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동아리 '부너미'
모이는 곳 _ 서울 종각역 마이크로임팩트 스터디룸
모이는 사람들 _ 기혼 여성
추천도서
1.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민음사 펴냄)
2.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문학동네 펴냄)
3.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지음, 창비 펴냄)
4. 나의 첫 젠더 수업 (김고연주 지음, 창비 펴냄)
5.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동양북스 펴냄)
한옥을 따뜻하게 하려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한다. 아궁이에 땔감을 넣고 불을 불태우면, 그 온기가 구들장까지 전해져 집안 전체가 훈훈해진다. 아궁이에서 마루까지 온기가 닿기 위해서는 땔감에서 피어난 연기가 ‘부넘이’를 꼭 지나야 한다. ‘부넘기’, ‘불고개’라고도 불리는 부넘이는 연기의 역류를 방지하고 열기가 순조롭게 방을 데울 수 있도록 돕는다. 언뜻 들으면 사소한 장치인듯하지만, 부넘이가 없으면 한옥은 절대 따뜻해질 수 없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살이 에는 추위의 겨울을 ‘부넘이’라는 숨은 조력자 덕에 우리 선조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한옥에 ‘부넘이’가 있다면, 우리 사회에는 ‘부너미’가 있다. ‘부너미’는 사회에 페미니즘을 전하기 위해 엄마들이 모여 만든 독서동아리다.
‘페미니즘’이 연일 화두가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움직임이지만, 수많은 오해로 ‘페미니즘’은 얼룩져버렸고 과도한 왜곡으로 인해 본래의 의미는 변질되어 버렸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스트’를 여성우월주의자, 피해 의식에 절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여자들로 낙인찍으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를 꺼린다. 이렇게 ‘페미니즘’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전달되지 못하고, 역류하기 일보 직전이다.
엄마들은 이런 상황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들은 차별이 없는 세상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까’가 이들의 주 고민거리였고, 거듭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페미니즘이 좀 더 우리 사회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스스로 ‘부넘이’가 되는 것이었다.
8월 16일 종각의 한 스터디카페로 ‘부너미’를 찾아갔다. ‘부너미’는 매월 셋째 주 수요일 11시부터 2시간 동안 모임을 한다. 종각을 찾기 전, 사람의 모든 의욕을 떨어뜨리는 뜨거운 기온에 회원들이 모임을 많이 왔을지 걱정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회원들이 활기차게 인사를 나누고 담소하고 있었다. 나의 걱정은 기우였고, 모든 회원이 34도를 웃도는 기온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부너미’를 찾아왔다. 한여름의 더운 열기도 이들의 열정을 잠재울 순 없었나 보다.
‘부너미’에서 이번에 읽은 책은 『페미니즘을 팝니다』였다. 이 책은 외국 도서의 변역본이기에 한국의 현 상황과는 다소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회원들은 한번에 그 내용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줄을 치고 소리 내어 읽어가며 완독했다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올해의 화제 키워드는 단연 ‘페미니즘’일 것이다. 페미니즘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복잡한 이 움직임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대표 이성경 씨는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페이스북을 통해 회원을 모집했다. 그렇게 꾸려진 동아리가 지금의 ‘부너미’가 되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페미니즘 현주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독서동아리의 대표 이성경 씨의 의견을 물었다.
“저에게도 사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는 ‘센’, ‘독한’, ‘이기적인’, ‘상식 밖의’, ‘불행한’ 여성이었습니다. 뭔지 잘 몰랐고요.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페미니스트로 호명되고 싶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이유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나는 이상한 여자가 아닌데 ‘이상한 여자’로 비유 당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니까요. 그러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때의 제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깊었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페미니스트에 대해 잘 모르면서 부정적인 존재로 이해하곤 해요.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들,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여성우월주의자, 피해 의식에 절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세력들, 성에 자유로운 (혹은 문란한) 여자들, 모성애가 없는 여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바라는 역차별 주의자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하죠.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말문을 열 때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하며 페미니스트와 선을 긋는 경우도 봤습니다.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보다 ‘오해’가 훨씬 더 깊습니다. 잘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손가락질을 한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의 가치를 깎아내리기 전에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함께 읽고, 듣고 고민하며 잘못된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원들은 독서 모임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회원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여성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회원들은 본인이 겪었던 혹은 주변에서 겪고 있는 성차별적인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모두가 상처받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지 토론했다.
‘부너미’ 엄마들의 가장 큰 임무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성 인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지난 독서 모임에서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읽고, 아들과 딸에게 엄마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지 손편지를 적는 활동을 했다. 편지 낭독 시간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낭독을 듣다 보면 ‘엄마’가 딸인 ‘나’에게 해주는 다정하고 따뜻한 응원의 말 같아서 눈물이 나고, 살면서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할 우리 아이들이 떠올라서 울컥했어요.”
‘부너미’에서는 편지쓰기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페미니즘 동화 추천하기, 불편한 동화를 성 평등 동화로 각색하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함께 모여 책을 고르고, 읽으면서 배운 것이 정말 많다고 ‘부너미’ 회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원래는 책을 거의 안 읽었어요.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부너미’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독서 모임을 하게 되면 ‘책 읽기’에도 약간의 강제성이 생기더라고요. 그 강제성이 오히려 저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 것 같아요. 덕분에 매달 열심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이고, 함께 울고, 웃고, 깨닫는 시간은 서로에게 큰 위로와 성장이 됩니다. 책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 소통하는 시간은 단순한 활자의 내용 이상의 감동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엄마들이 페미니즘의 언어를 통쾌해하면서도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욕먹거나 유별나 보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죠. 하지만 비슷한 입장의 엄마들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의 지혜를 모으다 보면 좀 더 유쾌하고 즐겁게 페미니스트 엄마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럿이 모여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부당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노하우를 배우기도 해요. 일상의 차별과 억압에 불편하지만 말 못 하고 참던 엄마들에게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은 안전하고 즐거운 놀이터이자 든든한 피난처인 셈이죠.”
‘부너미’는 앞으로 계속해서 책을 읽을 것이고, 글을 쓰며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해 낼 것이다. 현재 정식 출판을 목표로 하고 글을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엄마’의 힘은 세다. 엄마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통찰하고, 처한 상황에 꾸준히 문제를 제기한다면 사회는 살기 좋은 온기를 품은 곳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겨울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처음 만난 이들은, 홑겹의 겉옷을 입는 계절이 오도록 꾸준하게 만나고 있다. 책을 통한 배움과 책으로 받은 위안은 그들을 더욱더 단단하고 견고한 사람, 그리고 엄마로 만들어 주었다. 불볕더위도 굽힐 수 없었던 이들의 열정은 긍정적인 사회변화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 작성자: 청년취재단 정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