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팔루디의 1991년 작 『백 래시』는 사회적 활동과 직업, 사랑과 결혼, 그리고 육아와 모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여성 및 여성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제압하는 남성 권력의 반격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지성의 부재! 우리 문학계에 오래 드리워진 먹구름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지성의 칼날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대뜸 반론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것이다. 우선, 내 자신조차 지성이라는 단어가 진부하다. 그러나 일단 달리 대체할 만한 용어가 없다. 다음, 문학이란 상상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소리가 들린다. 상상? 어떤 상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허하고 막연한 헛생각들? 그저 독특한 단어들이 연상시키는 미묘한 감각들? 그도 아니면 세상의 변화나 자연만물의 형상에 대한 기발한 표현? 그런 것이 다 문학을 구성하거나 작품의 껍질이지만, 글쎄, 그런 것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문학의 위엄과 자존심에 침을 뱉는 일이다.
세상만사나 자연 변화에 대해 기발한 표현을 덧대어 짐짓 그럴 듯한 문자 행렬을 구성하였다 해도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의 자장, 문학의 경계, 문학의 확산을 의미 있게 주창하는 뜻에서 쓰이는 용어, 즉 ‘문학적인 일’도 아니다. 통속적인 의미의 ‘문학적’인 장식을 걸친 음풍이요 농월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작가 코스프레’에서 생략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지성이다. 비록 진부하지만 여전히 이 단어의 힘은 살아있다. 단, 지성이라고 해서 어떤 지식 분야의 제도적 연구과정이나 그러한 연구의 외적 결과물인 엄밀성의 논문을 문학 또는 그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문학은 연구도 아니고 논문도 아니다. 그러나 오랜 연구와 성찰, 깊이 있는 사색과 당대의 삶에 대한 팽팽한 긴장을 바탕으로 하여 문학은 즉흥적인 감각의 표출이나 진부한 관습 또는 너무나 안이하고 게으른 문자 구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형식과 문장의 독창성은 세상에 대한 획기적이며 놀라운, 충격적이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의 시선에 의하여 탄생한다.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면 기존의 문장과 형식을 벗어나거나 최소한 그러한 문장과 형식을 비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문학이 탄생한다.
소설가 이외수의 짧은 글 「단풍」에 뒤엉켜 있는 일말의 소란은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가로운 소동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문학계의 오랜 숙제, 곧 지성의 부재를 실감케 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단풍이 피고 지는 것을 여성성에 연관하여 표현하는 것, 심지어 불편하거나 저속하게 여기는 단어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꽤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였던 바 이에 당사자인 이외수 및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몇몇 작가들 그리고 ‘문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다’고 한탄하는 꽤 많은 댓글들은 문학의 문학다움이 무엇이며 그 장르적 특징과 그 역사적 경로와 그 당대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전혀 검토하지 않은, 그럴 생각조차 부재한 무지와 게으름의 소산이다.
예를 들어보자. 박숙자의 논문 『근대적 주체와 타자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를 보면 ‘소녀’라는 표현이 한국 문학에 출현한 것은 1917년에 발표된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다. 박숙자는 “그 전에도 ‘소녀’라는 기표가 사용되었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소녀’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이 ‘의심의 소녀’를 비롯해 이광수 등 근대문학 초기의 기록들에서 손쉽게 발견되는 소녀의 표상, 곧 ‘홍조’분홍빛 뺨나 ‘로맨틱한 사랑’, ‘연애에 대한 공상’ 등의 ‘근대적 소녀’ 담론은 “남성 주체의 판타지”이다. 1932년 2월 『삼천리』에는 당시 이화여전에 재학 중인 김현순의 민요 공연 기사가 실렸는데 ‘수천 청중을 뇌쇄식혓슴이 엇지 비둘기 가치 청초한 양의 자태에만 매엿스랴’고 표현된다. 근대문화의 초입에서 여성을 ‘비둘기’ 같은 자태로 ‘수천 청중을 뇌쇄’시켰다는 언술이 등장하는 것은 ‘봉건적’이라기보다는 ‘근대적 남성 주체’의 권력적 시선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근대적 남성 주체는 배제, 추방, 감금, 포섭 같은 방식뿐만 아니라 허구적 낭만화의 그물을 짜서 그 안에 타자를 임의로 구축하여 권력 주체의 “판타지를 타자의 몸에 각인시킴으로써 오히려 타자성의 흔적조차 지우며 타자를 구성”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김형중은 이상의 ‘금홍이’『날개』, 장용학의 ‘안지야’『원형의 전설』, 최인훈의 ‘은혜’『광장』, 황석영의 ‘심청’『심청』, 방현석의 ‘리엔’『랍스터를 먹는 시간』 등의 여성 주인공이란 스스로 말하지 않는(못하는) 하위 주체로 “남성들의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재현되어 왔다고 말한다.
