럼의 성격에 어울려야 할 제약을 지키기 위해 더 심하게, 사유들 속을 부지런히 헤매야 한다. 그런데 그 외형의 한계가 주는 내면적 자유가 즐거워오는 것이다.
나는 사건의 추이를 추적하는 기사나 해설, 혹은 사설처럼 객관적 주장이나 규명으로 엄격하게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사건과 사태에 대한 내면의 사유나 회상을 ‘수필’이란 용어처럼 흐르는 대로의 자유로운 생각들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다. 설정한 주제는 큰 틀에서 짚은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사유와 접근은 부드러운 사고의 진행에 따라 풀어간다는 것, 그것은 시나 소설 같은 개인적 상상의 분방을 유보하는 대신 익명의 공적 주장이나 설명이란 비개인성에 빠지지 않고, 바로 나이기 때문에 생각하고 쓰는, 또 쓸 수 있는 자유를 가지면서도 그만큼 객관적 공론적 성격을 버리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새 책, 옛 기록을 찾고 묵은 기억들을 헤집어내며 이 생각과 저 사건을 맺고 거기서 보탤 것 뺄 것을 정리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러니 글의 주제가 당시의 현실적 상황에 매이지만 그 접근 방법과 태도는 탄력적이며, 글의 내용은 통개인적이고 공론적이지만 글의 형태와 쓰기는 유연하고 사유와 추리는 필자의 개인적 특성과 자유로움을 보장해줄 것이었다. 제약 속의 자발성, 한계 속의 제멋대로임을 열어주는 ‘칼럼’의 형태는 그래서 노년의 내 바람에 어울려가는 것 같다.
젊을 때의 나는 거창하게 ‘문명비평가’일 수 있기를 꿈꾸었다. 한갓 소망으로 그치고 만 것은 분명하지만, 내 시들어가는 마음을 토닥거리며 움직이는 세상과 침잠하는 의식 간에 다리를 놓아 여전히 세계에 대해 긴장하고 까다로운 현실을 고려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이 ‘칼럼’ 쓰기 덕분이다. 몇 해 후의 앞날도 기대할 수 없는 낡고 늙은 내게, 그것은 고역이면서 즐거운 보람이고, 덧없는 일이되 의미 있는 고민을 치른다. 그 살아 있음의 확인을 위한 노력이, 모든 것을 정리해 마쳐야 할 나이임에도 여전히 미련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리라.
★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