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란 설렘과 동시에 불안을 동반하나 봅니다. 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이라도 있을까? 그래서 페소아의 『불안의 책』은 우리 모두의 일기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나를 보러온다는 생각은 잠시 잊어버리고, 그가 사랑스러운 내 친구 간호사 그녀와 동행해 한국에 온다고 적어두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기다림은 배가 되고 불안은 반으로 줄어들었어요. 우리가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 채 주고받은 편지들도 사랑과 불안의 편지였겠지요. 하긴 우리나라의 옛사람들은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사진만 보고 결혼을 했으니까요. 요즘처럼 뜨겁게 사랑해서 한 결혼보다 훨씬 결속력이 강했던 옛 결혼은 어쩌면 체제 유지에 이용된 강압적 삶의 프로세스는 아니었을까요? 결혼의 시대는 어쩌면 뒷전으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가까운 누군가가 결혼을 한다 해도 축복보다는 불안이 앞서곤 하니까요. 하지만 사랑스러운 간호사 아가씨의 결혼식엔 꼭 가고 싶었답니다. 열정적인 그녀의 행복한 웃음을 꼭 보고 싶었어요. 얼마 전 꿈속에서 당신의 결혼식에 갔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제야 이야기지만 그 곁에는 꿈속에서도 내가 아닌 그녀가 당신 곁에 서 있었어요. 꿈속에서 아니 깨어서도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나쁘지 않았답니다. 진심으로 당신들의 행복을 빌었어요. 정말 나쁘지 않은, 아니 잘된 만남이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답니다. 문득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속의 노래가 머릿속을 맴도네요. 『판타스틱 우먼』이라는 제목의 영화였어요. 주인공인 한 트랜스젠더 여인이 연인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오는 고독과 공포를 이겨나가는 한 인간의 성장이야기였어요. 성장이야기는 어린이나 청소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요. 죽는 날까지 우리는 성장하니까요.
후퇴하거나 정지하지 않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살아남을 희망을 주죠. 트랜스젠더란 타고난 육체적 성과 정신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죠. 헤어진 내 남편이 그런 사람이었는지라 그 영화가 유독 남 같지 않게 느껴졌어요. 영화 속의 주인공은 우람한 어깨를 지닌 남자였지만 아름다운 음색을 지닌 여성이기도 했어요. 그녀가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내내 잊히지 않았고, 그 노래의 노랫말도 계속 머릿속을 맴도네요. “당신 사랑은 어제 신문 같아. 아무도 다시 보지 않지. 아침엔 깜짝 놀랄 소식이지만 한낮이면 진상이 드러나 오후엔 이미 잊힌 이야기. 당신 사랑은 어제 신문 같아. 한때는 헤드라인이 1면 가득, 어디선들 당신을 다 알았지. 나는 당신의 이름을 오려내 내 망각의 앨범에 고이 붙여두었어. 당신 사랑은 어제 신문 같아. 쓰레기통에 버려진 신문, 한때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어쩌면 당신이 보호하고 있는 가엾고 사랑스런 그녀의 이야기 같기도 했어요. 아니 우리가 한때 겪었던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 신물이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랑이야기를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신기한 생각이 드네요.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아주 옛날의, 어쩌면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그뿐일, 그런 사랑에 관하여 난 생각합니다. 그저 머릿속의 어느 방에 오롯이 저장된 영화 속의 한 장면이거나 기억 속의 어떤 소리, 냄새에 대해서도.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보았던 그 시절에 좋아했던 향수의 이름들을 떠올립니다. 그 시절 나는 캘빈 클라인의 이터니티eternity라는 향수를 좋아했어요. 지금도 탁 쏘면서도 섬세하게 파고드는 그 냄새를 좋아하지요. 생각해보니 ‘영원’이라는 그 향수의 이름도 좋아했던 것 같네요. 그때 쓰고 바닥에 조금 남은 그 오래된 향수가 강렬한 냄새는 날아갔어도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독특한 향을 간직하고 있어요. 이십년, 삼십 년이 지난 향수도 뚜껑만 잘 닫아두면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답니다. 향수란 참 신비로운 인간의 발명품이지요. ‘인간은 향수를 발명한 존재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전기를 발명하거나 수세식 양변기나 전화를 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말이죠. 어쩌면 그 옛날 뉴욕 맨해튼의 갤러리에서 스치듯 만난 당신과 나도 희미하게 약해진 향기로 남아 서로의 뇌 공간 어딘가에 저장된 건 아닐까요?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훅하고 코끝을 스치는 모르는 사람의 향기가 하루 종일 기분을 달뜨게 하기도 하죠. 보이지 않는 옷이라고 불리는 향수, 문득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가 생각나네요. 냄새가 없는 인간 그르누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후각이 매우 발달해 세상의 모든 냄새를 기억하는 사람이었어요. 아름다운 냄새를 체취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죽은 자의 향기를 빼앗아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만드는 데 성공하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의 몸에 그 향수를 뿌리자마자 그 냄새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산채로 그를 잡아먹어버린다는 그 책은 기괴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 많은 세상의 향수의 이름들을 떠올립니다. 샤넬 넘버5, 크러쉬, 앤젤드림, 러브, 포이즌, 밤쉘, 포에버앤드에버, 러브인파리스, 앤비미, 마드모아젤, 플라워, 섹시블러썸, 프레젠스, 미스디올, 플레져, 센슈어스누드, 자스민누아, 리멤버미 그리고 이런 이름도 있답니다. 파란시간, 야간비행. ‘야간비행’이라는 향수를 뿌려보고 싶네요. ‘쎙떽쥐뻬리’라는 향수의 이름도 좋을 것 같아요.
