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 책은 현대의 일곱 국가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일어난 위기와 그에 대응한 선택적 변화를 비교하며 이야기식으로 써 내려간 입문서이다. 나는 그 일곱 국가의 위기를 개인적으로 경험했고, 개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선택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그 위기를 분석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코코넛 그로브 화재 사건의 유산
두 이야기 – 위기란 무엇인가? - 개인의 위기와 국가의 위기 – 이 책에서 다룬 것과 다루지 않은 것 – 이 책의 구성
두 이야기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한두 번쯤 개인적으로 격변이나 위기를 맞는다. 그 위기는 개인의 변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국가적 차원의 위기를 겪는다. 그런 위기는 국가적 변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해결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개인의 위기를 해결한 사례에 대해서는 학문적 연구도 많고, 심리 치료사가 남긴 일화적인 정보도 많은 편이다. 여기에서 얻은 결론을 국가 위기를 해결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경험한 두 가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개인의 위기와 국가의 위기를 설명해보려 한다. 어린아이는 네 살쯤 되어야 시기에 대한 기억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데, 그 이전의 사건도 흐릿하게 기억하긴 한다. 이런 일반화는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시기를 기억하는 최초의 사건인 보스턴의 나이트클럽, 코코넛 그로브 화제Cocoanut Grove Fire는 내가 다섯 번째 생일을 지낸 직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화재의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의사이던 아버지의 섬뜩한 설명을 통해 그 사건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1942년 11월 28일 화재가 발생해 불길이 급속도로 번지며 손님들로 붐비던 코코넛 그로브라는 보스턴의 나이트클럽을 완전히 휘감았다. 안타깝게도 하나뿐이던 출입구마저 차단된 상태였다. 질식이나 연기 흡입, 압사나 화상 등으로 총 492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다쳤다. 보스턴의 의사들과 병원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화재로 다치고 죽어간 직접적인 피해자뿐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가족과 친인척, 즉 심리적인 피해자 때문에도 보스턴은 큰 위기에 빠졌다. 생존자들도 수백 명이 죽은 사고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날 오후 10시 15분까지는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고, 모두가 추수감사절 주말과 미식축구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특별 휴가를 나온 군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오후 11시쯤에는 대부분의 피해자가 죽은 뒤였고 그들의 친척과 생존자는 위기를 맞았다. 꿈꾸던 삶의 행로가 크게 뒤틀렸고 소중한 사람은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 있다는 걸 부끄럽게 여겼다.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던 중심축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화재는 생존자만이 아니라 당시 겨우 다섯 살이던 나를 포함해 화재 자체와 무관한 보스턴 시민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정의로운 세계라는 우리의 믿음이 뒤흔들렸다. 못된 소년들과 사악한 사람들이 벌을 받은 게 아니었다. 피해자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음을 맞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적잖은 생존자가 사건의 충격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소수였지만 자살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몇 주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상실감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세상 모든 게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슬픔을 억누르며 각자의 가치관을 검토하고 삶을 다시 추스르는 느릿한 과정을 시작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도 새로운 짝을 찾아 재혼했다. 하지만 최선의 경우에도, 또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코코넛 그로브 화재 이후에 형성된 새로운 정체성과 화재 이전에 확립한 과거의 정체성이 모자이크mosaic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책에서는 이질적 요소가 거북하게 공존하는 개인과 국가를 ‘모자이크’에 비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코코넛 그로브 화재는 개인적 위기의 극단적 사례이다. 그러나 나쁜 일이 많은 피해자에게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에서만 극단적일 뿐이다. 1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화재로 위기를 맞은 피해자가 너무 많아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친척이나 친구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개인적 비극을 경험한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비극도 코코넛 그로브 화재가 492명의 피해자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듯이, 당사자뿐 아니라 당사자와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아픔을 준다.
이번에는 국가적 위기를 예로 들어보자. 내가 영국에 거주하던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당시 영국은 느릿한 국가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 친구들과 나는 그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영국은 한때 과학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며 풍부한 문화사로 축복받은 국가였던 까닭에 세계 최고의 함대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시대의 자존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0년대 영국은 경제적으로 추락했고 제국과 영향력을 상실한 뒤라 유럽에서의 역할을 두고 갈등하는 중이었다. 해묵은 계급 격차, 이민자 물결과도 씨름하고 있었다. 1956~1961년에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이때 영국은 남은 전함을 빠짐없이 폐기했고, 처음으로 인종 폭동을 겪으며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수에즈운하에서는 세계적인 강대국답지 않게 자주적 작전 능력까지 상실한 모습을 보이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영국인 친구들은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든 이해하며 미국인 방문객이던 나에게 설명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자 영국 국민과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영국의 정체성과 역할을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의 영국은 새로운 자아와 옛 자아의 모자이크이다. 영국은 제국의 위상을 버리고 다민족 사회가 되었으며, 복지 정책을 채택하고 고등교육 기관을 운영함으로써 계급 격차를 줄였다.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던 해군력과 경제력을 되찾지 못했고, ‘브렉시트Brexit’에서 보듯 유럽에서의 역할을 두고 지금도 갈등을 빚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 6대 부국에 속하고 명목상 군주를 섬기는 의회 민주주의국가이며, 과학과 테크놀로지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게다가 유로가 아니라 파운드를 자국의 화폐로 유지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이야기는 이 책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위기와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닥친다. 한 사람의 개인부터 팀과 기업, 국가와 전 세계까지 규모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 위기는 외부적 압력으로 야기될 수 있다. 예컨대 개인이라면 이혼으로 배우자와 헤어지거나 배우자의 죽음으로 혼자가 되기도 한다. 또 국가는 다른 국가의 위협이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다. 한편 내부적 압력도 위기의 원인이 된다. 개인에게는 질병, 국가에는 사회적 갈등이 내부적 압력의 대표적 예이다. 외부적 압력이나 내부적 압력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려면 선택적 변화selective change가 필요하며, 이는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선택적’이란 단어이다. 개인이나 국가는 완전히 변할 수도 없고 과거의 정체성을 규정하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런 변화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위기를 맞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는 정체성 중 제대로 기능해서 바꿀 필요가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바꿔야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고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어떤 부분이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하며 적정성을 유지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런 부분은 당연히 보존하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찾아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동시에 개인과 국가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관에 양립하는 새로운 해결책도 찾아내야 한다. 물론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정체성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해야지, 그 부분까지 바꿀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위기와 관련해 개인과 국가에는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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