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화는 다르다. 분노가 사회적인 것이라면 화는 사적인 것이다. 분노가 정의나 평등과 같은 보편 가치에서 비롯된다면 화는 모멸감이나 열등감 같은 사적 감정에서 우러난다. 분노가 이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면 화는 말 그대로 화풀이, 분풀이다.
분노와 화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사회적 주체와 심리적 자아가 균형을 이룬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사적인 화를 공적 영역에서 분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감정조절 장애가 ‘한국병’으로 자리 잡았다. 감정노동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갈수록 떨어진다. 감정에 관한 한 대다수 어른이 미성년이다.
이산하 시인의 ‘나무’는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 정치인을 추모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시가 너무 짧다는 이유로 행사장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시를 쓰게 된 배경이 어떻든 간에 저 짧은 시는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도끼를 들이대는 상대방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었을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나’에겐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끼날에 묻는 것은 피일 텐데 왜 굳이 향기라고 했을까.
향기는 보이지 않지만 멀리 퍼져 나간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향기는 우리의 두 눈을 지그시 감게 한다.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에 따르면 분노는 창조적이어야 한다. 창조적 분노는 공공성을 중시하고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한다.
나는 도끼날에 묻은 저 당당한 ‘향기분노’가 변화의 촉진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도끼를 든 자뿐만 아니라 저 시를 읽는 모든 이에게.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