여성은 언제나 표백된 채로 밀폐용기 안에 갇혀 있다가 때로는 ‘소녀’로, 때로는 운명의 아이를 낳는 ‘마지막 여인’으로, 때로는 거친 풍파를 헤치고 나온 자를 보듬어주는 ‘어머니’로, 권력 주체인 남성이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호명당하여 문학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작품들이 일정한 시대의식과 주도면밀한 형식과 이중나선으로 뒤엉킨 혐오와 사랑의 일그러진 풍경을 그려냈기에 망정이지, 도대체 단풍이 피고 지는 것에 억지로 편입되는 일그러진 여성성이라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긴 말을 할 것도 없이, 비교적 젊은 세대들의 반응이란 한마디로 ‘구리다’는 것이다. 어디 술집이나 지하철 같은 데서 들려오는 ‘쩐내 나는 푸념소리’ 같다는 냉소도 있다. 차라리 ‘여성 혐오’라서 문제라기보다는 단풍이 피고 지면 또 한 세월 간다는 상념 자체가 너무나 진부하고 낡고 케케묵은 포즈라서 문제라는 얘기다. 이럴 때 한국 문학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지성의 부재요 당대적 감각의 완벽한 결핍이란 비단 이외수의 ‘단풍’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격한다. 문학의 자유라며 역공을 취하고 있으니 오늘 거론하는 책 『백 래시』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물론 이 책은 ‘단풍’에 취한 어느 작가의 헛헛한 소리와 그 반박에 관한 책은 아니다. 무게도 다르고 깊이도 다르다. 단 현상은 동일하다. 기존의 제도권력이나 언어관습에서 무척이나 자유롭게 살아온 남성들이 일정한 도전이나 저항에 직면했을 때 오히려 더 거세고 집요하게 반격을 가하는 것, 즉 백 래시는 ‘단풍’ 같은 소동에서부터 우리 사회 남성 권력의 모든 국면에서 전개된다.
이 반격의 미국적 현상을 분석한 수전 팔루디의 1991년 작 『백 래시』는 사회적 활동과 직업, 사랑과 결혼, 그리고 육아와 모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여성 및 여성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제압하는 남성 권력의 반격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큰 변화를 앞두고 위협을 느낄 때 반격의 선두주자들이 변화의 공포를 이용”한다고 분석하면서 수전 팔루디는 거의 모든 정치권력과 미디어 장치와 오랜 습속을 장악한 남성 권력의 거센 반격백 래시에 일단 패배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15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사회구조의 속박 안에서, 그리고 페미니즘 혁명 이전부터 거의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문화적인 관례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성과로 족쇄를 끊어내기보다는 그 족쇄를 더욱 빛내고 말았다.
하지만 환멸은 출발점이다. 실망과 패배는 다르다. 여성들이 사기당한 기분이라는 사실,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장신구를 살펴보다가 거기서 희미하게나마 쥐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아직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우린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 이 글은 2018년 10월 29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