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가난한 노인으로 늙는다는 것
우리는 “늙는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이 된” 사회에 살고 있다. 도시에 사는 노인의 처지는 굉장히 유별나다. 서구가 400여 년에 걸쳐 겪은 변화를 40여 년 만에 급격히 이뤄낸 산업화 과정의 탓인지도 모르겠다. 공동체의 보살핌은 사회와 도시의 변화 속에서 급속히 약화되었다. 도시 노인의 처지가 유별난 이유란, 지금 이들이 겪는 문제가 우리가 처음으로 겪는 문제이기 때문일까?
한국의 도시에서 판잣집이 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이 사라진 줄 알았다. IMF 시기 즈음, 지하철역과 공원 곳곳에 노숙인들이 자리 잡는다고 아우성과 민원이 사회에 시끌벅적했고, 사람들은 가난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 노숙인들의 처지를 일이 망하고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의 끔찍한 말로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들이 차도와 골목을 다니며 고물상에 팔 수 있는 것들, 다시 말하자면 남들이 버린 것들을 줍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해서 상자를 줍는다고 생각하고 지나쳐도, 어떤 노인들은 판잣집이 아닌 멀쩡한 집에 들어가 밥을 차려 먹었고, 또 벤치에 앉아 동네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알고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폐지 줍는 노인이 있는 곳이 가난의 현장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길 위의 노숙인 같은 사람만이 가난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이제는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주거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강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는데,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모두가 다른 편인, 재활용품 줍는 노인 무리를 보았다. 물론 그들이 함께 다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경쟁 중이었고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엔 몰랐지만,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니까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 소설의 설명이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고물은[고물 줍기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였다. 물건이 나올 시점을 잘 잡아 때 맞춰 돌아다녀야 했다.” 노인들에게 가난은 경쟁을 통해 드러난다. 이들은 경쟁 속에서 팔 만한 재활용품을 획득해 생계를 꾸렸다.
넝마주이의 후예들
폐지를 비롯한 폐품을 줍는 사람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서구에서는 이런 이들을 오랫동안 ‘rag picker’라 불렀고, 한국사회에서는 넝마주이라 불렀다. 넝마주이들은 헌 옷 따위의 넝마와 가발을 만들 머리카락 등을 수거해 다른 제조업자들에게 팔았다. 그러나 요새 한국서 헌 옷 따위의 넝마는 (비)공식적인 초록색의 의류수거함에 들어가 버리니, 주된 주울 거리는 아니었다. 수거함에 모인 헌 옷이나 이불은 중간업체가 다 긁어모아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혹은 중앙아시아 등으로 수출한다. 그래서 옛말대로의 넝마주이는 이제 없는 존재가 됐다. 이제 넝마주이의 일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변화했고, 지금의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이들이 하는 일 역시 ‘재활용’ 가능한 폐품을 주워다 파는 것으로 그 방식 역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의 재활용품 수집 일은 과거에 제도 바깥의 일이었던 넝마 줍기에서 달라진 게 있을까? 이제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일은 직업이 됐을까? 노인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를 두고 ‘이 일’ 혹은 ‘이 직업’이라고 지칭한다. 이 점에서 그/녀들이 하는 폐품 수집과 판매 행위는 엄연히 직업이며, 노동이다. 그렇지만 이 직업, 그리고 이 노동은 여전히 ‘비공식적’인 것이다. 그 어떤 제도에 의해서도 인정되지 않는 일이며, 공식적인 통계 수치로 잡히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 넝마주이의 일이 넝마주이와 고물상과 폐품 매입업자 사이의 단순한 거래 관계였다면, 지금 재활용품 수집 노인은 이보다 더 고도화된 ‘관계’에 갇혀 있다. 이제 노인들이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행위는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의 자원순환 정책과 재활용 산업에 매개되어 있다. 그렇지만 제도와 산업,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하는 위험한 일에 불과하다.
이 책의 배경 ― 북아현동의 지역적 특징
이 글은 행정동의 구분으로 북아현동과 충현동으로 불리는 지역에서의 조사를 기초로 한다. 두 지역을 따로 나누지 않고 편의상 북아현동이라 부르겠다. 북아현동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계급적 구획이 명확하며, 다음으로 도심과의 거리가 가깝다.
우선 계급적 구획에 대해 살펴보겠다. 지형도를 보면 북쪽에 안산이 있고, 안산의 양쪽 줄기인 서쪽과 동쪽은 높은 지대고, 가운데는 평평하다. 여기에는 식민지기의 것으로 보이는 주택 몇 채, 1970년대 불량주택 재개발로 새로 지어진 주택들, 한때 기업인 박태준이나 정치인 이기택과 같은 명망 높은 이들이 살았던 ‘저택’ 단지, 1990년대 이후 지어진 다세대 주택, 2010년대에 지어진 ‘고급’한 아파트들이 뒤엉켜 있다. 시간대를 특정할 수 없이, 각 시기에 따른 주택의 특성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이 주택지는 위치에 따라 주민의 소득 수준과 생활에 차이가 존재한다. 북아현동의 서쪽은 2006년 시작된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에서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여기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순 없고, 이제는 평당 4,000만 원대 중반의 아파트 단지가 됐다. 반대쪽의 남은 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은 여전히 오래되어 집값이 싼 동네로 알려졌고, 주민들 역시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이 많다. 물론 젊은 청년들에게 값싼 셋방이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세 살이를 하는 신혼부부나 직장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북아현동은 잠이나 자고 나서는 공간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이 지역은 서울역과 종로 등지의 도심 지역과 가깝다. 서울역까지의 거리가 2km에 불과하고, 걸어서나 대중교통을 타고 20여 분 정도 걸린다. 남대문시장까지도 대중교통으로 20~30분 정도, 종로1가도 같은 시간이 걸린다. 서울의 중심부까지 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에 도심부에서 일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기 좋다.
북아현동 고지대의 한낮은 온통 노인들뿐이다. 젊은이들은 생계를 위해 동네 바깥에 나갔고, 노인들만 골목을 따라 산자락을 오르락내리락하고 혹은 골목 어귀를 어슬렁댄다. 이 풍경은 북아현동만의 모습은 아니다. 서울에서 재정비촉진지구혹은 재정비촉진구역로 지정됐거나, 지정될 만한 오래된 동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책의 주인공 ― 북아현동의, 폐지 줍는, 여성, 노인들
이 글은 여태껏 남아 있는 그때의 가난했던 이농민들, 지금의 가난한 노인들을 관찰하고 만난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내가 만난 그녀들은 어떤 의미에서 ‘쉬지 않고 살아왔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슬픔도 기쁨도 한껏 느끼며, 부지런히 노력하며 말이다. 어느 여름날에 만난 노인들, 특히 여성 노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기서 젊은 시절을 모두 보낸 이들이 많다. 시기로 치면 이들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북아현동으로 들어왔다. 출신을 물으면 전국의 팔도 사람들이 다 있다. 한때는 잘살아보겠다는 꿈으로 서울에 왔거나 어쩌다 보니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 모두가 뒤섞여 함께 늙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다룰 이야기는 그녀(들)의 ‘노력’에 관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 이 주목하는 이들은 폐품을 주워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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