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백낙청의 신간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창비, 2021에 대한 서평 겸 독후감입니다. 3회에 걸쳐서 나누어 싣습니다. ― 편집자 주
* 인민이란 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같은 거부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되찾아야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권자 국가와 사회는 가능해진다. 사상의 자유라는 숲 속에서 학문과 예술이 꽃필 수 있다. 인민이란 용어는 대한민국 헌법 초안에서도 사용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도 대통령의 공식 담화문에서조차 버젓이 썼던 말이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기념사」, 1948.8.16.) “옹진반도의 전투 보고는 내가 믿기로는 침략을 악하다 혐의해서 자치에 대한 인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모든 인민을 고무할 것이다.”(이승만 성명, 「국민보」, 1949.8.3.) 제헌헌법을 기초했던 유진오는 “국회 본회의에서 윤치영 의원은 인민이라는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어째서 그러한 말을 쓰려 했느냐, 그러한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공박하였지만…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 일조각, 1980, 65쪽)
사람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산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소통하는 사회성 동물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 젖을 먹고 성장하면서 눈, 귀, 코, 입, 살갗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면서 행동으로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함’을 통해 ‘앎’이 생긴다. 그리고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운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름으로 분별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언어가 없으면 세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능력도 상실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 외부세계의 실체를 고해상도의 영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시신경이 뇌에 전달하는 정보는 시야에 들어와 관심을 끄는 몇몇 대상의 윤곽과 실마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시신경의 10~12개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10~12개에 불과한 소량의 시공간 가장자리 정보와 그림만을 가지고 세상의 모습을 재구성할 뿐이다. 새로운 껍질이라는 뜻의 신피질에 있는 뉴런은 외부 자극을 일련의 단계를 거쳐 ‘유형pattern’으로 분류해서 세상을 인식한다.레이 커즈와일, 『마음의 탄생』
우리는 세계의 시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체험한다. 세계의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색채감각을 체험한다. 즉,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재구성해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진화생물학자이자 구성주의 철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Humberto R. Maturana와 그의 제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의 통찰이다. 많은 생물학자와 뇌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인식이다.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앎의 나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산다. 동시에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없으면 세계를 인식할 수도 세상을 살 수도 없다. 지구상에는 2022년 현재 79억 넘는 인민들이 79억 개 이상의 세상을 살고 있다.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라는 소통 체계를 통해 이같은 제각각의 세상을 서로 주고받으며 이웃과 함께 공존과 공유의 세상, 공동체와 국가를 만들어내 역사를 창조해왔다.
인민이 마음을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
외부에 객관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계란 없다. 눈이 나쁜 개는 2원색의 눈으로는 흐릿한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지만 2억~3억만 개 이상의 후각수용체가 맡은 냄새로 아주 세세하게 세계를 인식한다. 귀가 없는 뱀은 눈과 진동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박쥐는 초음파로 세계를 인식한다.
개, 뱀, 박쥐가 인식하는 세계와 사람이 보고 실감하는 세계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객관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확언할 수 없다.
사람과 세계는 객관으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를 조건으로 끊임없이 생겼다 변하고 사라진다. 양자역학과 양자생물학이 밝혀낸 존재의 실상이 바로 그렇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면 물질의 궁극적 실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텅빈 공간과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에너지만 관찰될 뿐이다. 관찰자에 의해 관찰대상이 영향을 받고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가 드러난다는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역학은 세계와 인간의 상호관계성, 의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천오백여년 전 붓다는 이미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의 마음이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해서 만들어낸 세상임을 깨달았다. 기원전 5세기경 순전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실상을 밝힌 붓다의 철학에 대해 현대 물리학자들과 생물학자, 뇌과학자들이 경이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까닭이다.
