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언제나 두려움 속에서,
희망을 향해 책장을 넘기다
당신이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이유는 불행한 때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다른 세계를 갖고 다니는 것과 같다.
― 오르한 파묵, 《Öteki renkler》, 1999
세계는 왜 뒷걸음질 치는가
인연이란 사람 사이에만 있지 않다.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있다. 특히 책과 맺은 인연은 자기 변화의 계기가 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책 속에서 영감을 얻는다면, 책은 국가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당연히 모든 책이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책은 이야기 혹은 정보로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책과 인연을 맺는 시기도 적절해야 한다. 읽다가 아무렇지 않게 던져둔 책이 몇 년을 지나 삶을 폭풍우 속으로 몰아넣는 일도 있다.
내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만화책을 사려고 용돈을 모아 서점에 갔는데, 거기에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어떤 책을 사러 왔냐는 물음에 그만 “보고 고르려고요”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결국 선생님에게 선택권을 넘겼고, 그렇게 만난 《어린 왕자》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으로 이어졌다. 3학년 겨울에는 조숙한 독서가 가능했다. 이상의 《날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문예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지금도 가끔 내가 시인이 된 게 국어 선생님과 마주친 소도시의 작은 서점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청와대 5년이라는 오랜 긴장의 시간을 벗어나 늦잠에 익숙해질 무렵 처음으로 집어 든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산문집 《가재걸음》이다. 책장에 여러 책들이 있었지만, 이 책의 부제인 ‘세계는 왜 뒷걸음질 치는가’에 눈길이 닿았다. 맞다. 갖은 고비를 넘어 이룬 것들이 하루아침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새로 형성된 가치들이 깡그리 부정되기도 했다. 늘 후회가 먼저 자리 잡는 법, 잘된 일보다 잘되지 못한 일들이 가슴에 묵직하게 남아 있던 탓이리라.
《가재걸음》은 피터 홉커크의 《그레이트 게임》을 불러왔다. 《가재걸음》에 실린 〈왓슨 박사와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이〉라는 글에서 “매일 밤마다 조금씩 음미하면서 읽었다”라고 에코가 적은 책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검색해 보니, 국내에 번역 출간이 되어 있다. 더군다나 책을 펴낸 곳이 사계절출판사 아닌가.
사계절출판사와는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 저작권을 중계한 일로 인연이 깊다. 그때까지 남북 사이에는 저작권과 관련한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압록강 사이로 불법 계약서가 오갔다. 저작권 계약에 대한 경험도 전무했다. 그런 맨바닥에서 신뢰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 《임꺽정》이었다. 홍명희의 손자인 소설가 홍석중을 만나기 위해, 사계절 강맑실 대표와 함께 금강산과 개성을 오가며 남북 간 저작권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체제는 달라도 같은 언어로 쓰인 결과물은 민족 전체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임꺽정》을 출판하고 저작권 계약까지 성사시킨 사계절출판사의 노력이 결코 간단치 않았다.
《가재걸음》을 읽고 며칠 뒤 《그레이트 게임》을 어렵게 손에 쥘 수 있었다. “재미있는 책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라는 에코의 말과 달리 책은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캅카스에서 티베트까지, 젊은 열정과 무모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면서 진이 빠졌던 몸과 마음이 되살아났다. 적절한 인연으로 새 기운을 얻는다.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초부터 거의 100년,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사막과 언덕에서 전쟁을 벌인 영국과 러시아의 이야기다. 왕의 궁정들에서 전개되는 잠복, 참수, 암살이 주요 소재다. 젊은 군인, 냉철한 모험가, 측량사들이 순례자나 상인으로 변장하고 광대한 지역을 누비며 지도를 그리고 정보를 수집했다. 러시아인들은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려고 욕심을 부렸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식민 제국을 보호하며 그 국경에 꼭두각시 통치자와 칸, 군주들이 다스리는 완충국을 만들려고 했다. 665쪽의 본문 페이지 내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국경 산등성이 위에서 러시아와 영국의 군대가 포위 작전, 전쟁, 유격전을 벌인다.
《가재걸음》에서 에코는 이 책을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권하고 있다. 에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앙아시아가 다시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100년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산에서 1만 6,000여 명의 영국 군인과 시민들이 학살 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었다. 험난한 산간 지형과 그 지형에 익숙한 부족들, 기만과 속임수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 가장 막강하고 잘 훈련된 군대도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에코의 경고대로 “우리가 세계화되었다고 믿는 세상에도 여전히 서로 간의 무지가 가득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왜 지도자들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오류를 반복할까.
대통령이 읽은 책들이 의미하는 것
한 권의 책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는다. 가까운 예로 김대중 대통령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희호 여사는 김 대통령의 부탁으로 여러 도서를 청주교도소로 넣어 주었는데, 어느 날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임의로 책 한 권을 구입해 전달한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백한다.
몇 번을 정독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감명을 받았다. 아무것도 없는 독방에서 인류의 미래를 설계했다. 부수고 다시 짓는, 즐거운 상상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지침서였다.
― 김대중, 〈21세기는 누구 것인가?〉, 《김대중 자서전 2》, 삼인, 2010
《제3의 물결》은 김 대통령 자신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희망을 줄 책이었다. 특히 ‘아주 불행한 시기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세계’였다.
그로부터 17년이 흘러 사형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 세계는 이미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김 대통령은 더 큰 꿈을 꾼다. 한국을 지식과 정보의 강국으로 만들고 싶었던 오래된 꿈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한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로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1998년 12월 21일에는 정보통신부가 21세기 국운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서라는 당부와 함께 남궁석 삼성SDS 사장을 정보통신부 장관에 임명한다. 대통령의 독서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첫걸음이었다. 지금 그 꿈이 대부분 실현됐다는 것이 또한 놀랍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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