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강을 더 좋아한다. 강변에 앉아서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을 하루 종일 보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강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산에 대하여 한마디도 할 수 없듯이, 강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할 만한 심미적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랭스턴 휴즈의 시 ‘니그로 강에 대해 말하다’를 의식하며 이렇게 자백하는 중이다. 그 첫 시작을 읽어보자.
나는, 강을 안다.
태고적부터, 인간 혈맥에 피가 흐르기 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던 강을 나는 안다.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나는 이렇게 쓸 수가 없다. 나는 강을 모르며 유장한 강물에 흐른 핏자국과 땀방울과 신음소리를 잘 알지 못한다. 몇 마디 해보라고 하면 못 이기는 체하며 강과 인간, 강과 문화, 강과 물산, 강과 역사에 대해 더듬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찌 강을 알아서 하는 행동이겠는가. 나는 휴즈처럼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고 말하기 어렵고, 이어지는 시구처럼 ‘인류의 여명기에 나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목욕했으며/ 나는 또한 콩고 강가에 오두막 지어 물소리를 자장가 삼았다’고 말할 수 없으니, 강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라인 강이나 네카어 강에 바친 횔덜린의 시나 조지프 콘래드가 템스 강을 묘사한 주술 같은 문장을 기억하고 있으나, 역시 강에 대해 안다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 강으로 가보기도 했다.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어지간한 도시들은 모조리 강을 끼고 발전해 왔으니 그 어디를 가더라도 결국은 그 도시의 강을 한나절 이상은 마주치게 마련이라서 굳이 강 문화 답사는 아니었지만 템스런던, 타인위어더럼, 슈프레베를린, 엘베드레스덴, 허드슨뉴욕, 론마르세유 강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휴즈처럼 ‘나는, 강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드리나 강이라고 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드리나 강을 가본 적도 없다. 그 다리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유명하다고 하였으나 그 다리를 보기 위해서 유명 관광지도 아닌, 오히려 내전의 상처가 남아있는 그 동유럽의 한복판으로 갈 엄두도 잘 내지 못했다. 이미지나 동영상을 검색해 보니 적어도 모니터 상의 드리나 강은, 그리고 그 다리는 파리의 센이나 피렌체의 아르노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강의 역사와 문화가 어디 풍광의 문제인가. 센이나 아르노도 시각적인 미보다는 그 강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기억 때문에 센이 되었고 아르노가 된 것이 아닌가.
드리나 강과 그 다리에 대한 나의 불철저한 호기심은 축구선수 루카 모드리치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때 우승은 프랑스가 했지만, 준우승의 크로아티아가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 중심에 모드리치 선수가 있었고 그는 러시아 월드컵 최우수선수인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가을에는 유럽축구연맹의 ‘올해의 선수상’도 받았다. 크로아티아 대표팀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음을 공인받은 것이다.
그의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에 절반을 기대고 있는 항구도시의 연속이지만 나머지는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몬테네그로와도 국경의 끄트머리를 맞대고 있으며,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코소보가 있다.
이 국명들이 지난 30년 가까이 어떤 사건으로 우리에게 긴급 외신이 되었는가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불안정한 상태의 분리와 독립, 유고 내전, 코소보 사태, 사라예보 사태 등의 외신 속에서 이 구유고 지역의 여러 나라들은 다시 한 번 ‘발카나이즈Balkanize’의 혼란을 겪었다. 이 단어는 ‘적대시하는 여러 작은 지역으로 분열시키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구소련 해체 이후의 상황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발칸반도 전지역에서 진행된 갈등과 분열과 강제통합과 불가피한 전쟁의 역사를 가리킨다.
크로아티아의 캡틴 모드리치의 할아버지는 세르비아계 반군에게 처형당했다. 모드리치는 “수류탄이 빗발치는 도시에서 전쟁난민이 된 소년에게 축구는 유일한 삶의 즐거움”이었다고 회고한다. 수비수 데얀 로브렌도 나에게 이 지역에 대한 강한 애착의 가능성을 남겼다.
데얀 로브렌은 1989년 생이다. 어린 시절 유고 내전을 겪어야만 했다. 부모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이고 고향은 제니카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에서 탈퇴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로브렌의 가족은 옷가지만 겨우 챙기고서는 긴급히 뮌헨으로 피난을 가서 7년을 버텼다. 축구가 그를 구원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유스팀을 거쳐 대표팀을 지켜냈다.
로브렌이 좋아하는 영화가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다. 한국전쟁의 재현 방식에 관해 비판적으로 검토할 만한 게 숱한 영화지만, 그러나 그런 일을 논평가의 관점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 『태극기 휘날리며』는 각별하다. 로브렌은 이 영화를 네 번이나 봤다면서 “나 역시 이런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라며 마지막 장면에서 “유골을 부둥켜안으며 형제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원빈이 신발을 보는 장면은 너무 감동적이어서 울었다”고 말했다.
드리나 강은 도나우 강의 지류로 길이 약 990㎞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를 따라 흐른다. 슬로베니아 북부의 알프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슬로베니아 중앙과 크로아티아의 북쪽을 가로지른 후 수도 자그레브를 지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의 국경이 되며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도나우 강에 안긴다.
그 한 부분,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에 드리나 강의 다리가 있다. 길이 180m에 11개의 아치로 된, 1577년 축조된 오스만 제국 시절의 기념비적 건축이다. 이 다리 이전의 역사에서 드리나 강 양안은 서로 다른 세계다. 인종, 언어, 종교, 관습이 달랐고 그래서 싸웠다. 다리가 세워진 후 교섭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분쟁도 더 쉬워졌다. 20세기의 두 차례 전쟁 기간에는 이 다리를 확보하는 게 전략상의 관건이었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는 이 강과 다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400여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작품이다. 196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소설 이후에도 드리나 강의 다리는 희망과 비극이 교차했다. 1992년의 비셰그라드 대학살의 장소가 이 다리였으며, 드리나 강물을 따라 1993년의 보스니아 사태, 1998년의 코소보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니 어찌하여 산을 알고 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산들과 그 강들을 저 자신의 일기장인 듯 깊이 있게 써내려간 책을 읽을 뿐이다. 이 소설은 소설이니만치 일반 서적과 달리 ‘서문’은 없지만, 그 전체 24장 중 그 1장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서문’ 역할을 한다.
“거무칙칙하고 가파른 산들의 폐쇄된 곳으로부터 거품을 튀기며 전속력으로 녹색의 물살을 만들어내며 흐르는 드리나 강의 바로 이 자리에는 널찍한 아치가 11개나 되는, 조화롭게 깎아자른 듯한 돌다리가 놓여 있다(중략).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 하얀 다리의 넓은 아치들 사이로 푸른 드리나 강만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 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위로는 남녘의 하늘을 품은 비옥하고 기름진 공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듯하다.”
★ 이 글은 2018년 10월 15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