며칠 전엔 거리마다 낡은 물건들을 가득 진열해놓고 파는 고물 시장엘 갔었어요. 길거리 가득 물건을 펼쳐놓고 파는 사람들, 거의 팔리지도 않는데 주말마다 가득가득 나와 있는 노점 상인들이 내게는 예술가로 보였어요. 파는 물건들도 나름 다 컨셉이 있어요. 내게 가장 재미있었던 건 쓰던 향수병들을 설치미술 하듯 죽 늘어놓고 파는 노점상이었어요. 향수가 남은 정도도 다 다른, 뚜껑도 달아나고 없는 낡은 향수병들을 보니 인간의 삶의 흔적이 참 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래된 향수병들을 보니 마치 세상 떠난 사람들의 향기를 병에 넣어둔 것 같다는 슬픈 생각도 들었어요. 사람은 가도 그가 쓰던 물건은 질기게 남죠. 이사를 가거나 세상 떠난 사람들의 서식처에서 흘러나온 그 많은 물건들은 서로 자신의 영원함을 과시하며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하죠. 병 바닥에 오분의 일 쯤 남아 희미한 향기만 남은 향수병이 얼마냐고 물으니 열 개 사면 팔만 원, 한 개는 만 원이래요. 웃으며 그걸 그렇게 비싸게 누가 사냐고 물으니 대꾸도 안하는 거예요. 얼마면 사겠냐는 망설임도 없이, 아무도 안 사도 싸게는 안 팔겠다는 품이, 마치 도도한 화가처럼도 보였어요.
향기가 날아간 낡은 향수병은 돈으로 얼마의 교환가치가 있을까? 오래된 향수를 모으는 수집가에겐 분명 가치가 있을 테지요. 마치 그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받는 당신과 내가 나란히 놓여있는 빈 향수병처럼 느껴지기도 했답니다. 오늘은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들었어요. 1941년 전쟁포로로 수용소에 갇혀있던 메시앙의 전설적인 음악이지요. 1941년 1월 포로수용소의 추운 겨울 저녁, 동료 포로들의 침묵을 앞에 두고 극심한 굶주림 속의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를 상상해보세요. 요한계시록에서 얻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영감으로 가득 찬 그 음악이 역설적으로 영원불변에 대한 묵상적인 환기를 불러일으킨다고 해설서에 씌어있네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지니는 놀라운 믿음과 희망을 노래한다고. 하지만 과연 꼭 그럴까요? 메시앙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미지를 음악으로 번역하며, 그 시간의 공간 속 희미한 향기로라도 영원히 남으라고 독백했던 것은 아닌지. 어쨌든 인류가 버리지 않은 꿈은 늘 영원이지요. 그 음악을 들으며 서랍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일기를 발견했어요. 당신을 맨해튼 소호의 갤러리에서 스쳐 지났던 바로 그때쯤의 일기였어요.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활어회처럼 싱싱했던 내 삶의 순간들이 한꺼번에 살아 돌아오는 밤, 지금 이렇게 끝내버린다면 억울한가? 나 자신에게 묻는다. 아니 아직 반도 못 온 길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는데, 방향을 잃고 펄럭이는 내 마음의 자락들이 한꺼번에 옷깃을 여민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냥 끝내버려도 남는 것이라곤 이렇게 생생한 기억 속의 순간들일 뿐, 이 삶의 남은 국수 가락을 붙들고 왠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알 수 없는 시간 속의 어느 시점…….” 그 때나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이나 우리들의 화두는 여전히 불안인가 봅니다.
불안하더라도 불안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남기, 불안이라는 향수에 희망이라는 향수를 섞어서 삶이라는 옷깃 여기저기 뿌리기. 내 친구,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