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이 있는 집
일본이 전쟁에서 지던 해, 우리 가족은 오사카 와카야마현 센난군 히네노에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고향인 ‘고치’로 돌아갔다. 그 후 일 년 몇 개월 동안, 고치시에서 산 하나 넘은 곳에 있는 아가와군 니시분 마을에서 살다가, 이웃마을 요시와라현재 하루노로 이사를 갔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다.
쌍둥이 형제인 유키히코와 나는 수레에 가득 실린 살림 도구들 사이에 짐처럼 실려서 덜커덕덜커덕 요시와라로 갔다. 흔들리는 수레를 타고 숲속 하얀 길을 가다 보니, “숲속 하얀 길, 따가닥따가닥 마차가 달려요.”라는 동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요는 환상적인 분위기이지만, 수레에 실린 유키히코와 나는 덜커덕거리는 길을 따라 알지 못하는 장소로 끌려가는 것이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친할머니의 형제뻘 되는 사람 집에 도착했다. 집주인인 ‘다시마 진마’는 성격이 이상한 구두쇠였다. 메이지 시대에 시골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동경에서 대학까지 다닌 진마 아저씨는 어렵게, 어렵게 자신의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로 빼앗겼던 토지를 전부 다시 사들이고,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군정이 행한 토지개혁 때문에 먹을 것도 아껴가며 어렵사리 사들인 농지의 대부분을 빼앗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진마 아저씨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한 사람 분량의 토지만 남기고 빼앗길 처지였다. 그래서 우리 일가 여섯을 몽땅 양자로 들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사를 하고 난 뒤, 진마 아저씨는 토지개혁이 선포된 다음에 양자를 들인 경우에는 식구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밥을 먹여야 할 식솔만 늘고, 평생을 바쳐 사들인 논과 밭을 모두 빼앗겨 버린 것이다.
진마 아저씨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마구 쏟아내면서 “맥아더가! 맥아더가!”라고 소리 질렀지만, 실제로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은 우리였다. 아버지는 비겁하게 우리만 놔두고 혼자서 고치시에서 하숙하겠다며 가버렸고, 형은 우리가 요시와라에 오기 전부터 에히메현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랑 네 살 위인 누나와 우리 두 형제만 진마 아저씨네 집에 남게 되었다. 우리 식구는 하루도 빠짐없이 진마 아저씨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낯선 마을로 이사 와서 친구도 없었던 우리는 진마 아저씨의 괴롭힘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멋진 저택의 오래된 정원에는 빨간 열매가 달린 백량금, 남천촉, 만년청이 있었다. 진마 아저씨는 센베이와 흑설탕을 몰래 숨겨놓고, 우리한테는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픈 우리는 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를 따서 맛을 보았는데, 모두 이상한 맛이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특히 울타리를 타고 올라간 남오미자 열매는 모양도 이상한 데다가 쓴맛이 났다. 낯선 마을에서는 나무 열매까지 우리에게 심술을 부렸다.
집에 있으면 구박을 받으니 우리 둘은 개울로 자주 나갔다. 물은 차고 물고기와 개구리는 아직 진흙 속에서 잠을 자는지 강바닥에는 다슬기가 기어 다닌 자국만 남아 있었는데, 꼭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 자국처럼 쓸쓸함이 맴돌았다.
비교적 따뜻한 남녘땅인 도사현재의 고치였지만 이월 초순의 날씨는 꽤 쌀쌀했고, 우리가 사 년 동안 뛰어다닐 산과 들도 아직은 서먹서먹하게만 느껴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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