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다음 생엔 내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자살했다. 당신 나이 스물아홉 살에. 여름이 한창인 1988년 초복이었고, 유서 한 장 없는 죽음이었다. 대체 청산가리는 어디서 어떻게 구한 걸까. 엄마는 아버지가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경찰에게 매달렸다. 경찰은 주검을 발견한 즉시 아내 동의 없는 부검을 마치고 사건을 하루 만에 종결시켰다.
출장 간 남편이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은 애도를 방해한다. 시신의 부패가 심한 탓에 가족들의 만류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엄마는 살면서 종종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고, 그리고 좇아갔었노라고 어느 날 내게 말했다. “꿈꾼 거 아니야?”라고 힐난하듯 대꾸하자 “아직도 꼭 어디 살아 있을 거 같아”라고 답하던 엄마 목소리엔 물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엄마의 은폐 덕분에 아버지의 죽음을 삼십 년 가까이 교통사고로 알고 살았다. “사실은 자살”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살짝 놀랐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자살이라면, 근사한 측면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다.
요절은 한때 나의 꿈이었는데, 나는 죽지 못했다. 요절을 하려면 세상에 뭔가 멋진 글을 남겨야 하는데 그런 글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때는 꽤 진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내 꿈을 대신 이뤘다. 내가 요절할까 봐 본인이 죽어 버린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멋진 글’ 대신 ‘멋진 나’를 남겼으니까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살면서 가끔 필요하고 때로 간절했던 ‘부정’의 결핍을 나는 그런 식으로 채우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해 나는 다섯 살, 동생은 세 살이었다. 엄마는 고작 스물일곱 살이었다. 나중에 내가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엄마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그제야 실감했다. 나의 스물일곱은 뭐든 허물고 새로 시작해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가능성의 나이였다. 왜 나를, 동생을 버리지 않았냐고, 따지듯 물었던 날도 있었다. 정말 궁금했다.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희생되어도 좋은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엄마의 스물일곱을 내가 방해하고 어쩌면 훼손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견디기 힘들었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삶을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었으나, 엄마에게는 그저 비난으로 들렸을 말을 참 잘도 지껄였다. 자라는 동안 나는 송곳 같은 자식이었다. 후벼 파기가 전공이었다. “다른 집에는 다 있는 아빠가 우리 집에는 왜 없어”라고 발버둥 치며 울던 여덟 살 때부터 나는 볼썽사나운 자식이었다.
“네가 이런 글을 썼으면 좋겠다.”
내게 《달려라, 아비》를 선물한 어른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 하던 신문사의 기자이자 등단한 시인이었다. 나는 책 제목을 흘끗 보곤 ‘아비’가 ‘하니’처럼 씩씩하고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비가 아버지를 뜻하는 말인 줄이야. 책을 펴고 홀린 듯 읽어 나가면서 김애란의 문장과 행간에서 일종의 연대를 느꼈다. 내 아버지도 지구 어디쯤에서, 지구가 아니라면 외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면 우리도 언젠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라도 ‘사랑의 인사’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서로의 부재 속에서도 나름대로 썩 잘 살고 있음을 그렇게 확인할 수도 있는 거니까.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나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 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백십 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 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책을 덮은 뒤 아버지가 그저 ‘여기’ 없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삶이 한결 가벼워졌다. 달리는 아버지 모습을 상상하자 기분마저 좋아졌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다시 가정환경 조사서를 쓰게 된다면 아버지 직업란에 ‘마라토너’라고 적고 싶을 정도로. 제 부모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속 어딘가 서걱서걱 긁히던 나였다. 아버지의 ‘없음’을 나는 〈달려라, 아비〉를 통해서야 비로소 긍정하고 극복했다.
김애란이라는 작가를 소개한 어른은 내게 ‘김애란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나는 ‘김애란을 만나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문화팀 발령 이후 첫 인터뷰를 맡게 됐을 때였다. 그는 연재 중이던 장편소설《두근두근 내 인생》이 출간되고 나면 만나자고 몇 차례 고사했지만, 나는 그 전에 꼭 만나고 싶다고 졸랐다. 그의 글을 만난 이후 내 삶이 그에게 빚진 부분이 많았으므로.
나를 〈시사IN〉 기자로 꼭 뽑겠다고 고집한 당시 편집국장이 ‘좋았다’고 했던 자기소개서 역시 그의 문장에 빚졌다. 나는 김애란의 단편 〈영원한 화자〉의 문장을 인용해서 자기소개서를 썼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나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 봐 무릎이 떨리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최종 면접을 보고 온 날, 밤새 뒤척이며 또 김애란의 문장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절실함은 언제나 내게 이상한 수치심을 주었다”〈종이물고기〉라던. 김애란이 그 문장을 떠올렸던 날도 입학 면접 날이었다고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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