사람의 세계관이란 디지털미디어가 만들어 낸 메타버스처럼 언어라는 개념으로 마음이 만들어낸 가상의 건축물이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도 현실에 대한 모든 착시도 언어에서부터 시작한다. 공자가 바른 이름正名을 강조한 것도, 붓다가 명색名色, 이름붙인 물질과 개념, namarupa과 식識, 분별심, vinnana을 깨달음의 핵심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이래 전쟁과 폭력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계와 현실에 대해 바른 이름을 붙임으로써 인민의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 현자, 철학자, 예언자라고 불러왔다. 이들은 단순히 세상과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밝은 눈으로 현실을 통찰하고 이름을 붙여 바른 길을 분별하고자 했던 이들은 온몸과 마음을 다 던져 인간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개혁과 혁명의 행동가였다. 행동을 통해 인민들에게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한 예언자였다. 선각자란 곧 실천하는 혁명가였다.
지금도 우리는 현실 사회와 세계에 바른 이름을 붙이고 밝은 지혜로써 사람의 세계관과 세상을 바꾸고자 인민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선각자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행동하는 선각자, 백낙청
이런 선각자 가운데 하나가 한국에서는 행동하는 지식인, 지성인이었다. 지식인은 새로운 세계관의 안내자, 촉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식과 정보의 전달자, 지식 정보 판매 상인과 지식인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기후위기가 전면화되고 기후재난에 대한 적응과 극복이 시급한 시대 과제로 떠오른 오늘날 이 같은 지식인의 깊은 현실 분석과 이름짓기는 더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하겠다.
백낙청은 한국의 현실과 세계에 대해 바른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 선각자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제기한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 대해 그럴듯한 겉포장을 뜯어내고 속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지식인들과 인민들에게 생생한 경종을 울려온 탁월한 이름짓기였다. 현실의 억압과 폭력에 순응하거나 풍요에 취해 해태 혼침 상태에 빠져 있던 지식사회와 인민들에게는 남북의 적대적 공존 상태와 한반도 남쪽에 군사정부를 세워 한국을 지배하기도 했던 미국의 존재를 화들짝 다시 환기시키는 일종의 파수꾼 역할을 자임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백낙청은 최근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2021.11.23.를 펴냈다. 정말로 왕성한 활동에 눈을 다시 부빌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름지은 용어에 대한 세세한 분석에서부터 치밀한 논리 전개까지 그 광범위한 독서와 관심의 폭, 사고의 깊이와 넓이는 나로서는 따라갈 수조차 없는 너무 먼 경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내 백낙청은 생태전환, 기후체제 전환, 풀뿌리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 실천가들, 특히 『녹색평론』 독자였던 사람들 다수와는 다른 시각, 다른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발을 딛고 있는 근거지가 다르면 현실도 다르게 보인다. 무엇보다도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행동도 달라진다.
나는 그것이 인민의 삶과 지역공동체, 국가 중에서 무엇을 우선 먼저 바라보고 초점을 맞추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민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사회성 동물인 사람의 생존근거지인 공동체와 상상의 산물인 국가 가운데 무엇을 먼저 바꾸고자 하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백낙청은 인민의 삶을 논의하면서도 시야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너머 국가를 먼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글은 비록 좁고 얕은 소견이지만 백낙청의 최근 저서와 동학과 개벽에 대한 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창작과 비평』(2021년 가을호) 특별좌담를 읽고 쓴 에세이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백낙청의 ‘개벽’과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화두의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근대 극복의 구체화된 개념으로 개벽의 세상을 언급한다는 것은 인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세계관과 행동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다. 어쩌면 백낙청의 기존의 이름짓기 전체를 정반합의 변증법 논리로써 다시 개벽시키는 일일 수도 있다. 일찍이 1994년부터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을 주창했다는 점은 그가 이름지은 모든 개념에 이미 그러한 개벽 세상에 대한 생각의 씨앗이 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성큼 문턱을 넘어선 기후재난 시대에 백낙청 이름짓기의 최종판으로서 ‘진리에 근거한 새문명’의 개벽을 꺼내든 그의 다음 걸음이 어느 문지방을 넘어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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